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세계가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예술을 하나의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그릇에 담겨 있는 내용물은 작가의 내면이자 관객을 향한 메시지로 간주하고 작가는 언제나 그 내용물을 성실히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그릇의 풍성한 내용물을 지향하는 관객에게 좋지 못한 작품은 그래서 비어있는 것 즉 허전한 그릇이며, 동시에 '있어 보이는 것', 즉 기만적인 그릇이다.
그러나 작품 앞에 관객의 충만함은, 그 자체로 쉽게 주어지지 않고 작품이라는 그릇의 내부표면을 드넓게 휘적이며 돌아다니는 행위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텍스트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혹은 그 전시회를 ‘둘러보았어’라는 표현에는 이러한 탐험의 경험이 심층은유로서 작동한다. 그릇 내부의 내용을 정적으로, 한 번에 모두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석구석을 훑고 둘러보며 직접 길을 걷는 여정으로 바라보는 셈이다. 이 경우 작품관람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관객은 그래서 돌아다니긴 하지만 길 위에 제대로 발을 딛고 있지 않은 행위 즉 들뜬 길걷기를 하는 자이며, 동시에 탐색하지 않고 아는 척하기, 즉 기만적인 길걷기를 하는 자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따지고 보면 많은 부분 은유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은유도 실은 몇 가지 근원영역(source domain)에 의거해 움직인다는 견해를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1980년대에 세운 바 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그릇’과 ‘길’이라는 강력한 심층은유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작품이라는 그릇과 관객이라는 길걷기 행위자는 이렇게 충만함을 향해서 상호노력한다. 이 심층은유들은 거의 모든 언어권에 등장한다. 동시에 우리는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문법적 요소로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네트워크와 게임엔진을 매개로 자신의 가상적이고 상호적인 세계를 구축해 온 안가영 작가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새로운 물감과 캔버스로서 게임엔진이라는 기술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선취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동안 그녀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해설은 다음과 같았다. “인터넷 네트워크 환경과 지각체험은 동시대미술에서 중요한 테마”(이진실 2019), (알고리듬으로 구속된 사이버 공간을 무대로) “사이버-운명론과 사이버-우연성 사이를 넘나드는”(유은순 2014), “‘네트워크’라는 미로에 빠져버렸고, 미로 속에서 획득한”(정윤희 2016), “비인간 객체들이 가득한 게임적 공간”(안준형 2021). 이러한 평가들의 공통지적은 그녀의 작품이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가상적 공간의 구축, 그 안에서의 탐험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 경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헤르메스의 상자>(2016)는 제우스에게 택배 배달을 의뢰받은 헤르메스가 길을 잃지만 동시에 잃기에 새로운 길찾기를 시작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이 이미 주어진 길찾기 퀘스트를 수행해야 보상을 주는 게임적 장치와 다른 점은 오히려 길잃기를 통해 길찾기가 가능한 역설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직접 조이스틱을 통해 헤매 본다. 안가영은 작가 변에서 “우리는 헤르메스였다.”고 선언한다. 반대로 <월딩Worlding>(2018)은 보다 많은 창조적인 길잃기를 위해 작은 오픈 월드를 꿈꾸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공간 디자인은 개량되는 게임엔진의 연산능력과 함께 비례해 발전한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직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다 몰랐다고 보아야 한다. 때로는 기술이 작가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방아쇠가 되기 때문이다.
<KIN거운 생활: Beta>(2019), <KIN거운 생활: 온라인>(2021),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2021) 등으로 이어져 오는 KIN 삼부작은 각기 시뮬레이션 게임, 멀티플레이 아바타 채팅 시스템 등의 기술적 요소와 매개하고 있다. 마침 코로나19로 일상이 셧다운 되고, 고독한 개인들이 사이버공간으로 다이빙 하는 순간에 안가영은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메타버스 플랫폼 VR chat같은 프로그램을 경유해, 이제 혼자서 길 잃기가 아닌 동료와 함게 길 잃기라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 같이 창조적으로 길 잃을 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KIN거운 생활: 온라인>(2021)에서 그들은 실은 기존의 가상세계에서 배제되거나 추방당한 자들이다. 지혜는 남성 게이머들을 겨냥해 육감적인 몸매로 모델링 된 데이터 덩어리로서 상업적 쓸모가 사라지자 버려진 존재다. 민지는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로 입장하려고 하지만 조작 버튼조차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이동불능자다. 혜지는 정성들여 만든 자신의 아바타를 손쉽게 탈취당하는 디지털 노동자다. 이들은 기존의 현실과 강력히 결부되어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 오히려 길 잃고 때로는 추방당하기까지 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온라인 쉘터에 피난해 있지 않는다. 공모하고 반격할 궁리를 한다. 지혜는 급기야 사이버 공간에 거대한 날개와 미사일로 무장하는 성형수술을 감행한다. 이미 갈가리 찢긴 신체 이미지를 연결하고 재조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자신의 피조물의 운명을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린 박사와는 반대로, 작가 안가영은 이 새로운 생명의 비틀린 언어를 오류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취하게끔 돕는다. 그녀가 줄곧 말하는 <21세기 사이버신체 해방선언>(2020)은 사이버 어딘가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전략이 아니라 지금의 사이버 밖으로 탈출하려는 의도 속에서 발언된 것이다.
<KIN거운 생활: 쉘터에서>(2021)에는 마약탐지견으로 활동하다 동물실험실에 보내진 복제견 메이, 좀 더 고성능인 인공지능 청소기에 일자리를 빼앗긴 구형 청소기 로봇 준, 에너지 발전소에서 독성물질을 다루다 외계인처럼 초록피부를 갖게 된 이주노동자 줄라이가 있다. 이들의 세 캐릭터는 <KIN거운 생활: 온라인>의 지혜, 민지, 혜지의 처지와 대칭적으로 공명한다. 다른 점은 지혜, 민지, 혜지는 인간과 가상기술의 사이보그적 회집체고, 메이, 준, 줄라이는 비인간종 혹은 그에 육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관장하는 셀터의 주인이 촉수를 가진 거대 해파리라는 점이다. 해파리는 크툴루 신화적 괴물로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가변성과 수많은 촉수의 공격성을 통해 인간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작품에서 해파리는 촉수를 통해 비인간종들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다. 사물과 동물, 외계인을 연결해 교신시킨다는 점에서 작가가 바라는 더 가속화된 네트워크 시스템의 현현으로 보인다.
한때 사이버네트워크 운동은 세상을 거미줄의 은유로 바라보고 중앙권력 없이 끝없이 연결되는 민주적인 세계를 꿈꿨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에 비해 오늘날 네트워크는 혼종이 아니라 극종의 세계로, 화합이 아니라 혐오가 난무하는 공간이 되었다. 거대한 방어벽을 세우고 페이스북과 구글을 차단해 버린 중국의 인터넷, 특정 정치적 색깔을 가진 시민들을 추적하는 러시아의 인터넷, 극우인사의 혐오발언이 만들어내는 트래픽 장사를 유도 방치하는 서구의 IT기업들은 세계를 구할 거미를 독충으로 만들고 거미줄을 자본의 연결망으로 간주해 독점해 버렸다. 안가영은 우리는 차라리 거미가 아니라 해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독성, 어떤 것에도 포획되지 않고 자유롭게 빠져나가는 형태 없음, 인간은 물론 세계의 비인간 사물도 연결할 수 있는 촉수다발을 해파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라는 ‘그릇’을 구축하고, 기존 세계가 강요하는 ‘길’을 잃으며 동시에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은 이들을 보호하고 연합해 새롭게 진지를 구축하는 데까지 넘어가려 한다. 필자는 이것을 한 작가의 생각의 발전으로 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이미 내재된 것이며, 잠시 억압되어 있었을 뿐이다. 전통적인 예술은 작품이라는 그릇을 정교하게 만들고, 그 안으로 관객을 초대해 해석이라는 투어의 절차성을 중요시한다. 그에 비해 안가영은 게임엔진과 네트워크라는 기술적 매개를 통해, 관객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하기 보다는 스스로 잃게 만드는 작업을 유도한다. 동시에 한편에서 길잃은 자들이 연합하고 반격할 쉘터를 차곡차곡 준비한다. 일련의 작품 흐름을 보면 매우 정교하게 기획된 전쟁의 준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규모 네트워크를 곳곳에 설치해 스스로 해파리가 되어 진지를 구축하고 지휘하는 작가를 볼 수 있을까? 이 경우 예술은 더 이상 그릇 안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릇 밖으로 행동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을까? 넘쳐서 흘러버린 그 잉여를 우리는 예술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작가에게 해보며 동시에 미래의 또 다른 잠재태로 놓고자 한다.
자기 자신의 길 위에 있다는 영어의 표현 On My Way는 멋진 말이다. 자신의 길(My Way)이어서가 아니라 길 위를 온전히 자기 확신성으로 점유하는 존재론적 기쁨(On)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안가영 작업의 핵심이 온라인(Online) 즉 사이버네트워크를 경유하는 작업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길 위에 있을 수 있는 기쁨(On Line)을 추구하는 욕망에 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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