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조회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의 강의 계획표를 보고 왔다.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 학창시절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다. 현재 우리 생활의 주요 부분으로 자리 잡은 컴퓨터, 인터넷의 힘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되어버린 ‘세계화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흐름은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다. 코로나19마저도 막을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디지털 매체에서 펼쳐지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세계화의 흐름이 도전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지고, 국가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만 같다. 그러나 이것은 지엽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가기를, 앞으로 더 긴급하게 요구할 것이다.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지금껏 막을 길이 없었다. 갓 쓴 조선의 선비가 자결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모습이 (처연하지만) 우스꽝스럽게 보이듯이, 낙후된 세계관과 논리로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이러쿵저러쿵 반항하는 모습은 우습다 못해 안쓰러워 보인다. 낮은 바다로 흘러가고야 마는 물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못 막는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운 사람이 처음 강이나 바다로 나가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잔잔한 수면을 가진 수영장과는 너무 다른 조건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강물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얼마 못 가서 지쳐버린다. 그나마 강물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기라도 하지만, 바다의 경우는 더 복잡하고 예측이 어렵다. 커다란 파도의 일렁임을 잘 타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파도에 밀려 뒷걸음치기 일쑤다. 그리하여 강과 바다에서 수영할 경우, 헤엄치는 일반적 기술 이외의 것, 즉 ‘물결 타기’를 따로 배워야 한다. 역류(逆流)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물결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세계를 유동하는 액체로 빗댄 바 있는데, 고정된 형태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세계에서는 잠정적일망정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지구가 자그마한 촌락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상, 즉 ‘시공간의 단축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뜻이고, 공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삶의 공간이 비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네트워크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관계망들을 통합시킴으로써, 시공간의 단축 현상이 가능해진다. 그 결과 종래의 공동체와 문화는 해체될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 국가나 민족의 소속감보다는 엔지오(NGO)에 더 큰 소속감을 가질 수 있고, 잔치국수보다는 이태리 스파게티를 더 좋아할 수 있다. 새로운 공동체와 문화의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의 잠정적인 해체가 불가피하다. 심지어 한 개인의 정체성마저도 재구성될 것이다. 전지구적 단일 네트워크 아래에 그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공동체와 문화가 짝짓기를 통해 새롭게 형성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명실상부한 세계 문화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변화는 글로벌과 (그 반대급부인) 로컬, 양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고 주기적으로 교차․반복되겠지만, 글로벌화라는 대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시간이 가속화되고 공간이 축약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 사람들은 몇 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살다가, 그 후 성곽을 두른 도시에서 살았으며, 그런 도시들이 산과 강과 바다를 경계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도시가 점점 커지고 거대 도시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이제는 지구 전체가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이런 전지구적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화 시대에는 다문화를 긍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국제적 감각과 세계 시민적 공동체 윤리를 소유한 사람이 요구된다. 그런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 현 교육의 당면과제다.
마사 C. 누스바움은 배울 게 많은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소위 ‘강한 한방’이 없고, 가끔 어이없는 실책까지 범하기도 한다. 그 철학자에 대한 기대가 높아서인지, 그럴 때마다 매번 아쉬움도 크다. 『인간성 수업』(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8)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세계화 시대에 맞는 교육을 설계하면서 그녀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들을 하고 있다.
“‘서양의 개인주의’라는 진부한 개념을 보아도 비슷한 상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개인주의란 각 사람에게 살 수 있는 삶이 한 번밖에 없으며 한 사람의 죽음은 논리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의 죽음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라고 규정한다면,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은 대부분 개인주의자였으며 개인주의는 인간 조건을 보여주는 분명한 진리이다. … 동서양 양쪽을 지배해온 도덕적, 종교적 전통은 대부분 이타주의와 타인에 대한 의무에 높은 자리를 부여한다.
만일 개인주의가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필요와 요구에 지나치게 종속시키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필요와 요구에 지나치게 종속시키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행복을 촉진하는 것 또한 의무라는 관점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럴 경우 서양과 동양 대부분의 위대한 도덕적 전통은 이번에도 개인주의적인 것이 된다. 각 전통의 어느 부분이냐에 따라 적절한 자기희생 규범이 다르게 통용된다. 용감한 자기희생의 규범이 없는 전통은 없지만, 어떤 전통도 인간 삶의 핵심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앞세우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216쪽).”
이 인용구는 미국 대학교에서 비서양 문화를 가르쳐서 세계시민을 육성해야 한다는 ‘바람직한’ 문맥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동양을 알아야 가르칠 수 있는 것 아닌가? 동양을 모른 채 동서를 아우르는 보편을 말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가 아니라면, 동양과 대비되는 서양을 어떻게 규정할 텐가? 서양문화에서 지겹도록 듣는 말이 self, individuality, autonomy라면, 우리 쪽에서 귀 아프게 듣던 말이 無我, 殺身成仁, 公平無私, 滅私奉公이 아니었나? 누스바움이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녀 역시 서양의 개인주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갇힌 가련한 지식인에 불과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세계화 시대에 걸맞고 기존 동서 철학을 아우를 수 있는 세계철학, 그것에 뿌리내린 세계시민 교육이 우리의 당면과제다. 코로나19를 핑계로 이 과제를 외면하지는 말기로 하자. 코로나 창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기후변화’, 혹은 그 해법으로 제시되는 ‘백신 독점 반대’에 대한 세계적 스케일의 교육이 당장 엄중하게 요구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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