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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한국문학의 시간 / 이영준

최종 수정일: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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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월간 󰡔『신동아』󰡕 4월호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실렸다. 그 글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브라운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하버드대학교의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백낙청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뒤 한국 문단에 등장한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글에서 백낙청은 박경리의 장편소설 󰡔『전장과 시장』󰡕󰡕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제목을 가졌으나, 한국전쟁의 상흔을 한국문학의 유산으로 남겨주는 데 실패한 작품으로 판단한다. 『전장과 시장』은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야릇한 감회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과연 한국전쟁을 겪었던가?”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그 이유는 이 소설이 “아무런 의미도 이루지 못하고 수난의 열거로만 그친 기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낙청의 이 비판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 소설이 “과거의 행동을 눈앞의 그림처럼” 그린다는 구절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행동으로서 갖는 박력”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백낙청은 박경리의 『전장과 시장』이라는 작품이 실패작이 된 이유가 소설 문장에서 현재형 동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전장과 시장』의 언어에서 또하나 눈에 띄는 점은 현재형의 사용이다. 보통 과거형으로 서술되기 마련인 이야기를 대부분 '...한다' '...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현재'의 사용은 장면을 더욱 눈앞에 보이듯 부각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짤막한 스케치도 아닌 장편소설에서 이 수법은 분별없이 쓴다면 지루한 매너리즘으로 전락하고 만다. 뿐 아니라 '역사적 현재'에는 그것대로의 부작용이 따르는 법. 과거의 행동을 눈앞의 그림처럼 그릴 수 있는 대신, 행동으로서 갖는 박력을 희생시키기 쉬운 것이다. 즉 독자는 이야기의 진전을 따라가기보다, 그때그때 눈앞에 제시되는 화면의 방관자에 그치게 될 우려가 있다. 파란만장한 이 소설의 사건들이 별로 극적 감동을 못주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1).”

     

백낙청의 이 비판에 대해 박경리는 즉각 반발했는데, 도대체 누가 과거시제 사용의 원칙을 수립했는지 들은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러한 원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왜 작가가 그런 원칙을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박경리의 반박에서 우리가 즉각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백낙청이 말하는 과거시제 사용의 의미도 필요성도 깊이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백낙청의 지적은 당시의 작가들은 물론이고 한국문학을 쓰고 읽고 연구하는 영역에서 의미 있는 문제 제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한 차례의 문제 제기와 반박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후속 반응이나 연구가 지속된 흔적은 없다.




1965년 『신동아』 4월호에 실린 백낙청의 『전장과 시장』 서평과 5월호에 실린 박경리의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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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에서 시간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위의 백낙청의 주장이 처음은 아니다. 소설에서 시간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1919년, 김동인에 의해서다. 김동인은 자신이 과거시제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2). 김동인의 주장에는 적지 않은 과장이 섞여 있지만,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쓰면서 김동인이 서술문에서 과거시제와 삼인칭대명사를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어 문장에서 그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과거시제를 사용한 적은 있으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과거시제를 사용한 것이 김동인이 처음이라고 해서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간 의식이나 대명사 사용이 어떤 중요한 인식 틀의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김동인은 그것이 자신의 공적이라고 반복하여 주장했지만, 김동인 이후 한국 문학에서 현재시제가 배제되고 과거시제로 이행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삼인칭 대명사의 사용과 과거시제가 가진 의미가 보다 더 심원한 데 있다는 생각에 이르지는 않은 채, 그 후 소설가들의 문장에서 과거시제 문장이 더러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다지 심각한 고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박경리가 백낙청의 주장을 일언지하에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문제가 진지한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천지』 1948년 1월호, 「문단 30년의 자최」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성격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 롤랑 바르트는 김동인과 비견되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과거시제와 삼인칭 대명사라는 마스크의 사용에 의해 소설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 즉 인위적 시간 분절과 세계와의 거리 설정이 가능하게 되었다3). 시간의 선후관계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복합적 현상을 하나의 줄거리로 요약하는 과거시제는 그 뒤에 질서의 주재자를 숨기고 있다. 삼인칭 대명사에 의해 지칭되는 인물은 구체적 개인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이며, 그 인물의 행위가 세계와 맺는 관계는 과거 시제에 의해 확정된 사건으로 구체화된다. 즉, 과거시제의 사용은 이러한 과거를 가능하게 하는 어느 시점의 관찰자의 존재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삼인칭 화자와 분리불가능하며, 이러한 근대소설에 의해 개인의 내면성이 거주하는 시공간이 확보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장치에 의해 독자는, 그것이 비록 추상적이라 할지라도 세계의 전체상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바르트의 설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시제에 의해 가능하게 된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주관자가 어떤 신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성서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전근대적 세계에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바라보는 신의 존재가 상정되었다면, 근대 세계에서는 삼인칭으로 지칭된 인물이 바라보는 세계가 상정된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적 자아가 상정되고, 세계를 자신의 시점에 의해 재구성해서 원근법적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존재, 바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조물주'가 나타난 셈이다. 이 조물주는 재미있게도 예술적 거리에 의해 상정된 주인공일 수도 있고 이 전체적인 구도를 이끌어가는 화자일 수도 있고 화자를 만들어내고 소설 전체를 조작하는 작가일 수도 있다. 김동인이 소설 쓰기를 인형조종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탁견이다. 이러한 세계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드러났지만 아주 강력한 자아를 상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세계다. 이는 소설의 세계가 근대적 세계라고 불리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는 한국 문학에서 낯선 세계가 아닐 수 없다.

     

3

     

이 문제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백낙청의 글로부터 16년이 지난 1981년, 김우창에 의해서이다. 김우창은 「한국소설의 시간」이라는 논문에서 백낙청의 문제 제기가 지닌 심대한 의의를 인정하고 본격적인 해명을 시도했다4). 김우창은 그 논문에서 한국 현대소설에서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는 관습이 한국의 고전소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김우창은 한국 현대소설의 예로 염상섭의 「삼대」와 이광수의 「무정」의 첫장면을 제시하고, 한국 고전소설로는 「구운몽」 「춘향전」 「사씨남정기」의 한 장면을 제시한다. 그리고 서양 현대소설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의 한 장면을 제시한다. 여기서 김우창이 주장하는 것은, 서양소설에서는 사건을 묘사할 때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사태를 객관화시키는 데 비해 염상섭이나 이광수 같은 작가가 쓰는 한국의 소설은, 고전소설과 동일하게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현장적 묘사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의 차이는, 김우창이 보기에, 소설 기능에 대한 이해에서 중대한 차이를 드러낸다. 현장적 묘사는 독자가 사건 현장에 임재해 있는 생생한 감각을 경험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사물의 질서를 새로이 구조화하는 힘, 소설이 가진 예술적인 힘의 원천인 시간적 변화의 내면적 경험을 삭제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문예중앙』 1981년 겨울호,「한국 소설의 시간」

사건의 연쇄를 통해 세계의 전체에 대응하는 개인적 내면의 질서를 이룩해가는 과정이야말로 근대적 소설의 핵심 내용인데, 그러한 세계의 전체성이 끊임없이 유동하고 휘발하는 현재로 그려진다면 내면적 질서는 이룩되기 힘들다. 여기서 김우창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면적 질서란 주체가 만들어낸 질서로서 앞서 언급한 바르트의 '조물주'의 질서다. 서구 소설이 가진 힘은 이러한 '조물주'의 사상이 배후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가령, 사르트르가 문학이 '영구혁명 중인 사회의 주체성'이라고 할 때,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로서의 대중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이 불의한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그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문학이고 소설이다. 문학이 기존의 사회 질서를 객체화하고 다가올 세계를 다시 하나의 그림으로 객체화하게 될 때, 우리는 이 두 시점 사이를 잇는 시간성을 포착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내면화하는 것이 서구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개인이다. 한국소설에서 이러한 변화의 내면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김우창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소설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한국소설이 이광수와 염상섭을 거치면서도 현재시제에 머물면서 서구 근대 소설이 다다른 성취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지적한 이 논문에서 김우창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두고 '이 작품은 내 생각으로는 하나의 소설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이는, 당대의 다른 여러 작품들은, 구체적으로 거명하고 있지 않지만 소설에 미달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있는 선언적 문장이다. 조세희의 소설이 시대상을 잘 보여주면서 그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또 끈질기게 저항하는 인물들을 통해 근대인의 내면 세계를 잘 그리고 있으니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것이다. 조세희의 이 소설이 당대 한국사회의 발전 방향을 산업화로 상정하고 이에 따른 갈등을 그린다는 점에서 주어진 시간의 구조적 질서를 그린다는 관찰은 합당하다. 김우창은 새삼스럽게 지적하지 않았고, 소설의 다른 평자들이 주목하지 않은 사실은, 작품의 문장이 대화나 일기 같은 직접인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체로 쓰여있다는 사실이다. 조세희의 이 작품에서 소설을 발견한 김우창의 감각에는 백낙청과 궤를 같이하는 영문학의 수련이 들어있다는 점을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다.

     

4

     

한국에서의 소설 발전에 지속적 관심을 표명했던 국문학자 김윤식 또한 영문학자 백낙청과 김우창이 견지한 입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어쩌면 더 강고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는 한국의 많은 작품들이 소설에 미달하는 ‘이야기’라고 하여 이문열 등의 반발을 산 바 있다5).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이른 현재까지 발표되고 있는 한국의 소설에서 김우창이 말한 설화적 과거를 현재시제로 표현하는 경우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우창이 주장한 것은 서양소설의 범례에서 말한 것인데, 과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되물어볼 필요는 없을까?


서양소설이라고 해서 과거시제가 법칙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장적 묘사가 주는 박진감을 위해 일부러 도입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최근의 영어권 문학의 양상은 백낙청, 김우창, 김윤식의 소설관으로부터 상당히 이탈해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일인칭 소설을 많이 쓰게 되면서 주인공의 감정재현에 문장을 소모할 때 현재형 동사는 독자와의 감정 공유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 한때 화제가 되었고, 황석영이나 조정래 같은 작가들이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바도 있다. 하지만 영미 현대소설에서도 과거시제의 권위는 이제 바닥으로 내려온 느낌이 없지 않다. 마가렛 애트우드는 현재시제 문장으로 유명하며, 영국에서도 현재시제의 문장에 대한 불만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6). 장편소설 󰡔네이티브 스피커󰡕로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이창래의 소설에서 현재형 시재가 많이 사용된 이유를 저자에게 직접 질문한 적이 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이창래는 필자의 질문에 대해 독자에게 박진감을 주기 위해 현재형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며 그 문제는 미국문단에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7)



시제에 관한 논의로 한국문학이 저발전 혹은 미발전의 누명을 더 이상 뒤집어쓸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드러난 문제는 오롯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지적된 한국문학만의 특이한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아예 누락되고 무시당한 무엇인가가 저기, 한국문학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백 년간의 서구문학 공부가 놓친, 그 시점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던 한국문학의 어떤 것이 재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한국문학에서의 재발견은 문학 일반을 보는 관점을 재발견하는 것이며 지난 백 년간 받아들여 적용해왔던 문학 일반에 대한 사고를 업데이트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한국의 시에서 발견한다.

     

5

     

대한민국은 시의 공화국이다. 현재 세계문학의 지도에서 시의 강세는 한국문학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출판 산업이 융성했던 20세기에 여러 언어권에서 밀리언 셀러가 나타났지만 시집이, 그것도 여러 권이 밀리언 셀러로 판매된 경우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어느 언어권의 문학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예외적 현상이다. 교보문고에 가보면 시집 코너가 따로 있고 거기에 매주 갱신되어 전시되는 시집 베스트셀러 매대가 따로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서점에서 시집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많아 봐야 수십 권이고 그것도 현역 시인이 아니라 대부분 고전들이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문학연구자들이 한국의 시집 출판 현황에 대해 듣게 되면 모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민음사나 문학동네, 창비, 문지 등의 대표적인 문학출판사들이 제각기 수십 년 동안 수백 권의 시집을 지속적으로 출판하고 있고, 그 시집들이 새로 인쇄될 때마다 시인들이 저작권료를 받는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다. 외국에도 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시를 써서 발표할 때 원고료는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뉴요커󰡕같이 백만 부를 상회하는 출판부수를 가진 거대한 잡지에서는 고료를 주지만 예외적이다. 대부분의 문학 잡지는 적자 상태이고 기금 지원을 받아 출판되기 때문에 게재 자체가 영예일 뿐이다. 한국의 많은 시인들은 고료를 주지 않는 일부 문예지를 기피하며, 시집을 출간하면 인세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한국만의 사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이러한 시의 강세는 한국문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리라는 점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시는 본질적으로 일인칭 문학이며 한 인간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직접 인용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 목소리는 독서 행위의 현장에서 독자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과거시제의 객관화가 가능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시를 읽는 방법은 한 가지뿐인데, 하나의 시를 독자가 스스로 하는 말로 읽는 것이다. 이러한 직접성은 의태어, 의성어가 잘 보존된 한국어의 특징에도 의존하고 있으며, 감정 재현의 현재성에 집중하는 한국문화의 전통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과 한국어의 특징은 인쇄문화의 문자적 시각성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면서 구어적 청각성을 보존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자어에 비해 구어가 우세한 한국어의 화행 조건은 한국소설을 과거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에 붙들어 매어두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최근의 한국시 창작에서는 문장이 끝나도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거의 관습으로 굳어져 있다. 소설의 대화문에서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 역시 늘고 있으며, 한 문단 안에서 과거시제와 현재 시제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한국 소설의 오랜 특징 중의 하나다. 한국 소설 작품에서 문단을 만드는 법칙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문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행갈이를 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신경숙이나 박민규의 소설들을 보라.) 인쇄된 문장이 아니라 일상어 사용자의 입말에서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한국문학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은 인쇄문화의 도입과 함께 정착되고 있는 문자문화의 관습을 거부하는 한국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동인이 소설 쓰기란 인형조종술과 같다고 한 것은 서양 근대소설의 근본적 성격을 간파한 탁견이다. 다면적이고 동시적인 세계를 파악가능한 계층적 시간 질서로 변환시키는 소설의 기능은 전근대 시대 서구에서 신이 차지한 자리를 과학혁명 이후 대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학 전통에서 그러한 서사시 전통은 부재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다는 시간관은, 한국인의 시간 감각에서는 편안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다는 시간관, 특히 이전이 없는 처음, 나중이 없는 마지막이라는, 문학작품의 질서에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은, 실재와 분리된 초월성이나 세계와 분리된 인공적 허구라는 관념이 가능한 서구적 서사질서에나 부합할 따름이다. 동아시아적 시간관에서는 인공적 허구라 할지라도 언제나 어떤 주어진 시간 흐름의 중간에 속하며 실재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인간 조건의 전체성은 삼인칭의 마스크로 대체된 가상의 존재가 그려내는 서사의 객관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특히 한국어 담론 공간에서 한 인물을 '그'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무화시키고 모욕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회피된다. 한국 소설에서 삼인칭 대명사 '그' 대신에 등장인물의 이름이 계속해서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혜경의 단편 「피아간」에서 주인공 '경은'이라는 이름은 정확하게 150번 반복된다.) 서구 문학에서 등장인물과 독자 사이의 거리는 예술작품으로 성립되기 위한 결정적 조건이지만 한국문학에서 그러한 분리와 거리와 소외는 회피된다.

     

6

     

독립된 개인이 만들어가는 허구적 시간은 한국인의 서사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의 등장은 서구 소설의 성립에서 결정적 요소이며, 개인 간 관계에서 복합적이고 불특정 위치에 놓인 사태를 처리하는 방식으로서 자유간접화법은, 서구 근대 소설에서는 20세기에 와서야 서사이론가들에게 새로이 주목되었다 (플로베르 『마담 보봐리』,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 하지만 한국 일상어에서 자유간접화법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한국 소설에서 자유간접화법 문장은 피할 도리 없이 나타난다. 소설의 어느 페이지에서 '그는 슬프다'라는 문장을 발견할 경우, 독자는 그 문장이 화자의 생각인지 작가의 생각인지 등장인물의 생각인지 판별할 수 없다. 한국어에서 '그'를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교체할 경우 '그'는 허구적으로 추상화된 인물에서 세계-내-존재로 위치가 부여되고 독자와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서사시의 통합된 시간에서 개인의 서사로 전환되면서 서구의 서사이론이 주목한 자유간접화법이 한국인의 서사에서 왕성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개인과 집단의 관계성에 유달리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결론으로 해석된다. 여기에는 한국문화의 독특한 전통이 작용하고 있으며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인의 서사 또는 화행 전통은 시에서 잘 나타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인들이 즐겨 읽는 서정시는 대부분 어떤 감정적 장면을 자유간접화법의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읽고 쓰는 서정시의 주된 요소는 감정 환기와 공감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랫동안 가장 대중적인 시로 알려져 있는 윤동주의 시를 그런 지지와 공감을 받는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한국문학의 지배적 성향은 때로 심각한 오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김수영 시의 독해이다.


김수영은 그 자신의 시가 한 번도 제대로 된 비평적 판단을 받은 적이 없다고 쓴 적이 있다. 김수영이 작고한 후 쓴 글에서 염무웅은 김수영이 문학작품의 평가에 자주 사용하던 ‘죽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지만 김수영 이해의 핵심어로 지목받는 ‘사랑’이나 ‘자유’ 같은 개념도 아직 혼돈 속에 잠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으로 ‘시간’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김수영이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연구는 아직 없다. 앞서 길게 논의한 소설 문장의 시제 문제와도 직결되는 이 문제는 서구에서 말하는 소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백낙청과 김우창이 이해한 서구 근대소설의 입장에서 보면 소설이란 시간을 객체화한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세계의 변화를 기록하는 장치로서 고안한 것이다. 변화의 순간에 에피퍼니를 보는 찰스 테일러의 관점이라든가 시간이 주어졌다고 말한 루카치의 유명한 문장이 이 문제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엔카운터 지」라는 시에서 친구가 빌려달라는 잡지를 빌려줄 수 없다고 하면서 “시간의 인식”에 대해 쓰고 있는데 시간은 김수영에게 죽음과 자유를 잇는 매개체로서 사랑과 함께 주어진다.


1965 「엔카운터지」 초고 사진


세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공자나 노자 시대부터 알려진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세계를 우리가 혹은 내가 만들어간다는 관점은 최근의 것이다. 우리가 세계 변화의 피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주체라는 관점은 근대적이다. 시간이 주어졌다는 루카치의 그 문장의 핵심을 자신의 작품에서 구현하려던 것이 김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가 말한,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체성으로서 자신을 설정하고 써내려간 것이 김수영이다. 그 관점에서 김수영의 시를 다시 읽어보면 김수영의 작품에 대한 그간의 많은 오해가 풀린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의 사물을 정지시켜 묘사하는 무시간성의, 영원을 노래하는 서정주 류의 시를 낡았다고 비판했고, 사물의 관점에서, 그 내부적 동기의 관점에서 사물을 노래했다. 한국전쟁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린 것이 기존의 시인과 작가들이었다면 자유를 찾기 위한 자신의 전쟁으로 그려낸 것은 김수영이 유일하다.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를 보라.)



김수영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원고


한국평단에서 가장 탁월한 시 독자로 추앙받았던 김현조차 김수영의 시적 주제를 잘못 파악한 듯하다. 김현은 김수영을 세상에 널리 알린 시선집 󰡔거대한 뿌리󰡕의 해설 「자유와 꿈」에서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 이 유명한 문장은 오랜 기간 김수영 독자들에게 어길 수 없는 금언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쓴다. “그것은 그의 초기 시편에서부터 그가 죽기 직전에 발표한 시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끈질긴 탐구 대상을 이룬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문제적이다. “그는 그러나 엘뤼아르처럼 자유 그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시적 정치적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케 하는 여건들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김현의 이 비평문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가 김수영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는 점에 있다. 김수영 시가 한국문학에서 한 번도 주제화하지 않은 자유의 근본적인 성격을 깊이 탐구하고 있었던 것을 김현은 알 수 없었다. 김현은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외적인 여건,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해 김수영이 분노하고 절규했다고 파악했지만, 김수영은 자신을 그런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는 자유의 외적 여건뿐만 아니라 자유의 내적 조건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있었다.


물론 김현의 미숙함은 그만의 잘못은 아니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외적인 조건의 변화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후의 냉전적 대치와 권위주의적 정치로 인하여 외적 상황이 의식을 옥죄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신을 피동적 위치에 두었고 의미 있는 발언은 언제나 외세나 독재자의 억압을 벗어나려는 생존의 몸부림으로 읽혔다. 김수영의 시를 가장 먼저 인정하고 문학사적 가치를 논증한 김현승마저도 김수영 시에 내재한 자유의 시간관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김수영 독해를 심각하게 오도했다8). 김수영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풀」은 여러 가지의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있기 때문에 참고서에서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김현승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풀은 민중이고 그 풀을 눕게 만드는 바람은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이라는 김현승의 해석은 오랫동안 그 작품을 해석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를 김수영 자신이 주장한 내적 동기의 관점에서 보면, 풀은 풀 자체의 내적 동기로 보아야 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사랑의 변주곡」이나 「꽃잎」 같은 작품들은 모두 내적인 동기에 의해 변화해가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묘사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대한민국의 어느 부자가 부럽지 않다고 한 그는 「꽃잎」에서 자신이 ‘대한민국의 전재산’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르렀다. 자신이 완성한 하나의 작품으로 인해 세계가 조금, 그것이 아주 조금일지라도 움직인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을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체성으로 보는 자에게만 가능한 관점이다.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시를 통해 자유를 산다고 김수영은 말한 바 있다. 이 자유가 바로 김현이 몰랐던 자유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변화의 시간, 그것을 자유라 하든 혁명이라 하든 내적 동기에 의해 변하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관찰이라는 점에서, 김수영이 생각한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 이러한 작품 독해에 필수적이다. 한국 소설에 나타는 현재형 시제의 문장에 관련된 자유간접화법 문제가 김수영의 시 작품에 대한 이런 독해에까지 뻗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수영의 「풀」에 대한 김현승의 해설

한국문학이 일상언어로 문학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가령 최초의 장편소설이라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쓰인 지 겨우 백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만 뒤처진 느낌을 받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서구에서 언어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사물과 세계와 맺는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의식하게 된 것도 겨우 백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와 언어의 거리를 멀찍이 떨어지도록 만든 소쉬르의 ‘언어적 전회’ 이후,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서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 문학은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쳐온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변화는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은지도 모른다. 외적 세계의 변화와, 언어에 대한 이해의 변화 같은 사고 방식의 변화가 한국문학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검토하는 것이 학자들의 일이다. 자세히 검토된 바가 없다면 다시 검토하면 된다. 어쩌면 근본적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연구가 지속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무의미의 시학을 주장했던 김춘수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오랜 탐구는 실패했다고 자탄한 것처럼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조그만 발견이나 변화를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한국문학 연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난 백 년 동안에 경험한 외적 환경의 변화가 너무 극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외적인 여건의 변화가 우리의 삶을 조건 지운 경험이 강렬했기 때문에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왔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나타날 미래의 한국문학 연구는 좀 더 담대하게, 보편적인 관점에서 세계와 한국문학을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가 쓴 논문들, 특히 「한국문학의 시공간 혹은 시와 소설의 불분명한 경계」, 󰡔비교한국학󰡕 25권 3호, 2017 ; 「김수영 시의 시간」, 󰡔현대문학의 연구󰡕 75권 (2021.10)의 내용과 많이 겹친다. 더 상세한 논의는 위 논문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미주>


1) 󰡔『신동아󰡕』󰡕, 1965년 4월호, 325쪽.

2) 김동인이 과거시제 사용이나 삼인칭대명사 '그'의 선구적 사용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1919년 발표작 「약한 자의 슬픔」이다. 그보다 한 해 앞선 이광수의 1918년작 「윤광호」에서 이미 과거시제 사용이나 대명사의 사용이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광수는 또한 1909년에 단편소설 「愛か(사랑인가)」에서 대명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김영민, 「한국 근대 문체의 형성과정」, 󰡔현대소설연구󰡕 (65), 2017. 3. 52-54 참조. 김동인, 「문단 30년의 자최」, 󰡔신천지󰡕. 1948년 3월호. 129쪽.

3) Roland Barthes, Writing Degree Zero, translated by Annette Lavers and Colin Smith, Beacon Press, 1970, pp. 29-34.

4) 「한국 소설의 시간」, 󰡔문예중앙󰡕 16 (1981, 겨울), 44-57쪽

5) 김윤식은 대담 「91년 소설의 현황과 새로운 징후」에서 한국 소설의 발전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소설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출현과 관련된 장르이며 이와 상관 없는 노력, 예를 들어 대체역사 소설 같은 것은 소설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대신 서정인의 󰡔달궁󰡕 같은 소설이 판소리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의 전통에서 우리 소설의 뿌리를 찾아내는 노력으로 관심을 표하고 있다. 󰡔문학사상󰡕 1991년 12월호, 92-108.

6) 가디언 지의 기사를 보라. Philip Pullman, The Guardian, Saturday 18 September 2010. 부커상 수상작들의 현재시제 사용을 지적하고 작가 지망생들이 이를 추종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7) 󰡔중앙일보󰡕 1999년 9월 21일자 14면 필자와의 인터뷰 참조.

8) 김수영 시에 대한 김현승의 오독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이영준, 「김수영 시의 시간」, 󰡔현대문학의 연구󰡕 75권 (2021.10), 313-359.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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