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포’에서 출발한 이유
AI가 질주를 시작한 2022년, 나와 LMWS 동료들은 GPT-3 기반 창작과 공포 감정을 결합한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그리고 ‘왜 하필 공포인가?’는 그즈음 반복해 받았던 질문으로 기억된다. 기술 비평의 태도는 더 이성적이고, 덜 자극적인 프레임이 옳다는 뜻이 담긴 물음일 것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낯선 기술이 인간계를 타격하는 반복적 사건들 속에서, 때마다 인간은 공포 감정의 소용돌이를 영리하게 활용해 적응 훈련을 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감정은 한 인간과 다른 대상의 관계 예측을 가능하게 하고, 이전 경험과 현재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생경함을 한껏 자극하기도 한다. 혼란의 시기에는 둔감함이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런 의미로 AI 생태계의 격변을 그저 관망하는 것이 더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 특히 공포에 초점을 맞췄다. 공포는 짧은 시간에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공포를 느낄 때, 인간은 비로소 허세를 버리고 정신을 차리지 않던가. AI는 인간에게 서둘러 미래를 상상하고, 어서 입장을 표하라 다그치고 있다. 폭주하는 기술 주변에 포착되는 희망과 불안의 징후 사이로 가장 먼저 찾아오는 스산한 공포. 그것은 불확실성과 예측 가능성 사이에 깃든 인간의 보편 감정으로서 중요하다. 상황적, 실체적 공포를 인정하는 것은 기술에 대한 무지와 경계를 줄이는 합리적 대비책 중 하나일 것이다. 공포는 무기력한 굴복이 아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맹렬하고 민첩한 준비, 가장 날카로운 각성 상태다.
안개 속 몬스터와 함께하는 놀이 혹은 훈련
공포물은 두려움에 대한 훈련을 제공하는 발명품이다. 근대 이후 공포물은 인간의 기술과 욕망이 창조한 것에 대한 경각심과 안전감을 자극하는 기발한 활로를 모색해 왔는데, 우리도 AI 시대를 준비하는 전략으로 이 장르를 활용해 볼 일이다. <AI 공포 라디오쇼>는 퍼포머와 관객이 함께하는 GPT-3 라이브 프롬프팅으로 진행되었다. <검은 고양이>, <프랑켄슈타인>등 익숙한 공포물을 AI 관련 주제와 연결된 새로운 이야기로 즉흥 생성한 것이다. 매혹적인 무서운 이야기들은 AI의 구경꾼들을 사건 당사자로 전환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AI와 공포물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전 작업 대부분은 생성 결과물을 전달하는 방식에 머물렀다. 새로운 쇼는 청중에게 프롬프트와 텍스트 생성 전체를 드러내는 기획을 채택한 차이가 크다. AI 생성 예술의 가치는 완료된 결과가 아니라, 지금, 내가 직접 개입하는 구성 경험에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2022년 8월, <AI 공포라디오 쇼> ‘프랑켄슈타인 다시쓰기’ 섹션 라이브 프롬프트, 권보연 설계, https://bit.ly/prompt_AI_1
‘프랑켄슈타인 다시쓰기’는 첫 작업부터 원작에 없는 상황과 사건, 캐릭터 생성을 위한 공개 프롬프트를 활용했다. AI를 작동시킬 제안은 퍼포머와 관객의 플레이그라운드로 흩어진다. 명령이 실행될 때마다 각자의 창에는 서로 다른 무서운 이야기가 속속 태어난다. 관객은 무대 위 작업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며, 동시에 자기 창작을 진행할 수 있다. 공연 중 리드 퍼포머와 AI가 만든 첫 대화에서 몬스터는 도망치는 인간에게 사랑과 인정, 이해를 호소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인간은 이 실험을 실패라 주장하는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이 서사에 실망한 관객은 준비 없이 AI를 마주한 현실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어진 세션에서 우리는 AI와 뒤엉킨 더 복잡한 상황들을 다뤄 보았다. 그것은 AI와 더불어 이야기를 만들고 놀이하는 경험으로만 가능한 ‘안개 속 몬스터를 내 손으로 만져보는’ 공포 적응 훈련이었다.
AI 스토리텔링, 과정의 언어로 말하라
AI는 사람처럼 쓰는 정도를 지나, 사람보다 더 잘 쓰는 기계로 진화했다. 기대만큼 두려움이 큰 시절이니, 상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최근 나는 ‘내가 사라진 곳에서, 나를 자처하는 AI’의 출현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가을 무렵, 나는 ‘AI와 시 조각하기’ 작업을 진행하며 김언 시인과 협업하게 되었고, 시인이 참여하는 프롬프팅을 위해 십 년 전 작성된 그의 일기를 생성 자원으로 활용해 보았다. (2022년 11월, 문학 주간, <둘 사이> ‘AI와 함께 시 조각하기’, 권보연, 김언 협업, 라이브 프롬프트 전문, 설계 권보연, https://bit.ly/3R3XNmb)
시인의 일기는 존재하지 않던 창작법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개인적이며 솔직한 기록의 가치가 있었다.
나는 시인의 시론에 기대어 영혼 없이 기계적 쓰기를 반복하는 AI를 좀비, 시적 순간에 대한 언어 표현력을 상실했거나 억압된 사람들을 시선만 남은 유령으로 인식해 프롬프트를 설계했다. 인간 유령과 좀비 AI 설정은 문학 기계의 창작 에너지를 실험하는데 마땅했다. GPT-3에 시인의 2012년 일기를 제공하고, 같은 이가 인간과 AI 협업에 대해 고민하는 바를 2022년 일기로 생성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유령이 된 시인은 무대 위에서 자신을 대체하는 좀비 AI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관객과 나도 현장에서 함께 기묘한 상황을 목격했다. 어느 순간 좀비는 퍼포머가 개입할 틈도 주지 않고 질주했다. AI 좀비는 나와 같아도, 달라도, 나보다 잘해도, 못해도 모두 문제가 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AI 좀비의 일기는 제 주인에게 시인은 자연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번역할 책임이 있다며, 역할에 충실한 것인지 약속을 요구했다. 좀비 AI와 유령 인간이 만나 꽤 괜찮은 주인의 말과 글을 짓는 미래를 확인했으니, 실험은 성공일까. 하지만 좀비에 감염된 인간 유령이 곳곳에 출몰할 상상을 하니, 다시 두려워졌다.
이탈로 칼비노는 문학 기계가 가져올 영향은 언어 층위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며, 사회의 숨겨진 유령들이 그것을 둘러쌀 때 큰 충격이 발생할 거라 예견했다.(Calvino, I. READERS, WRITERS AND LITERARY MACHINES, 1967) 그가 1960년대 그린 그림 위에 AI가 부상하는 오늘이 덧씌워지는 듯하다. 충격을 견뎌낼 안전장치 하나는 AI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미 결과의 문학 너머에 있는 과정의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믿음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현재의 AI는 결과의 언어를 만드는 맹목적 좀비다. 다행히 인간이 담당하는 과정 언어로 좀비를 조정해 볼 수 있다. 종래 예술이 선호해온 최종 작품만으로 소통하는 결과 중심 문학은 AI 스토리월드에 적합하지 않다. 결과의 언어를 AI 창작에 고집하는 것은, 매번 말을 바꾸는 좀비의 순간을 영원으로 해석하려는 무리한 시도기 때문이다.
반면, AI의 생성 구조를 파악할수록 미개척지는 문학 기계를 작동시키는 과정 언어의 영토로 판단된다. 과정 언어는 인간 의지와 역량에 기초하며, 창작가의 개성과 재능으로 발명할 새로움이 무한하다. 무엇보다 이 언어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좀비의 말과 달리, 돌에 새긴 글자처럼 항상성을 갖는다. AI가 삶과 예술에 남겨진 어둠을 밝힌다면, 과정의 언어가 잠들어 있는 곳이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하지만 AI 창작을 둘러싼 관심은 결과물 너머 언어로 도약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이 언어를 사용하는 숨은 유령이 AI 곁에 충분히 모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정의 언어를 다루는 AI 스토리텔링을 계속 실험하며 퍼포머와 관객 접촉을 늘리고, 낯선 언어 감각과 지식을 갱신해야 한다. 마침내 과정의 언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유령이 AI라는 문학 기계를 촘촘히 둘러싸는 날, 결과의 언어로만 세상을 만나던 오래된 유령의 존재는 아주 흐릿해질 것이다.
*웹진 한국연구 2023년 1분기 기획논단은 인공지능을 주제로, LMWS(최승준, 권보연, 후니다킴, 김승범, 오영진)팀의 5개 원고가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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