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사용되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틀, 나는 이 틀이 오래도록 불편했다. 가만 보면 반드시 형식이라서 형식이라 하고 내용이기 때문에 내용이라 하는 게 아니었다. 문학이나 미술에서도 그랬고, 철학에서도 그랬다. 어느 한쪽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데, 형식이라 하기엔 너무 아니면 내용에 배속시키고, 내용이라 하기엔 들어있는 게 너무 빈약하면 형식이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이 아니면 반드시 형식이라는 틀은 대체 어디서 온 물건일까?
유사품에는 질료형상론이 있다. 진흙으로 단지 같은 걸 만드는데... 운운하며 맨날 늘어놓는 얘기. 데미우르고스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거대 서사가 전형이다. 세상의 뭇 존재들 중에는 질료와 형상으로 양분하기 힘든 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니까 질료와 형상은 필요할 때 적절하게 구사하면 되는 도구지, 집착하거나 지배받아야 할 신성불가침한 무엇이 아니다.
2.
이 문제에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의 원자론을 개입시키면 어떻게 될까? 만물은 결정 구조로 포착할 수 있고, 더 깊이는 원자들의 집합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내용이나 질은 원자와 그 구조로 환원된다. 적어도 원리 차원에선 그렇다. 물론 내용이나 질 같은 게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원자 구조로 환원된다는 말이다. 생명의 여러 독특한 질도, 이러저러한 내용들도 다 화학적 구조로, 더 나아가면 원자들의 구조로 환원된다. 이런 구조 중심의 세계관의 궁극이 E=mc²이나 F=ma 같은 방정식이다. 증세가 심한 사람들은 수학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쪽 생각을 계속 하다보면 내용형식론도 질료형상론도 모두 form 우위론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사실 데미우르고스라는 조물주가 한 일도 질료를 잘 설득해서 형상을 부과하는 것, 그래서 그 질료가 형상을 띠도록 한 것이었던 거다. 가만 있자, 그런 일을 한 존재라면 조물주(造物主)가 아니잖아, 만물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질료에 형상을 띠게 한 거니까 음... 일종의 디자이너?
3.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20년쯤 전 읽은 <노마디즘>의 내용형식과 표현형식 대목을 새삼 떠올렸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옐름슬레우를 차용하면서 전개한 논의인데 역시 들뢰즈와 가타리가 괴물 맞구나 감탄했다. 내용-형식이라는 폐회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처음 봤어. 단, 그들의 논의가 내게 무슨 의의가 있는지는 잘 안 들어왔고, 거기에도 내용과 형식이 달려 있다는 게 성이 차지 않았다.
4.
형상우위론에 대한 비판이 달리 없었던 건 아니다. 시몽동과 하이데거는 “질료는 형상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형상이 질료로부터 유래한다고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볼 때 “훌륭한 장인은 질료의 특수한 상태에 기반해 또는 질료로부터 형상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조각상을 빚어낸다.” 현대의 일부 예술가와 비평가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견해다. 작품이란 작가가 자신의 구상을 물질을 통해 실현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물질과 직접 뒤섞여들면서 작가가 부서지고 그 터에서 물성이 절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곧 작품이라는 예술관 말이다.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이는 물질형식론과 거기에 담긴 형식우위론을 건드리지도 못한다. 게다가 물질이나 물성을 중시하겠다는 출발선의 문제의식이 종착점에서는 더 숭고해진 인간중심주의로 다시 떨어져버린다. 이케 보면 질료-형상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건 장난이 아니다.
5.
획기적인 주장을 한 것은 시몽동이었고 나는 그걸 육후이의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에서 읽었다. “기술적 대상의 정체성은 곧 그것의 생산의 총체성이다. 그 대상의 형태[형상] 및 물질[질료]과는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총체성이다.”. 바로 이거지! ‘생산의 총체성’이 옳은 대안이냐는 문제와는 별도로, 기술적 대상들을 그 대상의 형상과 질료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다. 통쾌상쾌한 주장이다.
6.
내용-형식이나 질료형상론에 대한 숙고가 몇 해전 정신-육체 이분법과 찰칵! 연결되었다. 그 순간 나는 이게 결국 창조론의 문제임을 알았다. 무슨 소린가? 창조론이란 세상은 이미 존재하며, 그 이후 ‘무로부터의 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여기엔 ‘유로부터의 무’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함께 깔려 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세상에서 금수처럼 그냥 살아가던가 아니면 그것을 변형하는[형태를 바꾸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꼭 할아버지가 긴 두르마기 치렁거리며 눈에서 불을 뿜어야만 창조론이 아니다.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게 창조론이다.
7.
형상을 최고로 치고 그것의 담당자가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은 역으로, 물질의 존재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고 무릎꿇는 행위다. 이 비참한 생각은 위로물을 필요로 했다. 그 때문에 인간 주변의 물질들은 극도로 폄하당해야 했고, 인간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요컨대 세상은 저 위에 있고 인간이 그 아래에 있고 밑바닥에 물질이 있는 그런 세계상이다(특이한 인종들은 바닥 속 깊이 지옥이 있다고 상상했다). 창조의 극한은 기껏해야 ‘변형’이고, ‘변질’이라고 하면 상한 것, 나빠진 것, 썩은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들 했다.
8.
하지만 우린 이미 태양 같은 게 우리 은하계에 2천, 3척억개 정도 있고, 이런 은하계가 우리 우주에는 천억 개 정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은하나 우주들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 갈수록 가속 팽창하는 가운데. 해 아래 새것이 없긴커녕 해라는 것도 언젠가 과거에 생겨난 물건이고 언젠가는 소멸할 운명이다. 범우주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개물일 뿐이다.
9.
육후이가 질료형상론을 비판하고 곧장 이를 하이데거의 서양 비판으로 연결짓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수순이다. “형상은 서구형이상학과 근대과학 및 테크놀로지의 수렴점 – 하이데거라면 그것을 물(物)의 존재-신학적 구성이라 부를 것이다 – 이 된 이념성에 대한 추구를 작동시킨다.” 서양의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꼽히는 철학(즉, 형이상학)이 실은 존재신학(ontotheology)이었고, 그 핵심에 ‘형상’이라는 이름의 ‘신’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기계생산 시대에 질료보다 형상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개념화”된 것은 곧 2500년간 지속된 철학의 완성이자 종말이다.
10.
‘그럼 대체 형식내용 이분법과 질료형상론의 대안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없다. 하지만 대안이 없더라도 부자연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내용이나 형식 같은 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둘 중 어느 한쪽이 아니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라고 하는 논리는 구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대안이 없는 건 본래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속단하지 말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 않은가! 사실 형식-내용 틀을 ‘극복’할 필요도 없다. 필요한 만큼 쓰면 된다. 일단은 형식 지배의 치하에서 벗어난 자유를 누리자.
11.
예전에 여자들이 이상한 행동을 했을 때, 협박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니가 남자냐?”는 소릴 들어야 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고 또 말할 수 있다. 여자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남자는 아니라는 것을. 비여자도, 또 비남자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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