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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채플린과 쇼펜하우어 / 김동규

최종 수정일: 8월 22일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흑백 정장을 차려입고 있다. 구두나 핸드백도 마찬가지다. 남녀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그들은 언제나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스테레오 타입의 나라 걱정(우환의식)을 토로한다. 당사자들은 비장하지만, 정작 멀리서 그걸 바라보는 이들은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이건 비단 정치인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자질구레함에도 항상 무겁다. 공과금은 왜 이리 많은지, 아이들 학원비는 어떻게 마련할지, 이번 승진에서는 왜 밀렸는지 등등.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것 가지고 괜스레 아등바등했음을 깨닫고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주변에서 흔히 경험하는 삶의 사태를 희비극이란 말로 잘 간추린 문장이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오기 대략 100년 전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똑같이 희비극에 빗대면서도 정반대로 말했던 적이 있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전체를 개관해 보면 비극이다’라는 취지의 말이다. 채플린 말의 원근(遠近)을 뒤바꾼 셈인데, 그렇다면 과연 누구 말이 맞을까? 일단 쇼펜하우어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개인의 생활을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개관하고,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끄집어내어 보면, 본질적으로는 한편의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의 활동과 괴로움, 순간순간의 그칠 사이 없는 조롱, 각 주간마다의 소망이나 공포, 각 시간마다의 사고 등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나쁜 장난을 치고 있는 뜻밖의 재난으로 인한 희극적인 장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망은 실현되지 않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기대는 무자비하게 운명에 짓밟히고, 생애는 불행한 오류에 차고, 고뇌는 점점 더 증대하여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언제나 비극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08. 386쪽. 번역 수정)

     

인생을 살다 보면 웃는 날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비극처럼 ‘망(亡)하는 게 인생’이라는 뜻이다. 어떤 때는 채플린의 말이 맞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아 보인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게슈탈트(Gestalt)처럼 어떤 인식의 틀로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다르게 보인다.

앞서 인용한 채플린의 말은 영어 원문에서 확인되듯이, 클로즈업, 롱샷과 같은 영화촬영 기법과 연관되어 있다. 영화를 촬영하다 보면, 비극적 인물의 슬픔을 세밀하게(예컨대 눈물로 촉촉해진 눈망울) 담아내기 위해서는 클로즈업으로 촬영해야 하는 반면에, 희극적 장면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반응 등을 함께 카메라에 담아야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롱샷으로 찍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의 의지(욕망)론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한다. 살다 보면 욕망이 성취되어 즐겁고 신나는 일들도 생긴다. 그래서 작은 규모의 희극이 펼쳐질 수 있지만, 그런 일들은 결국 고통의 ‘미끼’와 같은 역할을 한다. (불교의 영향권 내에 있는) 쇼펜하우어적 욕망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낳는다. 잠시 잠깐의 기쁨을 우회하더라도 종국엔 고통으로 귀결된다. 우회하면 할수록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요컨대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네 삶의 서사는 비극적이라는 말이다.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고단한 인생살이마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코믹하게 보이면서, 다시 채플린의 게슈탈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코믹함의 정체가 바로 삶에 대한 차가운 냉소라는 걸 깨닫는 순간, 다시 쇼펜하우어의 게슈탈트를 가지게 된다. 웃음이 항상 기쁨의 표현이 아니듯이, 울음도 항상 슬픔의 표현은 아니다. 기뻐서 터트리는 울음도 있고, 무언가를 경멸하는 냉소도 있다. 이처럼 희극과 비극, 웃음과 울음은 반대 관계만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코믹 연기에는 언제나 짠한 슬픔이 묻어있기에, 공허한 웃음이 아닌 커다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을까, 채플린인가 쇼펜하우어인가? 아까는 게슈탈트라는 인식틀로 쉽게 설명했지만, 나는 존재론적 해명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즉 인생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두 사람의 말은 존재의 경중을 다르게 배치한 것일 뿐, 결국 같은 뜻이다. 기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참기 힘든 울음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보면서, 두 사람 말의 공통점 하나를 더 밝혀보자.

울음이 터질 때가 종종 있다. 평소에는 거의 울지 않다가도 갑자기 주책없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생존에 내몰려 감정이 메마른 성인들도 어느 날 드라마를 보면서, 아니면 우연히 주워들은 노랫가락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왜 울까? 쇼펜하우어는 웃음과 함께 울음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웃음과 울음에 대해 최초로 깊이 성찰한 철학자다.) 사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강아지와 소의 눈망울에서 눈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눈에서 나오는 액체 분비물이라는 점에서 혹은 특정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인간과 똑같은 생리 현상일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의 작용이 낳은 인간 눈물과 똑같은 결과물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강아지나 소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운다. 현재 자신에게 직접적인 고통이 없더라도 운다.

     

고통을 느끼고서 곧바로 우는 게 아니고, 언제나 반성하며 고통을 반복할 때에만 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1. 502쪽. 번역 수정

     

보통 강렬한 고통을 느끼면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곧바로 울지 않는다. 물론 말 못 하는 아이는 비명 직후에 운다. 그 아이에게 비명과 울음은 모두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어 습득 이후부터는 점차 울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언어’로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울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반성하며 고통을 반복할 때’ 운다. 여기에서 반성한다는 것은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마치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른 뒤에 어떤 고통스러운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듯이, 머릿속 상상의 영상을 반복해 본다는 뜻이다.

울게 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면, 먼저 타인의 고통을 인지한다. 그건 곧바로 내가 유사한 고통을 받았던 시간을 불러온다. 상상으로 재구성된 고통스러웠던 장면이 생생하게 반복된다. 말하자면 타인의 고통을 통해 촉발되어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흔히 듣는 울음에 대체로 이런 자기 연민 음조가 짙게 배어있다. 처음에는 타인이 가여워서 시작된 울음이지만, 곧이어 자기 고통에 대한 자기 연민에 빠져 울게 된다. 거의 신세 한탄에 가깝다. 이처럼 자기 연민으로 끝나는 울음은 건강하지 못한 울음이다. 반복되는 자기 연민 속에서 겨우 아문 상처를 덧내는 울음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고통에 갇힌 울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이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고통에서 시작된 울음이 자기 연민을 거쳐, 마지막으로 ‘고통받는 운명이 인간 전체의 숙명임’을 통찰하는 울음이 될 때, 차츰 우리의 눈물은 순수해진다. 울음이 해맑아진다. 그것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동고(Mitleid),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나온 울음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그런 사랑은 “유한성의 손아귀에 들어간 인류 전체의 운명에 대한 연민”이다. 이렇게 울 수 있는 자라야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멜랑콜리 미학>(문학동네, 2010)이란 책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이다. 사랑이 없으면 눈물도 없다. 눈물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인간은 사랑할 때, 그래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옛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는 구절,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눈물의 원천이고 인간성의 원천이라고. 많은 사랑 이야기들의 골격을 살펴보면, 눈맞춤을 통해 시작된 사랑이 눈물로 막을 내린다. 그 시작과 끝 ‘사이’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 탄생한다.

     

이와 같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랑’이야말로 채플린과 쇼펜하우어가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가치이다.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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