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이었던가? <그러므로 포르노>를 통해 극단 신세계 안으로 첫발을 들였고,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불편하고 적나라하고 과하게, 지속되는 폭력적 무대에서 관객은 공범자가 된 듯 불편을 느꼈고, 결국 그 공연을 멈출 수 있는 것 역시 관객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왔을 때 진흙탕 싸움을 하고 나온 것처럼 기진맥진했고 처참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귓속에는 조롱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극장 안 무대 위에서 마주한 폭력에는 왜 그토록 불편해하죠? 당신은 매일 이런 장면을 보고 있잖아요? 관음증 환자처럼. 타인의 고통을 비굴하게 외면하거나 비웃고, 위선적이며, 자극적인 것을 쫓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나요? 아닌 척하지 말아요. 그날 이후 극단 신세계의 작품을 되도록 놓치지 않으려 했고 <파란나라>, <말 잘 듣는 사람들>, <공주들>, <생활풍경> 등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을 들여다보고, 사회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연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이끄는 형식보다는 오히려 편히 앉아 관람하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질문으로 오래 남는 작품들이었다.
“극단 신세계는 새로운 세계,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만나고 싶은 젊은 예술가들의 모임으로 이 시대가 불편해하는 진실들을 공연을 통해 자유롭게 하고, 주제와 형식의 제약 없이 우리의 말과 우리의 몸으로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고 단체를 소개한다.
영웅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혹은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연극의 내용과 형식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전쟁과 테러는 물론 자본주의의 폭력 등을 겪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 본성의 추악함, 아름다움이나 진실에 대한 회의감, 부조리한 세상 속에 던져진 보잘것없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깨달음 등이 새로운 형태의 공연예술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음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홀로 진지하게 세상을 구하는 영웅 주인공은 더 이상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난 10월 14일부터 2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부동산 오브 슈퍼맨>의 주인공은 은퇴한 전직 영웅 슈퍼맨이다. 빨간 망토를 걸치고 파란 타이츠 위에 빨간 팬티를 입은 채, 여느 청년들과 다름없이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착실히 돈을 모아 전셋집을 마련한 슈퍼맨. 금융 지식이 전혀 없던 그가 전세 사기를 당하게 되면서 자신의 재산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연일 금리 인상과 금융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세 사기는 한국 사회를 뒤흔든 뉴스였다. 전세는 큰돈을 한꺼번에 임대인에게 빌려주고 집을 계약하는 부동산 거래로 월세 부담을 줄여 돈을 모으는 방법이지만, 행여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불안을 안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극단 신세계의 김수정 연출은 피해 당사자로서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해 전세 사기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전세 사기를 피해 갈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연극 <부동산 오브 슈퍼맨>을 만들었다. 작품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혼합된 모큐멘터리 방식을 택했는데, 여러 층위로 나뉜 무대에서 높이 위치한 세 개의 커다란 화면에 송출되는 실제 전세 사기 관련 뉴스와 전직 영웅 슈퍼맨에 관한 휴먼다큐, 그리고 바닥무대에서 펼쳐지는 극이 어우러지며 꽉 찬 정보와 정서로 160분을 채워나갔다.
부동산 사기를 이야기하며 왜 영웅을 소환했을까? 영웅이 그 시대 사람들의 이상과 욕망을 투영한 존재라면 괴물도 전투도 없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영웅은 누구일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영웅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지구인이라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물간 영웅 슈퍼맨을 통해 마주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주인공 슈퍼맨을 급변하는 사회로부터 강요된 영웅이라는 젠더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냈다. (공동창작 작업 노트에서 발췌·편집)
“나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내가 하고 있는 연극의 방식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었다. 그렇다, 돈이다. 이 모든 것은 돈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을까? 배고파야 연극할 수 있다? 돈보다 예술이 먼저다? 돈으로 굴러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돈을 배척하는 예술론은 과연 괜찮은 것일까? 나는 전세 사기를 당하고 나서야 평생토록 크게 관심 없던 그 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제대로 직면해 보고 싶었다. 연극 <부동산 오브 슈퍼맨>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 (김수정, 연출의도 중에서)
피해 당사자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 아니라 ‘말하기’를 수행함으로 영웅 슈퍼맨의 역할과 정체성은 더 이상 세상 위를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연극을 통해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을 보여주고, 정의를 이야기하는 자로서의 거리가 있었다면, 금융자본주의를 외면했던 예술가 자신도 약자와 소수자의 현실로 떨어진 것이다. <부동산 오브 슈퍼맨>은 여러 서적, 기사, 뉴스 등의 방대한 리서치와 관련 인물 인터뷰, 연구, 분석, 전문가 자문 등을 바탕으로 제작진과 배우들의 공동창작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전세 사기·깡통전세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와 함께하며 전세 사기는 사회적 재난으로 누구나 당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허술한 부동산 정책과 국가 시스템의 개선 촉구, 피해 방지 방안 마련, 피해자 구제를 위해 목소리 높인다.
지난 10월 17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2023년 6월 1일 전세 사기 피해지원 특별법 시행 이후 피해지원위원회가 인정한 피해자는 누적 6,627명이고, ‘건축왕’, ‘빌라왕’, ‘빌라의 신’ 등 전세 사기범들은 계속 늘어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피해자들도 생겨났다. 전세 사기 피해자 중에는 빚투(빚을 내서 투자한다)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로 집을 마련한 이삼십 대와 신혼부부가 많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전세 제도 폐지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전세는 중산층의 내 집 마련에 발판이 된 제도로 전세가 없다면 돈을 모아 집을 사기가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린 청년들의 월세는 생활비의 큰 부분을 차지해 팍팍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인데, 무주택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세 제도 폐지가 아니라 전세 사기 피해 예방을 위한 부동산시장의 투명성 강화와 사기범들에 대한 처벌 강화 등 엄격한 제도적 장치이다.
“배가 고프면 창의성도 없다”는 김수정의 단호한 말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영혼을 파괴하는 현실 속에서 돈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여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 역시 이 피해로부터 구제되기를 절규하는 생존 투쟁을 담고 있다. 공연장을 나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불편했고, 당장 집으로 돌아와 나의 전세 계약서를 살펴볼 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허술한 제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음 단계로의 행동(그것이 정보검색이던 연대 서명이나 후원이던)을 하도록 자극하는 극단 신세계의 공연은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모쪼록 극단 신세계의 공연을 더 많은 관객이 보길 바란다.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길 바란다.
참고 자료 : 2023부동산오브슈퍼맨 프로그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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