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에서 건져 올린 정체성들 - 수잔 팔루디의 <다크룸>
수전 팔루디는 당대의 쟁점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치밀하게 파고든 페미니스트 작가다. 1980년대 신보수주의 미국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격과 여성혐오의 정치적 정동을 ‘백래시(backlash)’라는 단어 하나로 명쾌하게 간파했던 팔루디는, 2016년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탐색한 전기 <다크룸>을 출간한다.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인권 및 가시화는 2015년 동성결혼합헌 판결 이후 성소수자 담론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2010년대 이후 미국에서 트랜스젠더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케이틀린 제너의 커밍아웃과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트랜스젠더 배우 레이븐 콕스의 인권활동 등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었지만, 그만큼 혐오범죄의 빈번한 대상이 되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육상 10종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이후 크리스 카다시안과 결혼해 대중 미디어의 전폭적 주목을 받는 셀럽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는 2015년 텔레비전 쇼에서 커밍아웃하며 트랜스젠더의 가시화에 기여했다.
<백래시>(미국 1991년, 한국 2017년)에 이어 <다크룸>(2020년)이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것은 놀랍도록 시의적절하다. <백래시>가 집중조명 한 페미니즘 운동을 반격하는 반동적 흐름과 <다크룸>이 다룬 트랜스젠더 혐오 및 정체성의 담론 폭발이 미국에서는 약 30년의 격차를 두고 일어났지만, 지금 여기 한국은 이 두 문제를 압축적으로 동시에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혐오를 쏟아내면서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는 일명 ‘TERF(트랜스 배제 페미니스트)’들의 존재, 성전환 수술 이후 전역을 강요받은 변희수 하사, 숙명대에 합격했지만 반대하는 목소리에 결국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학생 사건 등 트랜스젠더 문제는 한국에서 인권과 관련된 역동적인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크룸>은 사회과학 서적이나 인권 관련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이미지’와 ‘이야기’다. <다크룸>은 정체성이 결코 한 번의 ‘인정’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시간의 지속 속에서 그것을 다양하게 배신하고 무너뜨리고 동화되었다가 초월하고 위장하고 조정하는 삶의 과정 그 자체라고 역설한다. 팔루디는 그러한 정체성과 관련된 다양한 맥락과 폭 넓은 스펙트럼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념 속에서 10년의 시간을 끈질기게 지켜보며 ‘낯설고도 친밀한’ 아버지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책은, 수전 팔루디의 어린 시절 군림하는 가부장으로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어머니와의 이혼 과정에서 폭력까지 저질렀던 아버지가 보낸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된다. 그 이메일에는, 백금발 가발과 하얀색 블라우스, 그리고 빨간 치마를 입은 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자신이 태국에서 성전환을 했고 이제 스테파니 팔루디가 되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공격적인 마초 맨을 가장하는 게 진절머리가 난다”며 “스테파니는 이제 진짜야”(24)라고 하는 아버지를 보며 수전은 의심과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자신이 알던 아버지는 그럼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수전이 발견하고 기록한 아버지는 좀처럼 진심을 알 수 없는 위장과 변신의 화신처럼 보인다.
트랜스여성이 된 아버지 스테파니 팔루디는 평생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꿔왔다. 유대인 이름인 이슈트반 프리드먼에서, 헝가리의 주류 민족인 마자르식 이름 이슈트반 팔루디, 미국식 남성 이름인 스티븐 팔루디, 마지막으로 미국식 여성 이름인 스테파니 팔루디까지. 이름의 전환은 거주와 정체성의 전환 과정이기도 하다. 그녀는 헝가리의 부유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이차대전을 겪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이차대전 후 여권을 조작해 스웨덴과 브라질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가족을 꾸리고 광고 패션사진을 전문적으로 보정하는 사진작가로서 성공한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헝가리로 돌아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찾는다. 이 과정은 당연하게도 매끄럽지 않다. 그녀는 매번 “헝가리인”으로서, “미국인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완전히 동화했음을 증명하고 ‘패싱’되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인 유대인, 헝가리인, 남성성을 지워버리려 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흔적 혹은 얼룩처럼 끈질기게 잔존한다. 그녀는 새로운 정체성을 ‘완벽하게’ ‘백퍼센트’ 구현하려 할수록 내적·외적 갈등과 의혹에 놓이게 된다. 그 ‘완벽한’ 여성, ‘완벽한’ 헝가리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당신은 나/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등의 질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선명하게 구분된 범주로 구성되지 않으며, 모순적이고 모호하며, 유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고, 시간의 지속 속에서 변화하는 ‘되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암실에서 빛의 노출을 통해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는 사진의 이미지, 그리고 이후 에어 브러쉬로 다시 삭제되고 감추고 보정되고 편집되는 이미지의 흔적들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나치들이 유대인 남성을 비하하고 낙인찍기 위해 ‘여성화’된 이미지로 그려온 역사 속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스테파니의 민족정체성은 젠더 정체성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편, 스테파니가 남성으로 살았던 과거는 딸인 수전과 ‘아버지’로서 관계를 이어가는 한 여성으로 정체화한 지금도 현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스테파니는 ‘여성’이 되었다고 선언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여성이라고 인정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한다. 처음에는 하녀복장이나 메리제인 구두 같은 ‘소녀스러운’ 의상을 입었던 스테파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옛 수행을 진짜 여성이 아닌 역할 놀이로 취급한다.
페미니스트인 수전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약하고 보호받는 여성성’의 수행도 점차 변화해 간다. 수전의 트랜스 친구가 말했듯이, 시스젠더 여성도 여성이 되는 길이 무수하듯, ‘트랜스여성이 되는 길도 수만 가지’인 것이다. 성전환과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은 ‘남자였던 과거 사진’과 ‘여자인 현재 사진’ 두 장의 비교로 다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셀 수 없는 갈등, 의심, 의혹, 실패, 서투름, 호기심, (불)만족, 탐구, 모험 등이 있다.
<다크룸>이 무엇보다 탁월한 것은 정체성이 다양한 정체성의 교차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와 감각의 교차로 구성된다는 것을 수전과 스테파니의 직업적 특징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사실이다. 기자인 수전은 언어를, 사진작가인 스테파니는 사진을 선호한다. 언어 텍스트로 소통하려는 딸과 시각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아버지 간의 경합이 발생한다. 시각적 이미지는 즉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존재함의 감각을 요철화하지만, 언어에 비해 맥락과 역사적 정보가 탈각된다. 그래서 시각 이미지는 오히려 불투명하고 모호하다.
유대인과 트랜스젠더는 시각성에서 생존을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던 역사가 있다. 반면, 낙인찍는 사람들은 신체적 외양에서 정체성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숨긴 것에 대해 비난한다. 속임수, 사기, 가장, 감추기, 비밀스러움은 유대인과 트랜스젠더들을 비난하고 비하하기 위해 늘 붙여왔던 낙인이었다.
그러나 스테파니가 이차대전 때 나치의 완장을 차고 위장을 해 부모와 친척의 목숨을 구했을 때 그녀는 영웅이었다. 왜 어떤 위장은 영웅적인 일이 되고, 다른 위장은 혐오와 반-진정성의 대상이 되는가? 수전은 아버지가 오래 전 미국에서 동네의 자원 구급대원으로 일할 때 갖고 있던 제복을 헝가리에서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며 “옷과 구원, 완장과 구출의 이 이본 합성은 도대체 무엇일까?”(346)라고 질문한다. 스테파니에게 정체성의 탐구인 옷은 힘의 발현이자 자기를 포함한 타인을 구출했던 영웅으로서의 경험과 연계된다.
그러나 수전 팔루디는 정체성을 무한하게 찬양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하지 않으며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그리고 때로는 나와 타자를 속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질성과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삶들이 지닌 다양한 서사를 듣지 않으면, 정체성은 언제든 억압이 될 수 있다. 팔루디는 번역자인 손희정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체성은 해방과 억압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곳곳과 미국에서, 그리고 아마도 한국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동질적이고 ‘배타적인’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타자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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