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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그리고 가족 공동체의 근거 / 마준석

이제 30대를 목전에 둔 나이가 되니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결혼이 대화의 화두가 되고 종종 청첩장이 날아들며 어떤 달에는 매주 뷔페를 먹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처형과 형님(두 분에게 늘 안녕과 행복이 있기를!)의 결혼식에서 축의대를 지켰는데, 아마 살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본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축의대에 앉아 이제는 나의 가족이기도 한 처가 식구들께 연신 인사를 드리며, 무언가 조금 더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이하고도 흡족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아직 나는 시답잖은 소리로 서로의 자존심을 긁어대기 위해 동기들과 신촌 거리를 쏘다니던 어린 마준석으로부터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아이를 낳고 나서야 정말로 돌이킬 길 없이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와 주변 지인들이 그러하듯이, 결혼이 이렇게 가까이 있음에도 자녀를 가지겠다는 결심이 곧바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자녀 계획은 있느냐는 물음에 모두들 “자녀? 낳고 싶지...!”라 답하며 문장을 끝맺지 못하는 것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작년 (잠정)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역대 최저기록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최저기록이기도 하다. OECD 국가 중 합계출산율이 1.00명에 못 미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며 큰 이변이 없다면 올해에는 0.6명대로 진입할 예정이다. 어찌하여 우리는 더이상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인가? 

출처 : 통계청 2023년 인구동향조사 출생·사망통계(잠정)

 

몇몇 연구자들은 심각한 수도권 쏠림 현상 때문이라고 답한다. 수도권의 인구 과밀화로 집값이 과도하게 상승하고 취업난이 심화되어 청년들이 생존경쟁에 돌입하는데, 반면에 지방에서는 낙후된 인프라와 일자리로 청년들이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일과 가정이 양립 불가능한 기업문화나 임금 격차를 원인으로 꼽고, 또 다른 연구자들은 독박 육아를 강제하는 가부장적 가족 문화에서 원인을 찾는다. 나아가 혹자는 지나친 교육열 때문이라고, 혹자는 맘충과 노키즈존으로 대표되는 아이 혐오 때문이라고, 심지어 페미니즘과 여성 지배 사회 때문이라고, 또는 전교조의 좌파교육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우리가 여기서 이 많은 이유들 중에 정답을 찾으려고 표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정답이기도 하면서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예컨대 수도권 쏠림 현상이 저출생의 원인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게도 수도 이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도를 이전한다는 해결 방안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거대한 문제라는 점을 곧바로 알 수 있는데, 수도 이전에는 천문학적인 사회, 정치, 경제적인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최초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 방안 역시 문제라면, 이는 최초의 문제가 사실 더 깊게 착종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저출생의 문제는 수도권 집중 문제로 야기된 것이지만, 수도권 집중 문제는 다시금 다른 원인, 예컨대 중앙집권적 행정 제도, 서울의 지리적 조건, 서울에 결부된 국민들의 계급 상승 욕망 등등에 의해 야기된 것이며, 이러한 원인들의 연쇄는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저출생 문제에 대한 분석이 지난하기 때문에, 결국 문제가 무엇이건 간에 상관 없이 해결 방안은 점차 정형화 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때로 정책적 상상력은 너무 빈약하거나(출산 장려 캠페인으로 진행된 서울시 케겔 운동 댄스체조 한마당) 때로는 너무 과도한 경우도 있지만(이성 교제를 증진하기 위해 여아를 1년 조기 입학시키자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대체로 ‘현금성 지원’으로 해결 방안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만남이용권, 부모급여, 아동수당, 육아휴직수당 등 현재 정책적으로 시행되는 금전적 지원을 합하면 수천 만 원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이 절실한 부모들이 있고 경제적 제약이 자녀를 포기하게끔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금전적 지원은 유지되고 또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문제 자체가 해결로 둔갑하는 변증법적 전환을 목격할 수 있다. 저출생은 근본적으로 개인을 착취하고 양극화를 초래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이 자본주의라는 문제 자체가 ‘현금성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해결 방안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의 논리에 입각한 해결이 해소하고자 하는 문제는, 실상 바로 그 돈의 논리가 만들어 낸 문제인 것이다. 이 경우 해결 방안은 오히려 문제의 소급적인 산출이며 문제의 반복이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돈이 없어서 자녀를 포기하고 돈이 있어서 자녀를 낳는 이상, 정책적으로 얼마나 많은 금액을 지원하든 간에 저출생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와 해결 방안의 난제 속에서 질려버린 사람들은 ‘요즘 젊은 것들’ 이론으로 손쉽게 도망칠 수 있다. 이는 몇 달 전 총선을 앞두고 보수 논객 김진이 제출한 “젊은이들이 나라를 망친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데, 예컨대 젊은 것들은 애지중지 커서 고생할 줄 모르고 희생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애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 것들은 노인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가족 공동체와 대한민국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러한 김진의 ‘요즘 젊은 것들’ 이론은 탁월한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근본적인 작동방식은 기존 질서를 어떤 꿈의 실현으로, 그런데 우리의 꿈이 아니라 타자의, 이전 세대의, 죽은 조상들의 꿈의 실현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현재의 질서가 존속되어야 하는지 묻는 물음에 그 질서의 고유한 가치로 대답하지 않고서 “우리 선조들이 이것을 목숨 바쳐 지켰기 때문”이라 답한다면, 이 경우 그 질서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자기도착적이다. 여기서 현재의 질서는 어떤 유효한 가치가 있기에 선조들의 꿈이 된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꿈이기에 역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결국 애를 낳지 않는 요즘 것들은 아주 이기적인 놈들인데, 그들은 화목한 가족과 강성한 대한민국이라는 물려받은 꿈을, 즉 윗세대들의 믿음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요즘 젊은 것들’ 이론은 골반기저근이 약해서 애를 안 낳는다는 서울시의 분석(서울시 케겔 운동 한마당)보다는 진실에 가까이 있다. 정말로 젊은이들은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는 과거와 달리 자녀 양육이 나 자신의 자아실현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상호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각 관계항들은 타자에 의거해서 자신의 정체성 내지는 동일성을 확보하고 그렇게 항들은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지만, 반면에 적대적 관계에서 각 항들은 타자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이 훼손되며, 타자와 나의 동일성이 동시에 양립할 수 없다는 실존적 모순 상황에 처한다. 가족의 경우, 나의 자녀는 나의 꿈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러나 ‘요즘 젊은 것들’ 이론이 여전히 간과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녀를 희생시킬 각오도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요즘 젊은 것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녀 양육이 야기할 내 꿈의 훼손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비루한 존재가 야기할 자녀의 완전성에 대한 훼손이다. 젊은 것들이 보기에 부모가 능력도 없으면서 자녀를 가지는 것은 자녀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 공동체 내에서 적대는 부모와 자녀 간에 양방향적이다. 자녀는 내 꿈을 좀먹을 것이지만 동시에 완벽하지 못한 부모도 자녀의 꿈을 파괴하고 말 것이며, 완벽한 부모가 되지 못한다면 나에게 자녀를 가질 권리는 없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더이상 과거처럼 나 자신의 자아실현이 아니다. 토끼 같은 자식들이 뛰노는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가족주의적 신화는 옛 선조들의 꿈일 뿐 우리 자신의 꿈이 아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가족은 부모의 꿈이 자녀의 꿈을 잘라먹는 적대적 관계 속에, 양자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다는 모순 속에 있다. 헤겔이라면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몰락(zu Grunde gehen)하고 말았다고 짚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몰락 덕분에, 이러한 불가능성 덕분에 다시금 가능성을 확보한다고 말해야 한다. 자녀의 이유는, 가족의 이유는 옛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체 모를 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 의해 새로이 창안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기록적인 저출생이 아니라, 이 저출생이라는 사회적 증상을 숙고하지 않고서 손쉬운 해답으로 도망치려는 태도다. 출생률 증대를 위한 현금성 지원 정책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우리는 가족 공동체의 몰락 속에서, 무엇이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가족의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어야 한다. 몰락(zu Grunde gehen)이 무(無)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몰락 자체가 어떤 새로운 것을 위한 기반이자 근거(Grund)가 된다는 사실은 헤겔의 중요한 변증법적 통찰이다. 불가능성은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기반이 되고,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배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보다 잘 실패하는 것이지 실패 자체를 모면하는 일이 아니다. 사회가 실패를 근거로 발전해 나가듯, 나는 가족 또한 실패와 오류에 근거한 공동체로 다시 창안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이 분명 우리를 이어주겠지만, 반대로 결여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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