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귀가 열리는 시간이다. 환한 대낮에는 듣지 못했던 작은 움직임도 소리로 감지하는, 세상은 고요한데 때론 머릿속은 더 시끄러운 때가 밤이다. 지난 9월 1일부터 9일까지 ‘서촌공간 서로’에서 진행된 은재필의 전시 퍼포먼스 <밤의 소리>를 찾은 것은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앓아 온 데서 기인한 혼자만의 동질감과 ‘우리의 심장이 공명할 때 두근거림은 커진다. 함께 하는 외로움, 극복하는 두려움’이라는 소개 문장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외로움, 극복하는 두려움
검고 투명한 막 앞에 울퉁불퉁 딱딱한 껍질을 퍼즐처럼 덮고 퍼포머가 누워있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철을 마찰했을 때의 쇳소리처럼 가볍고 연약하게, 신경에 닿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황토색 피부 조각들이 바닥으로 부서지듯 떨어진다. 한밤에 일어난 유령처럼 하얀 얼굴에 흙색 옷을 입을 퍼포머는 개성을 지워버린 무채색, 무성(性), 무표정으로 움직임과 리듬으로만 남았다. 흙으로 빚은 토르소를 조심스레 들어 무대 우측 앞에 눕혀 두고 장막을 걷어내니 두 개의 항아리를 닮은 북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무대 좌측 뒤에는 두 개의 황토색 세라믹 기둥이 놓여 있어 작은 신전처럼 보인다. 역시 하얀 얼굴, 무채색, 무성, 무표정인 또 한 명의 퍼포머가 두드리는 장단에 맞춰 방금 일어난 퍼포머가 무대 위를 걷고 어느 순간 두 퍼포머는 나란히 앉아 함께 북을 두드리며 물결처럼 일렁일렁 숨을 내뱉기도 한다.
은재필 작가는 몇 년 전 가슴에 인공 보철을 삽입한 후 심장이 뛰면 예민하게 듣게 된 철의 소리와 진동에서 사물놀이 선생이자 무당이기도 했던 할머니로부터 배운 굿의 박자들을 소환했다. 어릴 적, 손을 다치고 들어 온 손자의 팔을 손대지 않고 쓸어내리며 나쁜 에너지를 빠져나가게 했던 몸짓에 관한 기억 같은 것일까?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라 치부되는 굿 장단으로부터 동그랗게 진동으로 받아들이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상상했고, 느려지고 빨라지며 만들어 내는 북의 소리, 짝수와 홀수를 비꼬는 박자들로 <밤의 소리>를 불러냈다.
작가는 3D 프린터를 활용하여 사운드 스피커를 스캔하고 흙을 두드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가상의 피부조직을 제작, 직조했다. 그 피부를 입은 사람도 하나의 반사판처럼 소리가 보이고 결국 껍데기가 혼자 남아, 다른 사람의 피부가 되어 누구나 악기와 소리를 감각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말과 얼굴로 이야기가 드러나는 매체에서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 즉 ‘관습이나 시대, 문화가 드러내는 뾰족함’과 다른 몸은 즉시 위계가 생기기 때문에 캐릭터와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색마저도 빼버려 정보를 적게 주고 소리를 통해 몸들이 들썩이는 풍경을 상상했다고 한다. 40분 동안 두 배씩 빨라지고 두 배씩 느려지며 반복되는 스코어의 속도와 세기, 박자는 할머니에게 배운 충청도의 웃다리농악 장단에 기반을 두긴 했지만, 음악의 정통성과 역사성에 다가가기보다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 작품은 관객의 상상을 더 멀리 이끈다.
발걸음과 두 개의 북으로만 만들어진 <밤의 소리>에서 작가는 발걸음도 소리로 인식되어 두 퍼포머가 하나의 몸으로 보이길 원했다고 한다. 물항아리를 닮은 황토색 북 안을 들여다보면 가죽을 덧댄 면이 마치 달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두 퍼포머의 호흡은 마치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는 달처럼 끝없는 순환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하나가 되었다가 사라지는 밤의 그림자로 떠오르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1)은 낮이 이성의 시간,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라고 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함께하는 외로움은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랑했던 존재와의 조우, 사라져가는 옛것에 관한 기억이며, 극복하는 두려움은 그럼에도 어둠의 바닥까지 내려가 “고독한 몸을 세상의 만물과 이어주는 연결선”을 붙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웅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
9월 11일에는 작가와의 대화 <영웅을 위한 받침대가 아닌>이 마련되었다. 그 자리에서는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허구 – 운반 바구니 이론≫2)을 함께 읽고 동굴 벽에 기록된 우리에게 익숙한 몽둥이와 살육으로 해결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실제 일어난 우리의 역사와 다를 수 있음에 대해 이야기 했다. 르 귄이 상상한 바구니에 옮겨지는 것은 “초라한 감자 혹은 토끼, 멍청이들과 약골들, 작은 곡식 한 움큼과 조약돌들, 반복되는 일상을 끌어안는 갈등이 없는 밋밋한 이야기”로 “다른 이야기의 단어, 말해지지 않는 것, 삶의 이야기, 자연, 주체”를 찾는 반영웅적인 이야기이다. 기술 역시 로맨틱한 매체가 될 수 있는데 발전이라는 이름, 경제적인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무언가로만 소비되어 우리가 그것을 다르게 볼 수 없도록 뾰족하게 내몬다는 것이다.
은재필 작가는 서구 중심 사회에서 외면당한 동아시아 전통문화와 개인의 미시적 역사에 관한 연구 활동을 이어 나가며 대안적인 길을 탐색해서 베이징 오페라와 사물놀이를 소재로 퍼포먼스를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영화 <패왕별희>로 알려진 남성의 몸으로 여성의 역할을 연기한 경극 배우 메이란팡을 연구하며 언어적 중재나 몸의 움직임과 선이 아닌 구체적 손동작으로 서사를 드러내는 것에 주목했다. 물결을 담고, 퍼트리고. 비단실을 잡고, 향을 퍼트리고, 꽃의 줄기를 잡고, 다가가고, 향초를 잡고, 구름을 잡는 등 메이란팡의 손동작들은 언어, 갈등, 중재, 해결이라는 선형적인 극과 이야기 구조의 시스템과 권위에서 멀어지고 백인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양인 퀴어 배우나 굿은 주류에서 벗어나 원시적 혹은 야만적, 비과학적으로 낙인이 찍힌 소수자 혹은 타자들로 대변된다. 이렇듯 뾰족함으로 상징되는 문화와는 다른 씨앗을 줍고, 다른 것들을 말하기 시작하며 살아온 흔적, 관계를 새롭게 써 나가고 재해석하는 것은 “현실에서 통용되는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을 남기게 될 것이다.
작가와의 대화는 참여자들과 낮고 둥글게 둘러앉아 타로에 관해 이야기하며 마무리되었다. 아무도 원조를 따지지 않고, 여사제와 사제가 함께 존재하는 타로는 읽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캐릭터가 말 거는 카드 속에 담긴 은유와 순환하는 삶의 의미를 조곤조곤 나누며 공명하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귀 기울이는 밤, 그 ‘어둠의 입’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이었다.
벽화 속 잠든 짐승들에게 붉은 물감을 칠해줍시다.
살아서 이곳을 나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피 흘린 동굴이 새 생명을 낳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3)
1)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
2)https://nomadiaphilonote.tistory.com/2에서 발췌
3)정다연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중 <겨울철>에서 인용, 현대문학,
참고 사이트 : @apparat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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