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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로부터 이해로의 항해 -한국문학 연구 방향에 관한 제언 / 윤종환

1. 한국문학을 향한 오항(誤航)


최근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박사과정 이 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국내외 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적극 참여하고 논문도 여럿 출판하며 공부하는 데 신이 나 있었기에 짧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당연 스트레스 받는 일 많았어도 문학에 열정을 쏟아붓는 시간 속에서는 다른 지평선이 펼쳐졌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몰입하는 경험의 단독성이 없었더라면 그 지평선 너머를 꿈꿀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깊이 공부하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은 오해와 항해의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문학에 대한 오해는 먼저 작품에 대한 편견과 오독을 의미한다. 예술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방식은 자기 나름이기에 누구에게나 오독할 자유는 있지만, 모두가 오독을 한다면 세상에는 조금 더 좋은 오독이 있기 마련이다. 오독은 내 방식이 곧 나의 세계를 대변한다는 독아적 태도를 껴안으면서도 어딘가에 있을 더 아름다운 오독을 찾거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바, 좋은 오해는 다른 이해를 지향한다.


문학에 대한 다른 오해는 문학 연구의 관습과 관련 있다. 이곳에는 문학을 좀 더 깊이 오독하고 싶어 이론, 철학, 사상, 담론의 도움을 받는 오독의 관례가 있다. 처음에는 그 관문을 통과하려고 애쓰다가 내가 국문학자가 아니라 철학사상 연구자인지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삶의 한 가운데서 쓰인 문학을 멀리해두고 낯선 이론 습득과 그 전략적 반영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문학은 몇 편 못 읽거나 읽더라도 텍스트를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이 오해를 반성하는 때가 있었다. 땅을 치고 후회하지는 않았는데, 오해가 또 다른 이해로 열린 덕분이다. 이후에는 문학과 철학이 엄정한 분과 학문으로 기능해온 근대 제도사를 검토하며 문학을 깊이 읽는 길을 모색하게 됐다.


우리 지성사에는 지적으로 기민한 선배들이 구축해놓은 세계 해석의 구조는 물론, 침묵과 소음이 교호하는 장에서 벼려낸 작가들의 문학적 현실 대응까지 무수하다. 비록 한국 근대문학이 백 년밖에 되지 않았다지만 이 백 년의 시간을 온몸으로 앓으며 스스로 시대의 증상이 된 선배들의 언어는 시공을 넘나든다. 여기에 식민지와 분단 이데올로기로 빚어진 선행 지식의 한계까지 보면 오해의 층위가 더 깊어지는데, 이때 한국문학의 장은 ‘오해의 복잡계(complexity system of misunderstanding)’처럼 유동한다. 한두 가지 심급과 요소로 해결되지 않는 다체문제의 대양에 모두가 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오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이 무수한 오해의 반동 속에서 오해의 방향을 이해로 끌고나아가 함을 느꼈다.


막 박사를 수료한 내게 한국문학 연구는 오해로의 노정, 즉 오항(誤航)과 같다. 일차적으로 한국문학 텍스트와 그 역사에 대한 응전이면서 그 오독의 역사에 대한 도전이다. 나는 오독 가능세계의 한 세계이자 그 세계에의 존재로 있으며,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스스로를 투항했다. 그러나 이 투항은 지리멸렬한 허무나 카오스로의 항복이 아닐 것이다. 오독에 더 나은 오독이 분명 존재하듯이, 나의 오항은 결국 스스로 이 거대한 한국문학의 대양에서 한 정확한 항로를 그리는 분투가 된다. 그 방식은 김수영의 시 「이 한국문학사」의 말을 빌리건대 이 “무서운 방탕” 속 “시시한 발견”이 “고요한 숨결”이 되도록 하는 식이다. 이 불확실한 조타(操舵) 정말이지 좋다.



2. 깊고 넓게 오해하고 오해 받기


한국 근대문학사 백 년은 ‘조선 혹은 한국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두고 ‘언어’에의 사투를 벌이며 형성됐다. 사어(死語)를 발굴해 민족어의 외연을 확보하려는 고고학적 시도, 언어를 조탁해 그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순수 지향 운동, 계급과 식민의 중층적 현실을 적확히 읽어내려는 생활어 모색, 일상의 언어를 낯설게 하여 그 일상을 극복하려는 세계에의 기투, 입 없는 자들의 비속어를 지적인 예술언어로까지 끌어올리는 힘, 이중언어와 다중언어 현실을 문학으로 재구성하려는 의지 모든 것들이 민족어로서의 한국어의 숨결을 붙들기 위해 사투한 문인들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4·19 전후 한글세대 작가론을 거쳐 오늘날까지 한국문학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 모두 이 토대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한국어로 쓰인 문학만이 한국문학의 범주에 속하는가는 보다 깊이 고민해야 할 때 같다. 한국인이 다른 언어로 쓰는 문학과 비한국인이 한국어로 쓰는 문학은 기본이고, 교포를 비롯한 해외 동포와 그들의 자녀 세대, 이중국적자, 다중언어자, 번역가, 디아스포라의 작품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한국계 국제입양 피/경험자의 문학은 자기 인식이 형성되기도 전에 모국어를 규정당한 삶을 존재론적 저변으로 둔다. 문제는 이들 작품이 어떤 언어로 쓰였냐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 언어를 둘러싼 여러 심급이 중층적으로 작용하는 구조가 복잡하고 또 선명해졌다는 점이다.


민족어로서의 한국어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대적·역사적 요청에 의한 것이지만, 그 요청을 바랄 수 없거나 어느 담론에도 주체로 설 수 없던 자들의 언어 선택이 그들 문학의 국경을 규정하도록 놓아둘 수만은 없다. 이에 관한 논의를 위해 조금 낯선 시선이 필요하다. 생경한 존재가 출현하면 그 사회가 처음 내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은 두려움이다. 이 감응이 나쁘다 평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 본능적 감각이 부재할 때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역학과 결과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문인과 지식인은 상당히 합리적이며 지혜롭게 현실에 대응할 힘이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속어주의에 익숙한 나머지 그 자력(自力)보다 먼저 두려움과 낯섦에 경도된 게 아닌가 한다.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려 할 때 제기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 문학이 과연 한국/한국적인 것으로의 이해를 깊이 수행하는지, 기존의 한국문학의 풍토에서 자란 작품과 질적 수준을 비교할 수 있냐는 의문이 우선한다. 제법 많이 알려진 이민진, 김주혜, 허주은, 이미리내의 작품과 이에 대한 비판이 떠오른다. 이들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한국적 이미지나 작품에 내재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독자의 권한으로서 논쟁하기에 충분한 대상이다. 가령 조선의 대표 민화 작호도(鵲虎圖)의 두 동물 호랑이와 까치에서 까치는 어디 멀리 날려보내고 위엄 있어보이는 호랑이만 가져다 한국인을 ‘작은 땅의 야수’로 호명하는 방식은 그 의도와 달리 민족주의적 발상과 만들어진 전통의 합작이라 비판할 수 있다. 여기에 서구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롯한 다른 요소가 비판의 요소로 첨가될 수 있다.


그들이 설령 한국을 잘 알지 못했고 또 작품에 한국을 충실히 녹여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오해(misunderstanding)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오해는 이해를 낳고 이해는 오해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말 걸기(addressing)의 기초로서, 낯선 타자를 알아가기 위해 타자의 민족·국가·역사·문화가 완성되었다는 공동체를 가정하고 그것을 열쇠구멍처럼 생각하는 정위적(定位的) 판단의 태도를 유보하고 우선 자신이 아는 바를 솔직히 드러내며 소통을 꾀하는 방식이다. 때로 그 태도는 유치하고 어리석다. 그러나 오해로 가득한 지성사와 문학사―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닌 이 현실―를 “잘 파악했다”고 말하며 실상 자신이 모르는 것을 숨기고 아는 척, 젠체하며 자신의 해석이 오해가 아닌 정석이라 우기는 식보다, 자기 이해의 결핍과 민낯을 적극 드러내되 최선을 다하는 방식에 조금 더 신뢰가 간다. 내가 기대하는 성숙한 문학의 장은 그 오해에 내재한 이해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가능성이 파생할 소통과 배움을 무한히 피워올릴 고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타자를 오해할 자격이 있다. 나는 오해로부터 이해를 꿈꾼다. 당장은 불가능일지라도 말이다.


캐시 박 홍. 출처:https://www.kmib.co.kr

얼마 전 한국계 미국인 시인 캐시 박 홍(Cathy Park Hong)은 그녀의 북토크에서 한국인의 정(情) 이야기를 꺼냈다. 함께 자리했던 미국 유학생 친구들은 이미 서구사회에 만연한 한국인에의 선입견에 지쳤는지 또 정(情)과 한(恨)이냐며 생색을 냈다. 친구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나 역시 그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다. 다만 조금 먼저 그게 캐시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오해의 방식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정해주고 싶었다. 정과 한은 한국 문화의 핵심 키워드는 아니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오독되고 있으며 그 화용의 역사는 생성 중이다. 캐시는 그 시공의 흐름 어딘가로 잠시 회절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한국을 오항하지 않았더라면 『마이너 필링스』 같은 훌륭한 작품은 쓰이지 않았을 터이다. 정현종은 시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며 “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라 했다. 날 선 비판보다 낯선 방문객의 “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을 먼저 읽는 건 어떨까. 방문의 방식이 다소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오해의 미래에는 이해가 기다린다.



3. 한국문학 이해를 위한 긴 항해 속으로


오해가 이해가 되리라는 주장은 이상주의적이며 낭만적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반복했듯이 이 오해할 자유의 무한 가운데에도 더 좋은 오해는 반드시 존재한다. 한국문학이라는 대양의 범주가 넓어져도 문학으로의 오항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범주 설정의 의제를 유행이나 시류로 여겨 무비판적으로 욕망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러한 실수는 역사에서 숱하게 경험했다. 자칫하면 돈과 권력에의 집착으로 귀결될 수 있고 스스로에 충(忠)하지 못한 자는 기초 공사를 부실히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신진 한국문학 연구자는 이 현실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 내포를 심화하는 일에 결코 소홀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분단과 냉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에 있고 이에 따른 이데올로기와 검열의 문제로 우리에게는 많은 과제가 있다. 사라졌거나 약탈된, 경제적 이유로 소장할 수 없었던 자료는 얼마나 많을까. 여전히 문학사는 역사와 전통의 구축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이 트랜스내셔널한 시대에 아직도 20세기적 문학사?’라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연구라 비판할 수 있겠으나, 나는 ‘여전히 한국문학사에 대한 오해는 더 나은 오해를 얻지 못한 상태’라 답변하겠다. 한국문학 연구는 동시대 조류에 개방될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내근(內筋)을 튼튼히 다지기도 해야 한다. 김수영이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고 말했어도 “방향은 현대(「네이팜 탄」)”였듯이 더 나은 현대를 위해서라도 전통의 재/구축은 여전히 필요하다.


주위에는 여러 국가에서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다. 작년 겨울, 최근 한국문학 번역과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 미국의 연구자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영어권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젊은 사람들은 한국어를 제법 잘 하기에 한국문학을 읽으며 어느 정도 미감할 수는 있지만, 그 작품이나 작가가 어떤 역사와 문화에서 탄생했는지 맥락을 아는 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고 고백했다. 당신 스스로의 문제 의식이기도 했을 고민이 전달된 순간, 나는 해외 한국문학 연구자와 우리나라의 연구자가 함께 ‘더 나은 오해’를 발견해 이를 세계 보편의 층위로 길어올릴 한 힘을 보았다.


'모든 이해는 오해다.'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선배인 연구자들이 내게 해주던 노파심 어린 말 중 하나는 해외에서 한국문학을 쓰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의 깊이를 의심하라는 것이었다. 당장 그 말을 쉽게 부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오해로 가득한 학문의 세계에서 비판받고 있는 그들 역시 성실하게 오해했다는 과정이 소중하다. 그 오해의 결과가 미흡할지라도 이해에 다다르고 있듯이, 한국학자와 한국문학자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깊은 이해를 목적 삼아 함께 항해 중이라 생각한다. 누가 더 좋은 오독을 하는지는 끝까지 지켜볼 일로 미루어둔다. 각자의 위치에서 오해로부터 이해로 항해하리라는 기약 없는 약속이다.




윤종환(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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