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하여 <한달한옥>.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이 한 달 동안 한옥에서 공연을 한단다. 2019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재)한국연구원의 공동지원으로 만들어진 『잡雜ZAP』을 출간한 지 거의 삼 년 만에 12잡가 완창을 펼치는 자리이다. 2013년에는 안은미·이태원·장영규와 함께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으로 좌창 잡가를 무대화한 실험을 선보였고, 오페라의 고장 이탈리아에서도 박수갈채를 받은 적 있지만 전통의상으로 전통가옥에서 원형 그대로의 소리를 들려주기는 처음이다.
공연 소식을 조금 늦게 확인했다. 매번 치열한 예매경쟁이 벌어지는 그의 공연인데, 관객을 매회 단 여섯 명만 받는다니 이미 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누군가의 취소표가 생겨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마침 12월 25일. 이벤트의 대명사인 이 날을 나도 특별하게 보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아름지기재단에서 문화공간으로 운영 중인 아담한 한옥은 전통가옥이 많은 북촌에 위치하고 있다. 도착하니 관계자가 마당 안쪽으로 인도한다. 고무신들이 나란히 놓인 댓돌을 딛고 부츠를 벗으며 방으로 올라서는 것부터 위태롭고 어색하다. 문도 여닫이, 미닫이, 겹겹이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갓을 말쑥하게 갖춘 이희문이 가장 먼저 도착한 나를 맞이한다. 직접 따라주는 따끈한 우엉차. 상에는 떡이며 과일, 과줄까지 고운 그릇에 차려져 있다. 이어 다른 다섯 명의 관객들도 속속 도착하였다. 연결된 두 방 사이의 문을 터 연출한 T자 모양의 공간에서 손님맞이가 이루어졌다. 가로로 길쭉한 안쪽 방에 ‘주인’이 앉고, 세로로 길쭉한 바깥쪽 방에 ‘손님들’이 둘러앉았다.
공연은 장장 네 시간. 12월 한 달 꽉 채워 월·화요일을 제하고 날마다 한단다. 공연 기간 내내 아예 여기서 살고 있단다. 밤에는 이 방에서 잠을 청하고, 날이 밝으면 일어난 자리를 직접 쓸고 닦아 정갈히 한 다음, 인근에서 매일 한정량만을 파는 떡을 사다 손수 ‘공연터’를 정비하는 것이다. 기분이 묘하다. 공연자를 무대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눕고, 깨고, 연습하고, 매일 다른 여섯 명을 마주하는 그의 터전 안에 내가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에서는 조명이 꺼진 무대가 쓸쓸한 공간에 불과하지만 이 공연은 공연 바깥의 스무 시간마저 공연의 일부로 재현되는 느낌이다.
노랫말이 적힌 열댓 장의 사진 꾸러미는 선물 — 손님상에 앉은 사람 수대로 함께 놓였다. 그러저런 사물들을 뒤적이며 앉음새를 편하게 고치는 동안 희문이 입을 연다. 재담이라 할까, 담소라 할까. 전통연희의 일종의 극 요소로서 분위기를 이끄는 전형적 재담이라기엔 담담하고 담백한 이야기. 담소라기엔 이따금 큰 웃음보 터지는 이야기. 희문은 곡과 곡 사이 구간마다 그간의 소리 여정을 들려주며, 차 한 잔에 목도 축이고 우리에게 다과를 권하고, 방바닥처럼 따뜻한 겨울 오후를 만들기 시작한다.
소리를 어찌 글로 옮길까. 이제부터 하나의 시퀀스 —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의 이희문을 듬성듬성 살피고 따라갈 뿐이다.
13:00 / 소리를 배운 계기
언젠가 서촌의 어느 집에서 한옥의 바닥, 벽, 천장이 가진 공연장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희문은 이번 공연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지난 10여년간 공연예술제, 방송, 음반을 통해 수많은 세계적 히트작을 기록한 그다. 그런데 소리를 쓰기만 하니 점점 텅 비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다시 모으고픈 욕구를 느꼈다. 대형 무대에서 방바닥으로 돌아와 바닥부터 다시 채우는 전통은 이럴 때 확실히 든든한 피난처다.
첫 곡, 「선유가」. 첫 곡 직전의 긴장된 침묵은 희문이 주의를 기울여 발성을 뱉자 일시에 쩍-하고 절개된다. 소리가 길을 내며 줄줄 흘러나온다.
그는 원래 영상예술 전공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뮤직비디오 조감독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 ‘춘희 이모’라 부르던 이춘희 명창 앞에서 한 곡 흥얼댔다가 재주가 남다르니 한 번 배워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고주랑 명창을 어머니로 둔 덕에 태중에서부터 소리를 들숨, 날숨처럼 듣고 자랐던 터였다. 그러다 나간 대회. 덜컥 2등으로 입상하자, 스승 이춘희는 이번에는 “얘, 너 대학엘 좀 가라. 국악과를.”
이미 유학까지 다녀오고 좀 있으면 정식으로 감독이 되는데 새삼 대학에 들어간다니? 남자 소리꾼이 워낙 드문 데다 수상 실적도 있으니 입학은 까다롭지 않았다. 그는 생각 끝에 학교 다니면서 일도 요령껏 병행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만학도가 되기를 택했다. 그러나 곧 ‘소리바다’와 mp3가 음원 시장의 판도를 바꾸었다. 음악계 예산이 줄어들자 뮤직비디오 제작 업계에도 제동이 걸렸다. 자연스럽게 소리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노래를 이어간다. 두 번째 곡은 「십장가」, 춘향이 매 맞는 이야기. 이어, 「제비가」.
14:00 / 강원도 소반과 나주 소반
“경기12잡가는 12개의 노래 모두 하나의 주제로 되어 있는 통절(通節)형태의 곡이며 긴 사설을 바탕으로 연창(蓮唱)형태로 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연창할 때 한 호흡 쉬기 위해 종지형들을 사용해 단락을 만들어 주고 있다. (...) 경기12잡가는 민요처럼 가사의 단락이 정확히 떨어지지 않고 계속 서로 이어져 있으며, 부르는데도 보통 10분이 넘게 걸린다.”
이춘희·배연형·고상미. 2000. 『경기12잡가 근대 서민 예술가들의 노래』. 예솔.
통절형식과 유절형식이라는 음악구조는 잡가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둘의 차이를 희문은 방안에 놓인 소품에 빗댄다. 두 개의 소반이 있다. 동그란 ‘강원도 소반’은 통나무를 밖에서 안으로 깎아 다리와 몸통이 처음부터 붙어있는 한 덩어리로 차츰 형상을 갖춘다. 반면 네모난 ‘나주 소반’은 상판과 다리 등 각 부분들을 따로 만든 뒤에 하나로 조합한다. 강원도 소반은 통절형식, 나주 소반은 유절형식. 흡사 심리스(seamless) 대 솔기 있는 옷. 통절식은 원재료를 사방에서 한꺼번에 두루 다듬어 결과물을 형성해 나가는 한 번의 긴 공정, 유절식은 부품을 차례로 모으고 쌓고 끼우는 여러 번의 단위 공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잡가 중에서 앞서 들었던 「선유가」는 민요처럼 일정한 가락에 노랫말만 바꾸어 불러서 유절형식을 느끼게 한다. 후렴구를 가지고 있으며 가사가 다르더라도 선율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통절로 반복이 없는 가락은 어떻게 다 욀까? 따라 불러보면 이내 알 수 있다, 되풀이와 규칙성 없는 멜로디는 산중 초행길과 같이 암기가 잘 안 된다는 것을. 전문가는 몸에 맡긴단다. 기계적인 반응은 그야말로 연습의 결과다.
이제 다음 곡은 전쟁 서사, 「적벽가」. 가장 박력 넘친다. 통절형식과 유절형식이 부분적으로 혼합돼 있다. 이어진 「소춘향가」는 2013년 발표작 <잡>에 수록된 편곡 버전으로도 이희문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 「집장가」는 여전히 고초를 겪는 춘향의 노래다.
15:00 / 사계축 소리꾼
음반으로 들어 본 여느 소리꾼들의 잡가는 ‘명상에 어울리는 음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우기가 어려운 곡조는 마치 미니멀리즘 현대음악처럼 실험적이고 어쩐지 암울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따라서 여기 와서 명상에 빠질 셈이었다. ‘새해에 무얼 생산하는 사람이 되려나?’ 하는 묵직한 고민을 음악 감상 중 곱씹으면 그럴싸한 답이 떠오를 것 같았는데, 웬걸. 시간이 흐를수록 흥이 나고야 만다.
그제야 알겠다, 소리꾼이 목자랑 하는 노래라 하지. 이유를 희문이 사계축(四契軸) 소리꾼의 유래를 덧붙여 설명한다. 조선 후기에는 지금의 행정구역 동(洞)에 견줄 만한 단위로 계(契)를 썼는데, 요즘 청파동·만리동으로 부르는 지역에 있었던 1~4계에 쟁쟁한 소리꾼들이 많았다. 서대문부터 마포나루터까지의 일대에는 물자 이동이 빈번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니 그 지역에 모이는 신흥 부자들로 인해 자연히 오락이 발달한 것. 이들은 양반 흉내를 내게 되고 여가를 즐기며 양반들이 전유하던 영역에 해체를 시도한다. ‘12가사’를 따라 하기 위해 원래는 여덟 곡이었던 잡가에 네 곡을 보태어 12잡가를 완성시킨다. 그때 박춘경이 만든 「유산가」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는 뭔가를 창작하고 싶어 하는 자유분방함으로 가득하다는 걸 느끼도록 한다. 놀이를 위해 발달한 장르이니 흥에 취하는 게 맞으리라. 「형장가」, 「유산가」로 넘어와 이제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시간은 세 시 사십이 분. 해가 일찍 떨어지는 계절이라 어느덧 창호가 쪽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노래는 「출인가」에서 「평양가」로 계속되고 지금쯤 담장 바깥으로 새어나갈 이 분위기를 행인들은 어떻게 듣고 있을지 상상해 본다. 어디선가 노랫가락 번지는 겨울날의 안국동 골목.
16:00 / 만학도의 통절식 배움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내년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셈이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랜만에 다시 학생이 되어 있다, 새로운 전공으로 이주를 감행. 다니던 직장을 퇴사한 이후 잠시 전업 학생으로 산다. 분야 간 횡단은 처음이 아니니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력은 어지간히 길렀다. 마침내 이제 난 무얼 잘 하는지, 무얼 기필코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할 때를 맞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 「방물가」를 경유하고 있다. 끈질기게 사랑만을 주장하는 노래. 방물을 앞세운 시시콜콜한 느낌의 제목과 다르게 저 완고한 고집이 멋지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서야 소리에 입문한 희문은 스승의 가르침이 잘 이해되지 않아 남몰래 실용음악 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스승이 그가 어쩐지 전보다 부쩍 나아졌음을 눈치챘고, 희문은 주뼛주뼛 이실직고했다. 그런데 스승의 반응이 재밌다. “어머! 너 아주 잘 했다.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얼마든 다른 데 가서 배워. 얘들아, 너희도 희문이처럼 해라.”
앞서 이희문은 ‘만학도’라는 말을 꺼냈다. 나는 그게 비로소 때를 찾은 공부꾼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한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두뇌도 말랑말랑하고 뒷바라지 해 주는 어른도 있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때다. 소위 초·중·고 시절. 그러나 보다 특수한 의미로는 자기가 공부하기를 원하는 때다. 晩學. 첫 자에 ‘해질 무렵 만(晩)’이라는 단서가 붙는데도 스스로 원하여 ‘배울 학(學)’을 이어 붙인다. 내가 해 보니, 그건 통절형식과 비슷하다. 남들처럼 한 단계 한 단계 순서대로, 전형적인 과정대로 연결한 앎이나 재주는 아니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 만큼 그 출발선에 서기 전에 다른 곳에서 쌓아 온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 견문, 지식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여백을 보충한다. 일견, 방향조차 무시한다. 오감과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하여 터득한다.
통절 — 쉽게 말해 ‘통으로’ 깎아낸다는/잘라낸다는 뜻이다. 뭔가를 그렇게 하려면 사방에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앞뒤 가릴 수 없다,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한 마디인 것처럼. 차곡차곡 부품을 조립하는 정형화된 단위 공정이 아니어도 다른 방식의 배움도 있다고 감히 주장한다. 짧은 마디들을 반복하거나 한 마디에서 다른 마디로 전개하는 노래가 있는 한편, 거대한 한 소절로 이루어진 노래가 없으리란 법 없다.
어느새 마지막 곡 「달거리」가 끝났다. 이 곡은 마지막 부분에 매화타령이 붙어 신명난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부르는 편이라며 네 시간 동안 ‘감금된’ 우리들을 위로했었던 희문은 조금 남아버린 공연시간에 민요 한 곡을 더 들려준다. 「신고산타령」이 나온다. 십여 년 전에 내가 이희문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감았다, 풀었다” 하는 맛이 있다던 설명을 기억해 낸다. 벌써 십 년이라니.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 지도에는 방위가 있지만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에는 상하좌우가 없지 않은가. 그렇듯 늦은 배움은 방법이 다를 뿐이다. 늦음 배움에도 자기만의 것을 생산하고 있는 이희문에게서 배우는 점이다.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시종 정겹고 따뜻한 날이었다. 잔을 들어 서로의 새해를 축원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서울·경기 지방의 전통소리 중 한 장르인 잡가에 대한 개요는 여기서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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