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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신파—독일과 한국 사이 / 김보슬

줄기


흔히 ‘신파조’라 할 때에는 어떤 상황이나 분위기의 때 지난 통속극 같은 면을 업신여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데 新派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본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새로운 줄기라는 뜻이다. 태초에 지구상에 없던 인간이 영장류의 어느 두터운 줄기에서 슬며시 갈라져 나온 것처럼, 거역을 할 수 없이 자연 전반에 스며있는 생명의 이치를 연상해도 될까? 하나의 모류(母流)로부터 갈라져 나온 여러 지류가 방방곡곡 젖줄을 대는 모양새를 지도에서 보는 것이 의아할 일도 아닌 것처럼, 신파는 그저 새로운 줄기나 세대이리라. 문득 혐오의 시선을 거둔다, 물이 만나고 갈라짐을 떠올리며...


파도


파도에 관한 기억. 베트남 호이안의 가을 바다는 날씨가 아주 궂었다. 비구름을 업은 파도에 바짝 다가앉았다. 멀리로부터 다가오며 점차 검고 높게 부풀어 오르다 이내 눈앞에서 부서지고, 다시 도움닫기 하듯 멀리로 달려나가 되돌아오고 흩어지는 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부서진 위에 매번 또 다시 부서져내리는 그 모습은 사람 사는 고민을 닮아 있었다. 파도가 높고 거셀수록 수평선은 더 고요해지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호이안 해변, 사진 제공_김보슬

파트리샤, 그리고 99


현대무용 안무가 파트리샤 카롤린 마이(Patricia Carolin Mai)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왔다. 서울에 머물며 안무가 장혜림이 이끌고 있는 ‘나인티나인아트컴퍼니(Ninety9 Art Company)’가 출연할 작품 <갈-갈(Gal-Gal)>을 안무 중이다.


장혜림과 나인티나인은 한국 전통무용 움직임을 기반으로 창작 무용을 만드는 단체이다. 다양한 몸의 언어 중 한국적 언어를 가진 몸들을 재료 삼아, 독일 안무가가 만드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왜 이런 작업을 시작한 것일까? 파트리샤의 이야기 중, 그의 동의를 얻은 부분을 독자와 공유한다.(취재가 아니라 서로 편안한 상태에서 나눈 대화의 발췌인 점, 영어 대화를 우리말로 옮기며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이 생략과 각색을 거친 점을 밝힌다.)


갈-갈


“<Gal-Gal>의 작업 동기는 ‘gal’이라는 말에 이미 들어 있어. 히브리어로 ‘물결’을 뜻하는 이 낱말을 두 번 반복하면 한 물결에서 다른 물결로 이어지지. 태극선의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이 만나는 것만 같아. 처음도 끝도 없이 탄력적으로 운동하는 원, 또는 싸인(sine) 곡선과 같은 것이 되지. 비로소 물의 상태를 떠올릴 수 있게 돼- 떠다니는 것, 숨 쉬는 것, 아래로 떨어지는 것, 흐르는 것, 불어나는 것, 통과하는 것, 부딪히는 것 등등... 그리고 몸의 차원에서도, 물결을 닮은 움직임으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리라 봐.


혜림을 처음 만난 것은 2017년이었어. 내가 서울무용센터 입주 작가로 처음 한국에 와 있을 때였는데 혜림의 작품을 보고 소름 돋았던 것을 기억해. 그 뒤로 우리는 꾸준히 연락을 나누었는데, 함께 작업 할 기회를 노리며 여기까지 온 듯해. 나는 누구에게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제안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해. 하지만 충분한 신뢰와 호감을 느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나를 밀어붙이는 힘이란 바로 이런 거야. 마치 연이어 밀려오는 파도처럼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 ‘해 보자!’


이 모든 계기들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 착안해 ‘Gal-Gal’이라는 이름을 우리 작업에 붙이기로 했어. 이전부터 존재했던 단어가 이 작업에 붙음으로 인해 또 다른 연속성을 그려나가게 될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부단히 묻곤 해.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뭐지? 무엇이 우리가 멈추지 않도록 하지? 내가 계속 생각하도록, 믿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동력은 무엇이지?’ 우리 몸에는 매 순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만, 내부에는 우리를 한결같이 지탱하는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아. 그것이 우리를 버티게 하고, 반복하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아닐까? 나이 먹은 것을 돌이킬 수 없고, 이미 알게 된 것을 모를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 나아만 가는데, 그 길 위에서 충만해져.


연습 사진, 사진 제공_BAKI

2012년에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다가 테러를 경험했는데, 실제로 미사일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어. 그 후 내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위기 상황에 처한 몸”이 되었지. 개인적, 문화적인 기억을 저장하는 매체로서의 몸을 조명하는 작품 3부작을 만들었지. 그러면서 사람들이 위태로운 상황과 일상적인 상황, 양 극이 요구하는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바라보게 된 거야. 이런 극한상황에서 도망치겠습니까? 아니면 꼼짝 않고 있겠습니까? 위험에 처한 신체와 안전한 곳에 놓인 신체는 어떻게 다른가요? 따위의 물음들을, 구두인터뷰가 아닌 몸짓인터뷰로 묻고 답했어. 이건 내 안무 리서치 기법이기도 해.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든 작품을 관객이 볼 때, 남의 일 보는 것처럼 느끼지 않고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다고 믿어. 연습 과정에서, 그리고 공연 중일 때에, 나는 함께 하는 관객들 그리고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피부로 실감하는 대화 속으로 진입하게 돼. 우리는 다 같이 예상치 못했던 응답을 마주하고, 위태로운 상황과 일상적인 상황을 연결하는 매우 유기적이고 섬세한 교량이 되곤 해.


그래서 말이야, 지난 7년간 천착한 이 이슈 위에 세운 한국에서의 <Gal-Gal>은 또 새로운 무엇인가로 전개되고, 지속될 거야. 영어로 여성(female)이라는 말은 남성(male)이라는 말도 포함하고 있잖아? 위기를 맞은 여성들의 ‘물결 된 상태’와 같은, 섬세하지만 강인한 무언가로 나아가길 바라. 안무가로서 나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정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매료되고, 모든 움직임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어.”


연습 사진, 사진 제공_BAKI

신파


그러고 보면 신파를 新波라고 쓸 수도 있겠다. 영어로 ‘new wave’, 프랑스어로 ‘nouvelle vague’, 포르투갈어로 ‘bossa nova’. 미술, 팝음악, 영화에서 시대에 따라 때로는 경멸적으로, 때로는 단지 새로움을 칭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이 용어를, ‘Gal-Gal’ 식으로 해석하면 나쁘게 볼 것도 아니다. ‘female’이 ‘-male’을 담고 있듯, ‘male’이 ‘fe-male’을 파생하듯, 큰 원을 그리며 새롭게 순환하는 신파를 상상한다. 파도가 높고 거셀수록 수평선은 더 침착하게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파트리샤 카롤린 마이(Patricia Carolin Mai)

현대무용 안무가, 독일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유럽과 세계 각지에서 활동

나인티나인아트컴퍼니(Ninety9 Art Company)

대표 안무가 장혜림, 한국 전통을 기반으로 다양한 창작과 협업을 하는 무용단

<Gal-Gal>은 2019년 12월 6일부터 7일 양일 간 서울 개포동 M극장에서 3회에 걸쳐 공연된다.

공연 트레일러


공연 포스터, 이미지 제공_나인티나인아트컴퍼니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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