어느 저녁, 함께 일했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 지내고 계세요?”
“네. 잘 지내요. 웬일이세요?
“사실은...” 그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제가 어젯밤에 선생님에 대한 꿈을 꿨는데 좋지 않은 꿈이라서 너무 걱정돼서요. 별일 없으시죠?”
우리는 서로 SNS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근황을 알지 못했고, 올해는 함께 하는 사업도 없다 보니 자연스레 소식이 뜸했다. 미신을 믿는 그의 이야기에 실소는 났지만, 1인 생활자인 나를 걱정해 주는 그 마음이 고맙고 반가웠다.
“제 소식은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알 수 있어요. 달리면서 생존 신고를 하는 거예요!”
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반은 진심이 섞여 있었다.
OO님이 응원을 보냈습니다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짝짝짝 함성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오고 “OO님이 응원을 보냈습니다.”라는 AI 음성이 들려온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된 후 헬스장과 체육시설들이 문을 닫자 건강과 피트니스 관련 유튜브, 애플리케이션 사용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사람들은 홈트레이닝을 하거나 인적이 드문 공원, 강변 등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 달리지만 애플리케이션에 매일 쌓이는 운동 기록을 보며, 시간과 거리를 늘려가며 어제의 나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도전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기분을 느끼며 달리기 이상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2022년 1월, 새해 결심으로 체중감량을 목표로 한 나는 동네 친구와 같이 한강 변을 달리자고 약속했고 그 친구의 추천으로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의 세계에 접속했다. 하지만 2022년 달린 날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시작했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난 2023년 3월, 심각한 우울증으로 잠 못 드는 날들을 보내던 어느 새벽, 뭐라도 해야 했기에 해가 뜨면 무작정 나가 뛰기 시작했다. 그날로부터 다시 1년 반가량이 흘렀고 이삼일에 하루를 달리며, 쉬지 않고 한 시간을 달릴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3분을 달리는 것도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힘들어하던 때를 떠올리면 현재의 지구력과 폐활량은 불안과 우울이 줄어든 만큼 커졌다.
달리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실연을 겪은 포레스트 검프는 집을 나와 그 길로부터 달리기 시작한다. 무려 3년 2개월 14일 16시간 동안 달리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엄마, 군대에서 만난 버바와 댄 중위, 그리고 제니. 아름다운 풍경 속을 묵묵히 달리는 그의 옷과 신발은 낡고, 땀에 절고, 수염과 머리는 아무렇게나 자라 마치 수행자처럼 보인다. 끝없이 달리기만 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달리냐는 질문을 퍼붓고 그의 길을 추종하며 답을 구하지만, 대답 없이 뛰기만 하던 그는 “이젠 집에 가야겠어요.”라는 말만 남긴 채 뒤돌아 간다.
달리기를 하면서 어떤 사람은 ‘머릿속을 비우고’, 어떤 사람은 ‘생각을 정리한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주로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인데 목표한 거리에서 반환점을 도는 순간부터는 오직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 들 뿐이다. 다리는 마치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자동화된 기계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머릿속에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날 뿐이고 남겨지는 건 없다. 달리며 정리하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더라도 달리다 보면 사라지거나 다른 생각이 개입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 흘러가 버릴 거니까. 슬픔도, 분노도, 그리움도, 의구심도, 걱정도, 흥분도, 마치 두 발이 지면을 박차고 떠오른 것처럼 잠시나마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자유를 향한 달리기 : 연극 <블라인드 러너>
지난 7월 18일부터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싱크 넥스트24의 초청으로 이란 연출가 아미르 레자 쿠헤스타니의 연극, <블라인드 러너>가 세종S씨어터 무대에 올랐다. <블라인드 러너>의 등장인물은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한다. 2022년 9월 전 세계 ‘히잡 시위’를 촉발했던 22세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돼 의문사한 사건을 SNS에 최초로 보도해 감옥에 갇힌 기자, 닐루파 하메디와 그녀의 남편이 주인공이다.
텅 빈 블랙박스 무대 위, 아내는 감시카메라로 둘러싸인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면회를 온 남편은 위험한 정치 활동을 하는, 감옥에 갇힌 아내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부의 되풀이되는 대화는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부유하며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실시간으로 송출된다. 감옥에 갇힌 아내는 남편에게 시위에서 눈에 산탄총을 맞고 시력을 잃은 파리싸의 ‘가이드 러너’가 되어 함께 파리 달리기 대회에 출전할 것을 권유한다. 파리싸와 함께 호흡을 맞춰 훈련하던 남편은 그녀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제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 터널을 밤사이 달려 건너려 한다. 38km의 터널을 건너는 데 주어진 시간은 단 5시간 35분.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시속 160km로 달리는 아침 첫 기차에 치이게 되는 운명 앞에 선다. 어두운 터널, 커다란 경적으로 끝나는 연극의 결말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등장인물은 아내, 남편, 그리고 파리싸 세 사람이지만 아내와 파리싸는 배우 한 명이 연기한다. 감옥에 갇힌 아내는 이란 사회의 문제를, 영국 해협을 건너려는 시각장애인 선수는 죽음의 고비를 넘는 난민의 현실을 이야기함으로,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 탄압받는, 자유를 잃은 인간으로 연결된다.
2022년의 이란 히잡 시위 이후 수백 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이 시위에는 수많은 남성이 연대했고, 시위는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생명, 자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혁명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연출가 쿠헤스타니는 도쿄 패럴림픽에서 시각장애인 마라톤 선수가 가이드 러너와 함께 달리는 사진을 보고 “개인으로서 투쟁하는 자유는 공동의 성격을 지닐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완성된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블라인드 러너>의 초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결국엔 여성의 자유가 보장돼야 남성의 자유도 보장되고, 그 답에 이르기 위해선 사회 전체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여정을 담은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고도 했다.
한편 파리싸는 파리 달리기 대회에서 수여하는 메달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산탄총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파리싸는 말한다. 심각한 난민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실상 전쟁과 정치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쟁을 이용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국가가 배후에 있는 한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 난민, 이민자, 가난한 자, 세계의 비참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건너야 하는 어두운 터널이다.
<블라인드 러너>는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는 ‘상태’임을 강조한다. 마치 궤도에 오른 달리기처럼 “의식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팔다리와 심장박동, 호흡이 서로를 수렴하며 일치된 움직임”을 만드는 것처럼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최상의 것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1)
땅 위에 그림을 그리는 달리기
최근에는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달리기 경로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그려지는 GPS 라인을 특정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지그재그로 돌거나, 원을 그리는 등 구체화한 연결을 만드는 것이다. 호주 작가 세린 파드(Cherine Fahd)는 몸짓, 접촉, 느낌, 듣기, 보기, 그리고 상상과 연결된 “신체 기술”이라는 점에서 달리기와 그림 그리기의 공통점을 찾는다. 달리는 날의 기분, 생리 현상, 스트레스나 정신 건강 상태, 수면, 식사량, 날씨, 낯선 사람과의 상호작용, 듣고 있는 노래의 가사 등 GPS 데이터로는 가시화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이 달리기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목탄과 연필이라는 오래된 도구를 사용해 지저분한 낙서, 일기처럼 고의로 단편적이고 얼룩지고 부정확하게 장거리 달리기에 관한 데이터를 드로잉으로 기록했다. 세린 파드는 이 작업을 통해 관객들에게 GPS에 드러나는 최고 기록 대신 욕망, 두려움, 꿈을 추적하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인생을 종종 길에 비유하기도 하고 달리기는 삶의 메타포가 되기도 한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달리기는 때론 신념과 염원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의 첫 마라톤은 2017년 동료들과 함께 뛴 대구국제마라톤대회의 ‘Remember 0416’이었다. 비록 5km였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마라톤 완주 기록을 수없이 세운 동료까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함께한다는 의미가 중요했다. 연대와 지지, 기억과 애도, 달리는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수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얼마 전 끝난 2024 파리 올림픽의 폐회식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 마라톤 시상식으로 마무리되었다. 파리올림픽 조직위원회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시골에서부터 올라온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를 인권의 나라로 만들고, 자유의 가치를 수호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런 취지로 파리 올림픽 마라톤은 시청에서 출발해 베르사유 궁전을 거쳐 앵발리드로 들어오는 혁명의 길을 디뎠다. 또한 조직위원회는 대중 참여 행사로 올림픽 마라톤 코스와 동일한 길을 달리는 야간 마라톤 <‘Marathon pour tous’(모두를 위한 마라톤)>을 기획해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의 유산과 역사를 기념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홀로, 또는 함께 달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연소시켜 나가고, 서로에게 응원을 보내며, 어쩌면 우리는 길 위에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그림은 평화가 되고, 자유가 되고, 혁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미주
1.인용구는 전시 《달리기: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piknic, 2024.4.5.~7.28. 리플릿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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