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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야만과 문명, 그 사이의 어딘가. / 한보람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엄청난 변화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바로 ‘한류’다. 오랫동안 한국은 우리보다 앞선, 새로운, 발전된 무언가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몰두했다. 근대 서양문명이 동양에 밀어닥친 후 서양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목표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처음 보는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현상의 한복판,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다.


     

K-컬쳐의 비상,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이례적인 일로만 생각했다. BTS가 전 세계적으로 부상했을 때도 신기하기는 했지만 케이팝과 아이돌로 한정된 세상의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로도 한국문화의 세계 진출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K-드라마들이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2021년 공개된 오징어게임은 2024년 현재까지도 확고한 넷플릭스 전체 순위 1위이다. 설마설마하며 조심스레 의심했던 우리 문화의 세계화는 이제 의심할 여지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쯤 되면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한국의 문화콘텐츠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사진1]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우리는 그들에게 야만이었다.


1880년대 조선정부는 서양의 여러 국가와 잇따라 조약을 체결했다. 서양인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은둔의 나라’ 조선에 들어왔다. ‘전설과 허구에 감싸인 미지의 세계’, ‘탐험 욕구를 자극하는 신비로운 곳’, 그들이 생각한 조선의 이미지였다. 그때 그 시절, 우리도 그들을 몰랐지만, 그들 역시 우리를 몰랐다. 무지는 오만과 오해를 낳았다. 서양인은 그들의 시각으로 우리를 재단했다. 그들이 바라본 우리는 ‘야만’이었다.

     

“수백 년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발전도 없었다.”, “조선인의 특성은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혐오한다는 사실이다.”, “조선은 미개한 야만과 무력하고 쇠락한 문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Harper’s Weekly』, 1894.12.1.)

무기력과 게으름, 미개와 야만. 19세기 후반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묘사한 단어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장착하지 않았던 19세기 조선에 그들은 당연한 듯 ‘야만’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사진2] Harper’s Weekly 기사

     

그들의 야만, 우리의 문명


1893년 조선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만국박람회에 참여했다. 세계에 스스로를 전시한 첫 번째 순간이었다. 하지만 현지에 마련된 조선관은 초라했다. 조선에 할당된 면적은 고작 13평이었다. 전시품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가마, 자수병풍, 자개장 같은 것들이 조선관을 채웠다. 화려한 근대를 자랑하는 산업 물품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갑신정변 이후 오랜 망명 생활 중에 박람회 현장을 찾았던 윤치호는 조선관을 보고 ‘그 부족함에 부끄러웠다’고 표현했다. 서구에 비해 조선 물품이 부끄러울 정도로 열등하다는 인식이었다.

[사진3]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조선관

하지만 시카고 박람회의 조선측 대표 출품대원 정경원의 인식은 윤치호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재주와 지혜를 서로 권려하여 시샘과 꺼리는 분위기를 없게 하고, 박람회에서 관람하여 서로 배우고 진보하면 천하 각국의 기기 물품이 모두 발전할 것이다.” (『정경원문서』의 기록)

     

정경원은 박람회장의 조선관 앞에서 당당했다. 그가 생각한 박람회는 문명 간 경쟁을 통해 우열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었다. 또, ‘부족’한 조선이 ‘우월’한 서양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것에 대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상호 교류와 나눔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존중과 우호 속 상호 발전의 구현, 그것이 시카고 만국박람회 현장의 조선측 대표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너무 이상적이어서 잔혹한 현실 세계에서는 힘이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지만, 그때 조선은 그 이상을 기반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광풍 앞에 우리의 낯선 문명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었다. 1900년 조선이 다시 참가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고종황제의 어진은 인종전시 부문에 전시되었다. 그렇게 한국 문명은 서양의 시선을 통해 ‘야만’이라는 울타리에 갇혀버렸다.

[사진4]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고종황제 어진

     

단지 K-컬쳐가 아닌 보편 문명으로 가는 길


누가 야만이었고, 누가 문명이었을까? 문명과 야만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가? 어느 사회나 야만성과 문명성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가 야만으로 치부되던 19세기, 물론 조선 사회에도 그들의 눈에 비친 것 같은 더러운 거리, 부패한 관료 등 야만성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대에 대한 존중과 우호, 상호 발전이라는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명 또한 가지고 있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갑작스럽게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분명하다. 19세기 조선이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인류의 도덕적 보편 가치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선에서 조선은 나약한 야만이었지만 우리 내부의 시선에서 조선은 스스로 강력한 문화의 힘을 믿고 있었다. 지금, K-컬쳐의 눈부신 성공을 보고 있는 이때, 그 성공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를 만들어 낸 문명의 실체에 우리의 시각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cato9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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