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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젖가슴과 트랜스휴먼 / 김동규

내게는 두 아이가 있다. 그래서 가위로 두 번 탯줄을 잘라본 경험이 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엄마에 비해 아빠는 자식을 향한 애착 형성이 어렵기에 이런 세리모니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이는 분명 엄마 뱃속에서 한 몸으로 존재했고, 탯줄로 연결된 채 세상에 나온다. 아빠의 첫 역할은 엄마와 아이 사이의 끈을 끊어주는 일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엄마와 아이의 틈새를 벌리는 일이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에서 아빠에게 부여된 임무다. 철저히 무력하게 태어난 인간 아이는 한동안 탯줄을 대체할 만한 생명선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아이의 입술과 엄마의 젖가슴을 이어주는 선은 제2의 탯줄이다. 분리되었지만 언제든지 접속될 수 있는 젖가슴, 이것이야말로 아이의 실질적인 생명의 원천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을 상징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본능과 충동, 욕구와 욕망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본능과 욕구는 생물학적 개념으로서 뭇 ‘동물’도 함께 공유하는 것인 반면에, 충동과 욕망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으로서 ‘인간’만 가지는 인간다운 특징이다. 한편에서 나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그런 구분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구분이 차별을 낳고 위계를 설정하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편이다. 양자를 구분 은 짓더라도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문제에 관한 내 입장이다.


사람은 동물인 동시에 인간이다. 이 ‘동시성’이란 낱말은 ‘구분’은 전제하지만 ‘분리’는 배척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그어진 점선은 입체적인 존재이해를 위한 접선이지, 결코 절취선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도 말할 수 있다. 한편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각자의 독립된 방법론과 자율적인 담론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둘은 과거 한 몸(Philosophy)에서 분화된 것이고, 현재와 미래에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 학계에서 ‘융합’이라는 키워드가 화두가 된 것은 수십 년이 넘었고, 앞으로도 전문화의 벽을 허무는 융합은 학계의 영원한 과제가 될 것이다.


얼마 전 밥상머리에서 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아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오늘 딸에게 축하할 일이 생겼어!” 나는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딸은 말없이 수줍게 미소만 지었다. 최근 들어 부쩍 성장해 부풀어 오른 딸의 젖가슴을 떠올리며, 딸의 첫 달거리를 짐작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딸, 몸은 어른이 되었구나, 축하한다”라고 말하며 그날 저녁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내 손으로 끊은 탯줄의 아이가 어엿한 여성으로 성장한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사람의 마음은 주어진 인위적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몸의 변화에 조응한다. 2차 성징을 보이는 청소년들은 남녀의 몸에 따라 마음의 성징도 완연히 나타난다. 예컨대 밋밋한 남자 가슴에 비해 굴곡이 있는 여자의 가슴이 엄마의 마음을 준비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동물이라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수억 년의 시간 동안 유성생식을 창안함으로써 생을 이어온 생명체들의 몸짓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야만적이고 천박해 보이는 성행위와 본능적인 몸짓 하나하나에도 37억 년 지구 생명의 몸부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만년 남짓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 낸 성문화/성정체성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유구한 자연이 만든 성적 차이도 존재하며, 그것이 문명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어머니”라 불리는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최초의 사랑의 대상인 엄마를 좋은(그리고 나쁜) 젖가슴으로 표현한다. 벌거숭이 아이가 처음 만나는 대상은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엄마의 젖가슴이다. 아니 처음 아이는 젖가슴을 자신과 분리된 대상으로 여기지도 못한다. 생후 얼마간은 제2의 탯줄이라 할 수 있는 젖가슴과 자신을 구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젖가슴이 제 역할을 못 하거나 부재(不在)할 때 좋은 젖가슴은 나쁜 젖가슴이 된다. 이렇듯 인간 아이는 무력하게 태어나 한동안 엄마의 젖가슴에 절대 의존하는 상태에 놓인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종교가 ‘절대 의존의 감정’에 바탕을 둔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클라인에게 10년 간 수퍼비전을 받았던) 도널드 우즈 위니컷이 생후 6개월 동안 절대 의존기를 아이가 겪는다고 파악한 것에서 심리학적 근거를 추적해볼 수도 있겠다.


젖가슴이 엄마를 상징한다는 것은 서양 최고(最高/最古)의 고전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트로이 최고의 전사인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일대일로 맞짱을 뜨기 위해 성안으로 퇴각하지 않고 홀로 성문 앞에 남는다. 성 위에서 지켜보던 헤카베(헥토르의 엄마)는 안타까움과 공포에 진저리 치며 이렇게 외친다. 아니, 외치기 전에 “옷깃을 풀어 헤쳐 다른 손으로 젖가슴을 드러내” 보인다.

“헥토르야, 내 아들아! 이 젖가슴을 두려워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라. 내 일찍이 네게 근심을 잊게 하는 젖을 물린 적이 있다면. 내 아들아! 그 일을 생각하고 성벽 안에 들어와 적군의 전사를 물리치고 선두에서 그와 맞서지 마라. 무정한 녀석!”1)

이와 유사한 장면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작품에도 등장한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인 아가멤논 왕을 죽여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국외로 쫓아낸 엄마인,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녀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외국에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해 독기를 품고 복수에 나선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딱 한 번 심하게 마음이 흔들린다. 칼을 휘두르려는 결정적인 순간, 엄마의 다음과 같은 언행 직후에 그는 잠시 망설였다.

“멈춰라, 내 아들아. 얘야, 너는 이 젖가슴이 두렵지도 않느냐? 잠결에도 이 어미의 젖가슴에 매달려 그 부드러운 잇몸으로 달콤한 젖을 빨곤 했는데.”2)

헤카베의 젖가슴은 아들을 살리고자,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젖가슴은 자신이 살고자 원초적인 모자(母子) 관계를 떠올리는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두 인용문에서 젖가슴이란 여성인 엄마, 첫사랑이자 원초적인 사랑, 인간 존재의 근원인 자연을 상징한다. 왜 그럴까? 인간 신체의 자연적 조건상, 생물학적 여성만이 아기를 키워낼 수 있는 자궁과 젖가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명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아이에게 모유 대신 우유(牛乳)를 물렸다. 미래에는 인공 자궁을 만들어 여성의 자유를 더욱 신장시킬 거라 예견한다. 불멸을 위해 몸의 각 부위를 교체 가능한 기계로 대체하고 뇌 속의 정보는 컴퓨터 속에 이전시킬 거라고도 말한다. 소위 트랜스 휴먼의 출현이다. 힘의 논리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슈퍼맨 같은 트랜스휴먼이 생물학적인 휴먼을 이 땅에서 몰아낼 것이다. 신 같은 초인이 승리할 것이다. 외부 자연 정복의 여세를 몰아서, 인간 내부 자연(몸, 동물성)의 자취를 지우고 그와 연결된 끈을 싹둑 잘라낼 것이다.


다 좋다. 어리석음의 자멸(自滅)을 누가 막겠는가? 그런데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휴먼인 필자는 ‘엄마가 없는’(나쁜 젖가슴) 세상을 원치 않는다. 자진해 승자의 대열에서 빠질 생각이다. 트랜스휴먼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은 그처럼 쉽게 펼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나름 가지고 있다. 클라인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욕망은 (남근 선망에 앞서) 젖가슴에 대한 선망에서 유래한 것이다. 트랜스휴먼조차 욕망을 가진 존재라면, 자기의 근원 혹은 자기가 처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대상에 대한 욕망을 끝끝내 떨쳐버릴 수 없다.


인공자궁 속 트랜스휴먼-아기,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AI와 로봇이 대세인 요즘, 앞선 두 인용문의 실연(實演)처럼 구원에는 실패하더라도, 젖가슴을 풀어 헤치는 절박한 이벤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자연인 휴먼을, 그리고 사랑을 살리고자... 탯줄을 끊고 독립하려는 자 역시 사랑의 자식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망각이야말로 비인간적인 야만과 오만(hybris)의 극치라는 걸, 탯줄과 젖가슴에 절대 의존하는 아기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고 있다.


1)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9. 「22권 헥토르의 죽음」, 624쪽.

2)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7.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139쪽.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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