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란겔:다크투어>의 엔딩에서는 기이한 장면 전환이 발생한다. 플레이어들은 에란겔의 한가운데에 모여 종말을 기다리는 중이다. 가만히 선 채로 그들의 숨통을 차츰 조여오는 자기장에 압도당하는 중이다. 자기장은 푸른빛이며, 자기장 너머에는 천둥번개가 치고 있다. 카메라는 플레이어들의 표정을 일부러 포착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플레이어들을 조망하고, 관객도 사방에서 밀려드는 자기장을 보게 한다. 이때 자기장이 고정된 카메라를 관통하기 시작한다. 자기장은 자연 바깥에 존재하던 것이었으나, 이 장면 전환 이후로 지형이 뒤바뀐다. 오히려 인간이 서있던 땅이 자연 바깥으로 전환되며 그들은 자기장에 압도당해서 죽는다. 자기장 밖에 새로운 자연이 생기고, 자기장 안 자연은 사라지고 만다. <에란겔:다크투어>의 가장 염세적인 장면이다. 강렬한 반-인간주의는 작품이 의도하지 않은 데에서 나온 듯하다. 이 장면은 작업의 큰 기획을 실패로 느끼게 한다.
<에란겔:다크투어>(2021)는 공공예술 프로젝트 가상정거장(예술감독 김성희)의 폐막 이벤트로 문화연구자 오영진의 기획으로 <배틀그라운드>의 맵 에란겔에서 한 퍼포먼스 실황을 녹화한 영상 작업물이다. 퍼포머들이 다수의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배틀그라운드>의 맵을 탐사한다. 퍼포머는 에란겔을 세 섹션으로 나누어서 폐허로 변한 에란겔을 돌아다닌다. <배틀그라운드>는 오픈월드에 리스폰된 플레이어가 자신(혹은 자신의 팀)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들을 처치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배틀로얄 장르다. 도망치기만 하는 플레이어들을 저지하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장이 줄어드는 큰 제약이 가해진다. 전장이 좁아져야만 플레이어들이 서로 발견해 죽이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에란겔:다크투어>는 게임의 규칙을 거스른다. 자기장이 옥죄어오는 와중에도 플레이어들은 연대한다. 눈앞에 닥쳐오는 자기장을 목도하지만 플레이어들은 도망치기보다 함께 죽는 편을 선택한다. <에란겔:다크투어>는 죽음의 땅을 연대와 축제의 장으로 만드는 과정을 뒤쫓는다.
이 작업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과 기 드보르의 전용(Detournement)을 게임에 적용한다. 상황주의자들의 터전이었던 파리는 1853년, 파리 시장 오스만 3세의 구획에 따라 근대화된 도시다. 모든 구역이 정확히 나뉘었고, 대로들이 건설되었다. 혁명 한가운데에 있던 바리케이트와 프롤레타리아는 도심에서 추방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파리를 근대와 자본주의가 도시화된 곳이라 진단했다. 상황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은 파리라는 근대화된 도시가 지닌 억압적인 구도에서 발생한다. 당시 미국에서 온 소비주의 사회에 차츰 잠식되어가던 파리는 권태와 무기력에 사로잡힌 도시가 되었다. 삶의 패턴마저 고정되어서 생명력이 죽어가던 도시 공간을 재구획하고 되살리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학생회와 출판한 팸플릿《비참한 대학생활》에서 상황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와 파시즘과 전체주의, 소비주의 사회에 경멸을 표하고 1871년 파리 코뮌을 위대한 승리로 추대한다. 이데올로기(혹은 스펙터클)의 심리적 억압을 폐기한 뒤에, 삶의 총체성을 복원하는 일상생활의 혁명을 이룩하자는 그들의 과격한 무정부주의적 비전이 온전히 구현된 혁명이 파리 코뮌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주체가 된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간 인식은 파리 곳곳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기획으로 발전한다. (초현실주의에서 비롯된) 돌발적인 상황을 계속해 만드는 퍼포먼스를 주도했다. 그들의 전략 중 하나인 '전용'은 '인용'의 반대다. 특정 상황의 맥락을 반대로 뒤틀어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에란겔:다크투어>는 텅 빈 구소련의 농촌, 정체불명의 발전소, 무너진 사원 등 건물들을 재구성한다. 세 지형은 프로그래머들이 게임 내의 긴장도를 높이려 만든 엄폐물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건축물을 본뜬 것인데다가 비트이자 기호에 불과할지 모른다. 세 퍼포머(이경혁, 이영준, 권보연+장병호)는 세 곳에 전사(前史)가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어떤 참사가 발생했는지, 사람들이 왜 없는지, 하필이면 왜 여기서 사람들이 싸워야만 하는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퍼포머들은 게임이 현실을 더 급진적으로,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란 전제를 두고 에란겔을 재구성한다. 무의미하다고 여긴 미장센과 소품들을 하나씩 마주하고, 상상력으로 그것들의 의의를 부여한다.
재난의 풍경은 꼭 장소로 지정되지 않는다. 재난을 가능하게 했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가 재난 그 자체일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를 넘어서 근대성이 우리 자체에게 폭력이라 지적했듯 우리 시대의 재난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깃들어있다. 에란겔에서는 적자생존과 각자도생이 자행된다. 아무런 목적도, 의의도 없이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규칙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배틀그라운드]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배틀로얄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세계관이다. 신자유주의와 게임 장르의 특성을 뭉뚱그리는 연결은 자칫 게으른 분석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는 이유는 이 게임이 전복하려는 것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란겔에 접속한 플레이어들은 쓸 만한 총과 머무를 공간, 자동차를 스스로 발견하고 혼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퍼포머2(이영준)가 지적하듯이 이 게임은 “적을 굴복시켜 인정받으려는 인정투쟁을 목적으로 둔 그간의 게임들과 달리 상대의 섬멸만 목적으로 한”다. 팀을 꾸린들 팀을 제외한 모든 이를 사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곳은 “손댈 수 없는 영역은 없으며, 모든 경제적 금기와 생명에 대한 존중이 박살 났고, 이를 차단할 수 있는 공간도, 구원할 수 있는 공간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고어 자본주의》, 사야크 발렌시아, 최이슬기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1, p.54), 사야크 발렌시아가 고어 자본주의라고 정의한 신자유주의의 속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플레이어들은 에란겔에 접속한 순간에 개별자가 아니라 플레이어1, 2로 환원된다. 플레이어는 상대를 주체가 아닌 기호로 마주하고 거리낌 없이 폭력을 가한다. 죽은 자의 숫자가 죽은 자 대신 자본이 된 사회에서 플레이어의 고유성은 소거된다. 능력과 운만이 플레이어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든다. 에란겔에서는 연대도, 적대도 불가능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도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현실을 한 발짝 멀리 떨어져 패키지 투어로 보는 이 작업은 곧장 현실을 뒤집은 작업으로 이어진다.
<에란겔:다크투어>가 복원하려는 것은 한때 RPG게임에 존재한 느슨한 연대 공동체가 아닐까. 이 작업에는 RPG게임 속 클랜 공동체에 향수가 가득하다. 작년도 극장가에서 게임 팬들의 성원을 얻은, 박윤진 감독의 다큐멘터리인 <내언니전지현과 나> 보다 그 향수를 잘 느끼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다큐는 망한 RPG게임인 일렌시아에서 여전히 머무르는 클랜원들을 찍는다. 나이, 직업 등 물리적인 조건에 구속받지 않고 함께 플레이하는 것만으로도 클랜원들은 서로에게 연대감과 신뢰감을 지닌다. 이 작품은 RPG게임 속에 내포된 공동체를 더 이상 사회에서 느낄 수 없고,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비춘다. 억압적이지 않은 공동체, 파리 코뮨적인 공동체를 구현하는 클랜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에란겔:다크투어>는 클랜 공동체를 잠시나마 복원하며 그때의 공동체 감각으로 되돌아가려 시도한다. 한곳에 모여 춤을 추고, 자기장에 함몰당하면서도 그들은 그 자신들의 승리를 증명한다. 상황주의자들이 파리 코뮨을 위대한 실패이기에 위대한 성공이라 말했듯이.
작업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퍼포먼스의 안온한 태도를 한계로 지적하고 싶다. 실황인데도 상황이 너무도 잘 통제되고 있다는 매끈함이 작업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실황 중계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돌발상황은 퍼포머들의 통제나 참여한 플레이어들의 자발적 통제로 소거된다. 플레이어들이 일부러 산만하게 움직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그들의 패키지 투어는 순탄하게 이어진다. 에란겔의 으스스함이 느껴지지만 다크투어리즘을 진행하면서 플레이어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에란겔이 감각으로 체험되는 대신 퍼포머의 나레이션만으로 설명되기에 이 작업은 에란겔을 다룬 사회학 강의 세 편을 모아둔 듯한 인상을 준다. 플레이어들의 반응을 소거한 점이라든가, 탐사와 설명을 반복하는 구도가 지루하기 만한 강의를 연상하게도 한다. 후반에 다다라 퍼포머3(권보연+장병호)이 이끄는 대로 모든 플레이어들이 춤추기 시작하는 순간에야 작업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퍼포머 3은 플레이어야말로 게임의 주체라 호명하고 동작을 주도한다. 게임도 현실처럼 오류와 모순이 발생하는 장소다. 산만하게 움직이려는 것은 키를 눌러 충분히 연출해낼 수 있지만 춤은 원래 설정에는 없던 것이다. 춤동작은 완전히 구현되기보다 뻣뻣하게 구현된다. 자연스레 연출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마는 이 뻣뻣한 춤동작은 이 작업의 미학을 완성한다. 체험이 성공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야말로 에란겔을 여행하는 다크투어리즘을 완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남긴다. 그럼에도 왜 다크투어리즘은 성공해야만 할까. 작업의 끝을 보고 든 의심이다. 주체가 되어 에란겔을 전복한들, 이 작업의 고유한 한계는 다른 곳에 있다. 게임의 카메라가 플레이어들의 감정을 포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긴 여정에도 우리는 투어리즘의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멍을 이야기하고 싶다. 화면에 턱을 괸 채로 앉은 소방수가 등장한다. 소방수 옆에 침대에다 아이를 뉜 여성의 모습을 비추는 큰 구멍이 생긴다. 그는 여성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음을 알아챈 뒤에 안절부절못하다가 출동한다. 휴게실에서 쉬던 소방수들이 경보를 듣고 철봉을 타고 내려오며, 소방서 앞에 세워둔 마차에 올라 화재 현장으로 떠난다. 애드윈 S.포터의 영화〈미국인 소방수의 하루〉(1902)오프닝 씬에는 두 시공간을 한 프레임에 접합하는 구멍이 나온다. 외-화면이 내-화면을 찢고 등장하는 구멍이며,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프레임 밖에 다른 시공간이 존재하리라는 가능성을 여는 구멍이다. 구멍이 등장한 순간이 사진과 회화의 언저리에 낀 영화가 고유한 장르로 기능하는 첫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은 한 시공간만을 포착한 회화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살아 움직이는 피사체가 스크린에 드러나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스크린은 캔버스와 구분되지 않는다.〈눈싸움〉,〈공장노동자의 하루〉는 뤼미에르 형제가 카메라로 그린 회화라고 할 수 있다. 화가가 화폭에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화폭에 담아 세계관을 드러냈듯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도 그들이 지닌 세계관을 드러낸다. <미국인 소방수의 하루(1902)〉는 한 프레임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드러낸다. 철봉을 탄 소방수들이 다른 공간에 진입하면서 따로 존재하던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다. 두 화면 사이의 연속성이 생기며, 프레임 너머 또 다른 무한한 프레임(들)이 존재한다는 심적 증거가 마련된다. 스크린 너머로 새로운 시공간이 생기면서부터 영화는 사진, 회화와는 다른 대상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현실의 시공간을 그대로 찍되, 프레임을 짜깁기해 이질적 시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촬영 현장이 서울과 부산이라도 우리는 영화에서는 하나의 세계만을 마주하는 셈이다.
질 들뢰즈가《시네마1》에서 절대적 프레임-바깥(Hors-Champ)이라고 칭한 프레임이 제시된다. 상업영화들이 매끈한 편집 동선과 산문적인 몽타주로 인물의 동선을 예측할 수 있는 데에 비해, 초기영화들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공간이 등장하여서 마법같은 공간의 전이가 발생한다. 두 공간이 충돌하면서 한 우주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발생한다. <미국인 소방수의 하루>가 시공간이 끝없이 확장되리라는 긴장감, 마법같은 기대를 품게 한다면, 상대적 프레임은 숏의 접합이 이야기의 통일성에 복무한다. 영화는 두 낯선 공간을 잇고, 충돌하게 만드는 지도그리기 작업이다. 홍상수보다 이를 더 선명히 드러내는 감독은 드물다. <도망친 여자(2020)>에서 홍상수가 시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영화는 세 에피소드들을 연결한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카메라는 크레인숏으로 산을 비춘다. 남산을 중심으로 동떨어진 세 시공간은 하나로 이어진다.
<에란겔:다크투어>는 과연 지도를 그리는 작업일까? 이 작업은 옵저버 플레이어의 화면을 중심으로 하되, 프레임이 넷으로 구분되어서 관객들에게 네 시공간을 동시에 보이게끔 한다. 플레이어들은 팀을 나눠 움직이고 다른 곳에 있다가 이윽고 한 곳에서 만난다. 넷으로 나뉜 화면 속의 플레이어들의 만남은 세계의 확장으로 체험되기보다 세계가 연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 간의 충돌도, 시공간의 충돌도 없이 네 화면이 병렬되어있을 뿐이다. 에란겔은 애초에 프로그래머가 설계한 맵이다. 맵 바깥은 존재하지 않으며, 맵 내부에서도 풍경은 생명력 없는 화폭처럼 그려져 있다. 영화는 생명들의 불규칙한 움직임마저 풍경으로 담아내지만, 에란겔은 온전히 통제된 프로그래밍된 공간이다. 에란겔 바깥은 모두 바다에 불과하고, 에란겔마저 환영이자 게임이 끝난 뒤에는 곧장 사라져버리는 공간이다. 에란겔에는 대안적 세계는 물론, 세계의 이면을 환기하는 구멍이 없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을 “세계의 한 부분은 세계의 전면에 표상되”며, “세계를 능가하는 위치를 점하”는(《스펙터클의 사회》, 기 드보르 저, 유재홍 역, 울력, 2014, p.31) 이미지로 설명했다. 에란겔은 이미 세계 전체가 되었기에 벗어날 수 없는 장소다. 드보르는 자살하기 전에 쓴 회고록 <파네지릭>에서 파리가 한때 혁명의 도시로 불렸으나 쇠락했다고 진술한다. 그가 폐허라 말한 파리와 에란겔은 얼마나 다를까. 기 드보르는 더 나아가서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서 망명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한다. <에란겔:다크투어>의 플레이어들이 계속해 자기장으로부터 도망치는 경험은 망명, 혹은 난민화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이 떠나고 떠나서 마주하는 결말은 다 같이 죽는 것뿐이다. 이 작품의 끝에서 모두 죽는 상황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에란겔은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다크투어리즘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참사를 목도할 수 없다. 참사를 생중계로 본다고 한들, 우리가 다크투어리즘을 떠나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잔해뿐이다. 후쿠시마, 세월호, 거슬러 올라가면 홀로코스트와 리스본 대지진 등 참사의 단말마만을 가늠하게 될 뿐이다. 우리 사회의 숱한 재난들은 패션으로 소비될(일본에서는 “폐허 모에화”로 쓰인다.) 가능성이 충분하다. SNS에 업로드되고, 관광지로 지정되고, 폐허의 뉘앙스만을 소비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소모될 수 있다. 재난은 비트화되고, 실재는 외면당한다. 이 작업은 재난을 비트화하는 대신 폐허를 우회한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세월호, 용산 참사 등 특정 역사적인 사건을 지시하지 않고, 으스스한 에란겔 탐사를 다크투어리즘이라 명명한다. 비트화된 장소 에란겔은 폐허의 형태로 제시된 알레고리의 장소(벤야민)가 된다. 우리의 내면에 각인된 많은 재난들은 해석자의 주관 아래서 해석되고 환기된다. 비트화된 공간에서 이 안내자들 없이 우리는 재난(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비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이 작업은 온전히 에란겔에서만 머물고 버티려 한다.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 자체는 외부화된 폐허를 전장으로 만들어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이 폐허임을 은폐한다." 퍼포머2 이경혁)
에란겔 플레이어들에게는 망명이랄 것이 아예 불가능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일만이 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은 규칙에 저항해서 움직이지만 결국 공간이 점차 줄어들다가 사라진다. 이 실패는 '게임'이라는 고유한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소비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다른 전략으로 심리지리학을 이야기한다. 단골 카페, 자주 들르는 서점, 첫사랑과 만난 곳 등등 개인적이고 소중한 장소들을 성좌를 그리듯 이어서 도시 공간을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발터 벤야민의 소요(Flaneur)와 다르게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 곧장 걸어가는 일이다. 출발지와 도착지만으로 구성된 횡단을 우리는 어디서 본 적 있다. 영화의 점프컷이다. 점프컷은 장면의 동선을 일부러 이탈해 감독이 포착한 두 이질적인 프레임을 강제로 접합한다.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할 시공간이 급작스레 사라지고, 감독이 본 개인적 풍경이 드러난다. 장 뤽-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에서 쓴 점프컷은 그 당시 파리의 시공간을 심리지리학으로 그려낸 것이다. 씬과 씬 사이의 유기성을 파괴하고 접합하는 체험은 프레임을 개인이 택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이 작업은 실시간으로 모든 것을 전개하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한다. 네 화면 사이에서도 서로의 합의된 룰이 존재한다. 점프컷, 프레임의 마술적인 연속성, 개인적 풍경은 이 작품에서 불가능하다. 에란겔 어딜 비추든 에란겔의 풍경이고, 플레이어들은 벗어날 수 없는 지도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A에서 B로 간다고 한들, 우리는 언제나 좌표화되고 동선을 추적당한다.
기 드보르도 세계를 하나의 통합된 스펙터클로 인식했다. 그는 영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파운드 푸티지를 모아서 짜깁기한다. 스탈린과 서부극, 프랑스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영화들은 분명 이 세계가 벗어날 수 없는 곳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기 드보르의 마력은 하나라고 여기지 못한 것들이 급작스레 하나로 합쳐지면서 마술적인 순간을 만드는 데에서 비롯된다. 전 세계가 스펙터클로 통합되는 과정은 산문적인 몽타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르네 비에네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서 한국-홍콩 합작 영화 <정도>의 자막을 뒤바꾸어 서사를 와해하듯, 기 드보르도 마찬가지로 선전물, 뉴스, 포르노를 한 데 묶어서 하나의 서사로 만든다. 파운드 푸티지 화면의 매력은 느닷없이 이미지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실재를 마주치고, 소비주의 사회가 무한히 규모가 확장된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이때 충돌하는 두 이미지는 아날로그 물성을 지닌 것들이다. <엔드게임>이 디지털과 CG로 무한히 확장하려는 우주는 MCU라는 서사의 영토에 불과하지만 기 드보르의 영토는 서사의 영토에서 벗어난다. 이미지 생산을 하지 않고서 짜깁기만으로 이를 만들어낸다. <에란겔:다크투어>의 체험은 MCU에 가깝고, 서사를 와해하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든 똑같기만 한 디지털 영토의 무한한 확장을 구현한다. 선언적이어야 할 것들은 혹 로드무비여야 할 것들은, 이 작품에서 인용되고 서사화된다.
<에란겔:다크투어>가 구현하려는 감각은 이 작품의 의도와는 무관히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쉬우리라는 지젝(혹은 마크 피셔)의 절망과도 이어진다. 상황주의를 연출하지만 그것마저도 프로그래밍된 게임의 영토 아래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를 설명하나 자본주의에 내재된 폭력성을 비가시화된 영역으로 두어야만 하고, 돌발 상황은 관리되며 폐허들은 비트 너머 세계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는다. 폐허의 현장을 볼 때 우러나온 공포와 압도, 정동을 드러내는 인서트 숏도 제거되고, 관객은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만 남게 된다. 모순은 여기서 발생한다. 프로그래밍된 에란겔을 전복하고 전용하려는 작업이야 말로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퍼포머들의 룰에 따라 움직이며, 관객들은 강의를 듣는 수동적인 존재로 축소된다. 그들은 그들만이 존재하는 유토피아에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배틀로얄에 응축된 자본주의 시스템 바깥을 플레이어도 볼 수 없다. 카메라가 옵저버의 통제권에 있지 않기에 당연히 카메라도 그 바깥을 비추지 못한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게임에 인간의 얼굴이 비추어지는 방식이다.
게임 [배틀그라운드]에서 제일 먼저 사라진 것은 얼굴이다. 자크 오몽이 지적했듯 영화 속 얼굴은 깨뜨릴 수 없는 총체적 통일체다. 더 나아가서 얼굴은 세계고, 내밀한 차원에서 시간의 흐름을 내재한다고 본다. [배틀그라운드]의 카메라는 인간이 조종하되, 프레임을 옵저버 마음대로 포착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 제약 속 플레이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숏이 제일 먼저 사라진다. 게임의 카메라는 언제나 큰 지형을 조망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드론, 혹은 전투기 시점에서 개인은 점으로 인지된다. 비릴리오의 지적대로 전쟁-카메라의 결합은 개인을 기호화한다. 인간은 섬멸해야만 하는 기호가 된다.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카메라가 이미 구현하고 있다. 게임 속 퍼포먼스가 성공한다고 한들, 우리가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서로를 섬멸해야 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에 이 작업은 실패한다. 버즈아이드 숏과 풀숏을 중심으로 한 게임 카메라는 클로즈업의 기적을 만들지 못한다. 큰 맵을 다루는 그래픽이 제일 먼저 훼손하는 것이 표정이기 때문이다. 초기 영화에서의 클로즈업은 얼굴로서 독해되는 무언가를 요구했다. 이 얼굴은 차츰 소멸하고 이윽고 디지털-얼굴이 되어버렸다. 혁명의 기쁨과 슬픔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은 얼굴이다. 이 얼굴에 드러난 미세한 변화와 운동이 제거되고, 인서트는 이를 비출 수 없다. 플레이어들이 춤추고, 오류를 발생시키되 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하는가는 끝내 제시되지를 않는다. 춤추기로 통제할 수 없는 움직임을 만들고 난 뒤에도, 그 감동은 기록되지 못한다.
작업이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배틀그라운드]의 영토, 혹은 카메라가 이미 우리의 인지체험에 폭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주체가 아니다. 안준형의 지적대로 NPC화된 플레이어라고도 부를 수 있다.(안준형, <플레이어가 npc가 될 때: 자유의 의지, 자동 사냥의 의지>, 웹진 콜리그 21.05.20) <에란겔:다크투어>는 우리가 NPC마저 아님을 드러낸다. 얼굴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을 마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우리가 이 세계에서 영영 살아가고 말리라는 절망, 시공간이 고정되어서 이 세계가 자연이 되어가리라는 절망이 이 게임의 희망 뒤편에 깔려있다. 플레이어는 플레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플레이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곧장 폭력이 된다. 춤추기로 통제할 수 없는 움직임을 만들고 난 뒤에도, 빨간 약을 먹고 난 뒤에도 우리는 뇌 속의 통에 불과하다. 통 속의 뇌라는 말이야말로 기만이다. 텅 빈 에란겔은 주체가 제거된 우리 내면의 폐허다.
이 작품에서 더 섬뜩한 것은 처음에 언급한 씬에서의 카메라가 고정된 순간이다. 자기장이 인간을 옥죄어오고, 인간이 살던 자연이 온통 파괴된다. 우리가 주체라고 믿었던 신념들이 무너진다. 빌 맥기번이 “인류의 모든 경험의 합”(《폴터》, 빌 맥키번, 홍성완 옮김, 생각이음, 2020, p.16)이라 비유한 휴먼 게임의 끝이다. 이미 “그저 너무 커지고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이 모든 결정에 위험이 따르는”(앞의 책, p.26) 레버리지가 가동된 탓이다. 자기장은 인간들이 공존하려는 악착같은 의지로 인해서 마주하는 재앙이다. 플레이어-인간은 자기장 밖을 볼 수 없고, 우리는 자기방 밖을 이 게임의 규칙 밖 옵저버 뷰로만 마주할 수 있다. 왜 자기장 바깥은 또 다른 자연인가. 여기서 이 작품의 잔인한 반-인간주의가 시작된다. 혁명에 나서는 인간들이 다 죽고 나서도 저 자기장 바깥은 여전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태계는 이미 인간이 더는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 되었고, 인간과 무관한 초과체(Hyperobject)가 되었다. 자기장은 우리의 생활을 뒤덮은 전기로부터 온 것이다. 차츰 가속화되는 기계의 폭력은 이미 인간을 초과한다. 이를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든가, 프로그래밍을 거부하여서 자살에 다다라야한다든가 하는 염세주의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카메라는 끝까지 인간들의 종말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들을 기리고 추모하면서, 혁명이 기억으로라도 남게 비추어야만 했다. 그들이 섬멸되는 순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서 자연만을 남기려는 고정된 카메라는 옵저버가 의도했든 아니든, 혁명의 기쁨과 슬픔이 영영 찍히지 않으리라는 비전에 다다른다. 엔딩에서 드러난 기둥은, 한 세계에 기둥이 하나 우뚝 선 모양이다. 이것이야말로 뇌 속의 통의 형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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