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에서 나오는 월간 잡지 <現代思想> 6월호 특집은 ‘지금 왜 포스트모던인가’다. 그러게...., 왜 지금 포스트모던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육후이의 글 「우리 후의 료타르」를 읽어보니 대략 이해가 갔다. 육후이는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 알고리즘 시대 인문학의 새로운 시작 : 코스모테크닉스 시론>(새물결, 2019)에서부터 <디지털 객체의 실존 양식에 관하여>, <재귀성과 우발성>까지 이어지는 자칭 3부작을 출간했고, 바로 지난 달에는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로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2부와 3부에서는 산수화(山水畵)로 도배를 해놓은(아직 실물은 못보고 사진만 몇 컷 봤지만) <예술과 우주기예>도 냈다. 최근에는 잡지 [Philsophy today]의 봄 특집호 「자동화 이후의 철학」의 객원 편집자도 맡아서 장-뤽 낭시, 베르나르 스티글러,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아즈마 히로키 등과 함께 자신의 글도 두 편 실었다. 한마디로 현재 세계 사상계에서 맹활약 중인 철학자 중 한 명이다.
2.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육후이는, 재작년 11월 항저우시 중국미술학원에서 <<포스트모던의 조건> 4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그 전인 2015년에는 뤼네부르그 로이파나 대학에서 <‘비물질적인 것들’ 30주년> 기념 심포지움의 기획, 운영에 참여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서광사, 1992)이라고 하면 박정희가 죽은 1979년에, 장 프랑수아 료타르가 출간한 저서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말부터 한동안 열풍이 불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텍스트다.2) 한편 ‘비물질적인 것들’은 1985년에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대형 전시를 말하는데, 이 전시회에 료타르는 공동 기획자로 (전시회 개최 막판에 합류했지만, 꽤나 비중있게) 참가한 바 있다. 그러니까 육후이는 30, 40년도 더 전의 료타르 작업에 대해 집중적인 재맥락화, 재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육후이는 료타르가 한때의 유행이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창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보기에 료타르는 신자유주의 사상가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자도 아니었다. 료타르가 주목한 것은 1970년대 말에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였고(이 변화에 대한 이름이 포스트모던이다), 그에 따라 앎의 생산조건이 전반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지점이다. 그러한 상황 변화에 대한 응전으로서 료타르는 “불일치로 이해된 차이”(앞의 책 p.131), “(패러독스가 아니라 차이로 이해된) 파랄로지(paralogy)” 모델을 제시하였다.
4. 앎의 생산 조건이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제시한 에피스테메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양의 에피스테메는 르네상스기의 ‘닮음’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기계론)을 거쳐 근대의 유한성(유기체론, 생명론)으로 바뀌었다. 육후이에 따르면 이 유기체론은 일종의 시스템론이다. 이것이 사이버네틱스의 도래와 더불어,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시스템론에서 수행성(performativity)을 핵으로 하는 과학기술적 시스템론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헤겔에서 니클라스 루만까지 이어지는 이 흐름은, 어떤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헤겔로 끝나고 사이버네틱스는 그 종언의 실현’이라는 하이데거의 발언을 확증하는 것이다. 루만의 시스템 이론을 통해, 료타르는 수행성의 중심적 역할을 확증하”였다.
5. 료타르의 핵심 비판 대상은 하버마스와 루만이었다. 그가 ‘불일치로 이해된 차이’를 제시한 것도 ‘커뮤니케이션적 합리성’을 주장한 하버마스와, 시스템론을 제시한 루만을 겨냥하였던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말하자면 헤겔의 절대 이성에 대항하여 칸트의 숭고를 제시한 것이다. 육후이는 료타르가 “지성과 상상력으로 구성된 인식 시스템에 대항해, 그런 시스템이 장기적인 발견적 프로세스 후에도 명확한 개념에 도달할 수 없는 모멘트”로서 숭고를 제시한 것이다. ‘숭고한 것’이란 또한 “이성이 상상력에 폭력을 부과하기 위해, 즉 시스템을 폭력적으로 정지한 상태에 두기 위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모멘트이기도 한 것이다.”
6. 이 대목에 좀 낯설어 할 독자들도 있을 텐데, 육후이는 「전시하기와 감수성 일으키기 : 《비물질》전의 재맥락화」2)라는 글에서 프랑스어 ‘sensibilité’를 통상적인 번역어인 감성(sensitivity) 대신 감수성(sensibility)이아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특히, 칸트의 ‘감각적 현존’이라는 의미와 달리 “료타르의 감수성 개념이 우선 일종의 ‘저항’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저항의 제스쳐는 ‘반미학(anti-aesthetics)’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예술(작품)이라고 하면 상상력을 떠올리고, 상상력의 극한이 곧 예술의 극한이라고 하는 지배적인 통념에 갑갑했던 독자라면 귀가 쫑긋할 만한 주제다. 최근 사변적 미학을 주장하는 학자들(대부분 가속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의 글을 몇 편 흥미롭게 읽어봤는데, 역시나 상통하는 문제의식이다.3) 이 문제에 관심있는 독자는 「전시하기와...」를 「우리 후의 료타르」와 함께 읽어보시기 바란다. “반미학은 미학을 부정하며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의 조화, 즉 감각적 직관과 상상력, 이해의 일치에 반하는 것을 의미한다.”(「진시하기와 ...」 중, p.2).
7. 「우리 후의 료타르」를 리뷰삼아 정리하다가 얘기가 옆길로 좀 샜다. 그건 그렇고, 갠적으로 이 글에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대목은 육후이가 시스템론을 열역학 이데올로기로서 비판하는 곳이었다. 나는 열역학에 대해 꽤 오래 전부터 자못 특이한 느낌을 받곤 했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이케 말했다. “열역학은 그 틀 안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물리 이론이다.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다.”(<열역학>(김영사, 2021) 서양 과학자들 중 이런 말을 한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다. 에딩턴은 비슷한 취지로 ‘세상 모든 지식이 다 폐기되어도 열역학만은 최후까지 폐기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이 대목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기억이가 안 난다, 분하다!). 이런 말을 여러 번 듣다 보니, 왜 현대의 과학자들이 열역학을 마치 인간의 숙명이나 신앙처럼 느끼는 걸까 의아했다. 마치 뉴턴 역학은 신의 질서고 열역학은 그 질서에 대한 인간의 운명적 인식 같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my favorite 프리고진님의 이런 얘기가 반가웠다. 프리고진은 과학이 19세기에 들어 처음으로 역사를 사유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다음, 거기에 상반되는 두 방향이 있었다고 한다.
“인류는 오래도록 자연에서 끝없는 반복이나 쇠락만을 보았다. 물리적 자연은 완벽하게 가역적인 세상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19세기의 자연과학이 자연에서 역사를 본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시간이 흐르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며 마지막 단계에는 열적 평형, 즉 열적 죽음(熱死)에 도달한다고 선언했다. 다윈이 자연에서 본 것 또한 역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열적 죽음이나 평형과는 다른 것이었다. ... 다윈의 이론은 종들의 자발적 요동에 관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는 선택이 비가역적 생물학적 진화로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볼츠만과 마찬가지로 무질서함이 비가역성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볼츠만의 해석은 초기 조건들의 망각, 초기 구조들의 ‘파괴’를 의미하는 반면, 다윈적인 진화는 자생적 조직화(항상 증가하는 복잡성)와 연관되는 것이다.”(<혼돈으로부터의 질서>(고려원. 1993))
잠깐, 미리 한 가지 양해를 구해야겠다. 원래는 열역학 얘기에 이어서 시스템 이론 얘길 하려했는데, 글이 길어져서 오늘은 열역학 얘기까지만 해야겠다.
8. 오늘날에는 ‘열역학’이란 말이 친숙하지만, 20세기 이전에는 ‘열학’이었다. 빛에 관한 과학이 광학이고, 힘에 관한 과학이 역학인 것처럼 열에 관한 과학은 열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뉴턴 역학(고전역학)의 지배력이 점점 더 강화되면서 열 현상도 역학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초간단 버전으로 말하자면 뜨겁거나 차갑거나 한 열 현상을 물질 분자들의 운동이 얼마나 빠르냐로 해석하고 기술하게 된 것이다. 이걸 이상 기체의 분자 운동론이라 하는데, 그 결과가 열학의 역학 버전인 열역학(thermodynamics)이다. 참고로 <새로운 우주 - 다시 쓰는 물리학>(까치, 2005)에 보면 기체운동론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신박한 주장이 나온다. 증명해야 할 것을 부당 전제하는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져있다는 게 대체적인 이야기였는데, 이 책에는 이외에도 과학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신기해야 할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저자 로버트 러플린은 1998년에 ‘분수양자홀효과’ 라는 이론을 세워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고 2004년에는 KAIST 총장으로 취임하기도 한 과학자인데, 러플린의 여러 문제 제기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은 어케 생각하는지 심히 궁금했다. 그렇지만 이 문제도 딱히 진전은 없고, 또 그냥 지나간다. 책의 원제는 내용 못지 않게 도발적으로, <A Different Universe : Reinventing Physics from Bottom Down>이다.
9. 나는 열역학 책을 읽던 초기에 가벼운 물음이 일었다. 열은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고 책에 써 있고, 그 예로 커피의 뜨거운 열기가 상온의 방 안으로 퍼져가는 걸 들었다(이걸 열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고 해서 ‘열복사’라 한다). 하도 많은 책들이 그케 말하길래 자주 읽다보니 이런 의문이 생겼다. 그럼 아이스커피의 차가운 냉기가 상온의 방 안으로 퍼져가는 건 뭔가? 그렇다면 냉은 뜨거운 곳으로 흐른다고 해도 되나? 뭐 대단치 않은 의문이었는데, 그 뒤로 딱히 진전된 건 없었다.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의 <맥스웰의 도깨비가 알려주는 열과 시간의 비밀> 같은 책을 읽어가면서 이것저것 좀 더 알게 되긴 했지만, 뭔가 결정적인 게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 2003)을 읽다 깜닥 놀랐다. 세상에나, 열복사가 아니라 ‘냉복사’ 실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궁금하신 분은 직관하시길.
10. 사실 문제는 뉴턴 역학이 시간을 배제하고 성립된 순간부터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턴 역학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상정했다고들 하니까, 이 물리학에서 시간이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시간은 현상을 설명하거나 기술하기 위한 배경 변수지, 물리 현상에 참여하여 질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변수가 아니다. 이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는 정반대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물질들이 시공의 곡률에 따라 운동하고, 시공은 물질들의 에너지에 따라 휘기 때문이다. 뉴턴 역학에서 시간의 방향은 따로 의미를 갖지 않는데, 이걸 뉴턴 역학은 가역적이라고 한다.
11. 잉크 방울을 물통 속에 떨어뜨리면 평형에 이를 때까지 계속 확산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뉴턴 역학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태가 진행되어야 할 필연은 1도 없다. 확산되어가다가 도중에 다시 물과 잉크로 확연히 나뉘어져도 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쉽게 말해서 원래는 놀라선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왜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가? 다시 한번 놀랍게도 이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몇 가지 가설이 제시되어왔을 뿐이다. 시간에 관한 자연과학 도서를 보면 이 문제가 반드시 나온다(많은 경우 ‘시간의 화살’, ‘시간의 방향’ 같은 제목이 달려 있다).
12. 그중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유력한 이론을 제시한 과학자가 (아까 프리고진이 다윈하고 함께 거론한) 볼츠만이다. 그는 통계역학을 구사하여 기존의 엔트로피 개념을 필연적인 것에서 확률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열역학은 필연적인 물리 법칙에서 확률적인 물리 법칙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볼츠만의 원자>(승산, 2003)를 읽어보면 볼츠만이 이 결론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했고, 이 결론 앞에서 얼마나 당혹했으며, 당대 과학자들이 이 결론을 얼마나 미워했는지가 생생하게 쓰여 있다. 많은 학자들이 볼츠만의 대단히 불행한 죽음을, 앨런 튜링의 역시나 불행한 죽음과 함께,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13.
몇 년 전에 어느 일본 학자가 쓴, 아~,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2005), <나의 1960년대 -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돌베개, 2017) 등으로 유명한 야마모토 요시타카다. 이 분이 지은 <熱学思想の史的展開 - 熱とエントロピー>(열학 사상의 역사적 전개 – 열과 엔트로피)를 사서 고이 모셔놓았다. 무려 세 권짜리라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탓이다. 일본에는 이렇게 과학의 결과만이 아니라 성립 과정을 상세하게 밝혀놓은 양서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나처럼 과학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무지하게 소중하다. 아무튼 현대 열역학에 대한 공부도 좀 해주면서 이 책을 같이 읽어가야지 생각했지만, 몇 년째 시간만 가고 있다. 그 사이 프리고진을 중심으로 하는 카오스 이론에 열광하고 르네 톰에 흥미를 가지기도 했다가 미셸 세르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열역학과 관련해서는 별무소득이었다.
14. 그렇게 시간만 흐르다가 육후이가 열역학 이데올로기로서 시스템 이론을 비판한 글을 읽으니 어찌나 반갑던지! 더 놀라웠던 것은 시스템 이론이 내가 그동안 이런저런 글에서 비판적으로 터치해온 몇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든가, 둘째, ‘상호 작용의 중요성과 능동성의 문제’, 혹은 셋째, ‘하나의 전체로서의 시스템’ 같은 주제들. 이에 대해 나는 ‘또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작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둘째, ‘상호작용을 능동과 수동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의 협소성’(이 점에서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내가 번역했다)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또한 셋째, ‘하나의 전체라는 시스템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나도 읽었다)를 읽으며 ‘내 말이, 내 말이’를 연발했다.
15. 아무래도 다음에 이어쓰지 않을 공산이 꽤 될 거 같아, 내 시각을 간략히만 밝히고 글을 끝내야겠다. 우선 나도 시스템 이론이 문제라고 생각한다.4) 하지만 육후이처럼 시스템 논리(logic)에 적대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건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와 함께, 현대를 살아가는 진보 사상과 이론이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정작 글은 이 문제를 다루려고 시작했는데, 시작 지점만 표시하며 끝내게 되었다. 나는 체질적으로 ‘전체’나 ‘시스템’과 잘 맞지 않는 것일까?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