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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텍스트에서 목소리로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1년 12월 28일

말에 부여된 사회적 신체 그리고 그 구조 안에 말의 힘이 있다. 반면 사회적으로 아직 승인되지 않은 말들은 말의 바깥으로 밀려나 그 지위와 효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문제는 승인된 말 안에서만 새로운 말들의 자격이 승인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동어반복의 말들이 생산되고, 근친교배의 말들만 가득하다. 한 사회의 기득권과 협착해 견고하게 결부되어 있는 말들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선언은 아직 승인되지 않은 말이다. 선언은 기존의 승인된 말들과 불화를 겪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랩삐의 《매니페스토 파티: 페미니스트 블루프린트》(https://thelabb.net)는 페미니즘 언어를 넘쳐나는 ‘텍스트’(text)가 아니라 ‘목소리’(voice)로 바꿔 제대로 소리지르려는 시도다. ‘선언문(manifesto)’의 신체성과 불온성은 이 지점에서 다시 복원될 것이다.



수많은 선언이 있었으나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만약 예술의 역사를 선언을 중심으로 읽는다면 어떨까? 예술을 말의 미학적 감옥에서 꺼내 살아 숨쉬는 의지의 말로서 구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선언은 단지 텍스트에 있지 않고, 발화자의 뛰는 숨소리, 용감하면서도 불안한 눈동자, 그 선언을 듣는 다정한 귀들, 때로는 포효하는 가슴 등으로도 구성되어 있다. 언어화하기 힘든 것들이다. 선언의 진짜 가치는 선언의 효과가 아니라 선언 자체가 아닐까. 선언들을 제대로 재현할 방법이 있었다면 선언들은 아마 그 자신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랩삐의 각 멤버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숨쉬는 4개의 선언문을 만들었고 작품으로서 전시하고 웹페이지로 아카이빙 했다.


최혜련은 ‘희성(犧盛) – 어느 일곱 혼신 망제가’를 통해 오래도록 가부장제에 시달렸으나 죄목도 알수도 없는 죄로 인해 희생당하고 이내 잊혀진 7명의 여인들의 다중적인 목소리들을 합쳐 새로운 화자 ‘희성’을 만들어낸다. 희성은 언뜻 사람의 이름이지만 제물로 바치는 짐승을 담아 놓는 그릇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간의 수많은 희생양 여인들의 환유적 명칭이다. 희성은 자신의 독은 물론 나머지 6개의 독도 마저 깨 버린다. 희성은 말들이 아니었던 것들을 먹어 목소리로 토해낸다. 희성은 단지 원한을 가진 배회하는 유령이 아니라 자신의 육성과 움직임을 부여받은 분명한 존재로서 한 명이 아니라 일곱 명, 일곱 명이 아니라 수십, 수백, 수천의 원혼의 집합적 신체를 가지게 된다. 이 구토의 소리가 희성(들)의 선언이다.



“희성이 코로 숨을 들이 마쉬듯 그 말을 쏙쏙 먹어버렸다. 갈 곳을 잃었던 말들이 다시 희성의 몸 안에서 차곡차곡 쌓이다 공명하며 울려 퍼졌다.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만이 계속 들렸다.”

제닌 기는 한 때 사이버네틱한 시공간에 낙관적이었던 1990년대의 포스트-페미니즘 담론 텍스트와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규의 목소리를 교차시키며, 텍스트-이론과 목소리-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끌어냈다. 1990년대의 예측과 2010년 현실 사이의 낙차를 통해 지금 여기의 치열한 현실을 감각화한다. 두 텍스트는 하나의 웹페이지에 동시에 떠오르고 서로 거리를 두면서 함께 사라진다. 현재 우리들의 넷은 혼종(混種)은 커녕 극종(極種)만이 생존하는 생태계가 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거리로 나와 그 혐오스러운 냄새를 현실 안에 풍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선언이 투쟁해야 하는 새로운 대상과 정황에 대해 제닌 기는 다시 상기시켜준다.



안가영은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게임 속 여성 NPC(non-player character)나 네트워크 상에 부유하는 성적 대상화된 이미지에 예외적 코드와 방언들을 주입시켜 그들에 대한 세간의 일방향적인 대상화를 방해하고자 한다. 이미 갈갈이 찢긴 신체 이미지를 재조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자신의 피조물의 운명을 내팽겨 치고 도망쳐 버린 그와는 반대로, 이 새로운 생명의 비틀린 언어를 오류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취하게끔 돕는다. 오류는 통제와 한 패일 뿐이다.‘사이버신체 해방 선언’은 사이버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전략이 아니라 사이버 밖으로 탈출할 때 진정 의미를 갖는다고 작가는 말한다.


강민정의 ‘여신동사강림 선언문’은 여신의 형태와 모습을 규정하는 관습적 표현들에 의문을 갖는다. 작가는 여신을 둘러싼 텍스트들을 서로 충돌시켜 변화하고 반복하는 하나의 동사로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설화나 만화, 문학, 담론 안의 여신과 관련한 텍스트들을 마코프 체인 알고리듬안에 넣어 n+1의 영역에 n을 초과해 새로운 의미를 담은 단어의 쓰임새를 발견하고 기록한다. 그 결과 값은 다음과 같다. “1. 생기없다. 2.불안하다. 3. 함께 찾는다. 4. 돌아온다. 5. 찾지 못한다. 6. 끝낼 수 없다. 7. 놀고 있다. 8. 질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여신도 아니고 사이보그도 아닌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웅앵웅”을 택한다.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 웅앵웅이 되겠다.”  

이제 이들 선언은 단지 승인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승인하는 말로서 서고자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말의 힘을, 말의 권력의지를 발화된 말 자체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말 자체에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말은 하나의 결절점으로 작동한다. 승인되지 않은 말들을 기점으로 새롭게 장이 발명된다. 이 장안에서 변혁을 위한 잠재력은 하나의 가치로서 간주되고, 그 가치가 통용되기 시작한다.


랩삐의 4명의 아티스트의 선언문은 개별적으로도 존재하지만 또한 랩삐가 설정한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선언문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선언문들은 랩삐의 웹사이트를 통해 선언되고 전파된다. 또한 주사위와 단어카드를 이용한 선언문 게임참여를 통해 의도치 않은 오류 속에서 새로운 선언문들을 생산할 장치도 마련했다. 이 게임을 통해 얻었던 문장 중 인상깊었던 것을 소개한다.


“유토피아 혐오 탈취하다 살었느냐 귀신 눈물이여 젠더폐지론 생기없다 드래곤 슬레이브! 끝낼 수 없다.”


선언은 공동성과 함께 하는 발화행위다. 선언을 하는 자들은 그 무수한 선언들이 왜 실패하는 지 깨달아야 한다. 선언은 말의 ‘가치’를 끝없이 ‘운동’시켜 세계변혁의 가능성으로 무한정 근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어떤 ‘결단’의 순간을 담고 있다. 선언은 공상의 놀음이 아닌 하나의 운명이 될 수 있을 때, 주변의 타자들과 함께 우리는 미래를 지금 여기로 끌어들일 수 있다.


우리가 예술의 역사에서 간과하는 것은 예술이론에서 이론이 갖는 본래의 기능을 무시한 것, 즉 발화주체들에 의해 지향된 세계이다. 만약 예술을 하나의 건축물로 은유화할 수 있다면 이는 체계적으로 잘 건축된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불법적인 증축이 이루어지고, 때로는 건물자체가 붕괴되는 무허가 건물로서이다. 저 문장은 딱 보아도 무허가다.


알랑 바디우는 사랑에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선언이 필요로 하다고 말했다. 삶의 재발명에 대한 약속이 육체를 통해 지켜져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해 수행되는 것이 사랑이다. 연인들은 자신들의 몸이 사랑의 선언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를 안고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에 자신들이 사랑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단지 종족유지의 위장술이거나 성적욕망을 위한 욕망의 전략이 아니다. 사랑은 우연으로부터 지속성, 인내, 약속, 충실성을 이끌어낸다.


사랑은 선언일 수밖에 없다. 바디우의 이러한 생각은 사랑에 선언이 필요하고 또 숨겨져 있다는 설명이지만 반대로 선언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읽어도 좋다. 선언은 단지 미래에 대한 허망한 통보가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약속인 것이다.

랩삐의 《매니페스토 파티: 페미니스트 블루프린트》은 페미니즘의 언어에 대한 사랑, 이 선언을 함께 하는 동료들에 대한 사랑, 무엇보다 세계를 이 언어로부터 시작하고 변경할 수 있다는 사랑이 느껴지는 21세기의 선언문이다.


오영진(교과목 <기계비평>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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