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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산수화의 로직, 이미지라는 행위자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9일

1.1

얼마 전 창간된 서평지 교차 1호(<지식의 사회, 사회의 지식>)에 궁금한 글이 두 편 실려 반갑게 펴보았다. 한 편은 [숲은 생각한다] 서평으로 유익한 정보를 얻었지만 좀 이상한 글이었다. 군데군데 마무리가 안 된 듯 보였는데, 비난 대신 이상하다고 잔잔히 표현한 이유는 전체적으로 깊이나 폭이 나름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웠다.

1.2

또 한 편은 피터 갤리슨의 [상과 논리: 미시 물리학의 물질 문화]를 평한 글 「이미지 전통과 논리 전통의 만남」이다. 책의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입자물리학의 역사를 쓴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주제를 다룬 여느 책들과 사뭇 달리 “대칭성과 고급 이론의 설명과 예측으로 시작하지 않으며, 위대한 수수께끼와 실험을 둘러싼 논쟁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교차 1호 p.289) 대신 입자 물리학에 필수적인 실험 장치를 제작함에 있어 어떤 물질 문화가 깔려 있는지를 탐구해간다. 갤리슨은 이 물질문화가 “이미지 전통과 논리 전통”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이미지 전통은 검출 장치에서 어떤 과정이 일어나고 있는지 시각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는 전통이다. 여기에서 주된 관심은 궤적이 어떻게 휘어지며 희미해지거나 교차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논리 전통의 “핵심은 전기 신호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계수하고 그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처리하는 것과 관련된다.”(교차 1호 p.298-299)


Art and Cosmotechnics 표지


2.1

미시 물리학사를 물질 문화의 견지에서, 그것도 이미지 전통과 논리 전통이라는 두 줄기를 따라 기술했다는 점이 신선하다. 한편, 다른 의미에서 이보다 더 신선한 접근법을 구사하는 저자들도 있다. 이미지를 이미지라 자명시하지 않고 그 핵심에 논리가 있다는 육후이의 책이다. 그의 2021년 신작 <Art and Cosmotechnics(예술과 우주기예)>를 펴면 (세잔과 클레의 그림도 있지만) 산수화가 여러 폭 널려 있다. 표지 디자인부터가 산수를 도식화한 것이며 속지 초반에는 마린(馬麟)의 산수화 <Scholar Reclining and Watching Rising Clouds>(이거 한문 제목을 영역한 걸텐데, 뭔지 못 찾겠네 ㅠㅠ)가 걸려 있다. 다음 페이지엔 노자 <도덕경>의 저 유명한 첫 가름의 전문(“도가도 비상도...”로 시작하는)이 영역문과 한문 원문으로 실려 있다.

2.2

육후이는 현재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세계를 지배하고 이 추세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을 변경하고자 한다. 특히 서구의 테크놀로지가 기술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전 세계를 획일화해간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대안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이 창발되는 것이고, 이를 촉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산수화다.

2.3

서양 과학기술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가 있고, 거기서 우리는 비극의 로직을 발견한다(그리고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유기체론의 로직으로 전환된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중국의 산수화다. 뭐라고? 또 그 100년도 더 된 동도서기(東道西器)나 중체서용(中體西用)인가? 서양은 한낱 기술인데 동양은 심오한 정신이고, 서양은 말단의 용(用)이고 동양은 본체라던 그 낡은 얘기? 비슷하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는 산수화가 단지 감성, 이미지, 정신 같은 것에만 속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기술문명과는 동떨어지거나 반대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수화는 분명 이미지의 세계지만 거기에는 도(道)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그 도의 논리는 현(玄)의 로직이라는 게 매혹 포인트다.

2.4

먼저 서양쪽 얘길하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이렇게 쓸 수 있는 거 보면, 우리도 서양 사람 다 된 거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신화 및 정념의 시대에서 아폴론적인 이성 및 국가의 시대로 넘어가던 이행기에 격렬한 긴장이 초래되었다. 운명의 필연성과 인간 자유의 우발성의 대립을 포함해, 국가의 법 대 가족으로서의 의무의 대립(「안티고네」), 운명 대 의지(및 지성)의 대립(「오이디푸스」) 등등. 이러한 양자 대립은 화해 불가능한 것이었고 오직 영웅이 등장하여 필연(및 고통)을 운명으로 용감하게 받아들이고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극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육후이에 따르면 이것이 비극의 로직이다.

2.5

서양의 경우 대립은 모순이 되고 이 모순은 화해를 요청하지만, 동양의 경우 모순은 그 자체가 도의 표현이다. 바로 도가의 세계다. [도덕경] 40째 가름에 나오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좀 현대적으로 번역하자면 “그 반대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도의 동역학이다(Turning back is the dynamics of Dao).” 그리고 이 도에 깔린 것이 아까 말했듯이 현의 로직(논리)다. [도덕경] 첫째 가름에 나오는 현지우현(玄之友玄)을 보자. 보통 “가물고 가물토다”로 번역되는 대목이다. 육후이는 원문을 ‘현지우현’이 아니라, 1990년대에 발견된 죽간에 적힌 대로 “현지유(우)현지(玄之有(友)玄之)”로 채택한다. 이렇게 되면 두 번 들어있는 “玄之”의 ‘玄’은 형용사나 명사보다는 동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玄之有(友)玄之”의 뜻은 [밝음(존재)을] “어둠(비존재, 무)으로 화(化)하고 또 어둠으로 화한다”는 뜻이 된다.

2.6

사계절을 예로 말해보자. 겨울은 봄이 되고, 봄은 여름으로, 여름은 가을로 되었다가 다시 겨울, 즉 무로 돌아간다. 이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을 우리는 ‘현지우현지’의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는 간략성을 위해 현(玄)을 ‘어둠’ 혹은 ‘무’ 혹은 ‘무화’라 번역했지만, ‘알 수 없음’(the Unknown)이라는 의미가 아울러 들어 있다고 이해해주기 바란다. 아~ 내가 동양철학 전공자도 아닌데, 육후이가 영어로 쓴 텍스트를 읽고 이런 얘길 정리하려니 몹시 후달린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중국(넓게는 동양)의 산수화를 이미지나 정신, 혼 같은 쪽으로 몰고가지 않고 로직의 차원으로 해석한다는 게 퍽이나 흥미롭지 않냐는 거다. 관심있는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거나 아니면 얼른 좋은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원해주시기 바란다. 책은 쉽진 않지만 무지 흥미진진하다.

3.1

원래는 스트래선의 [부분적인 인공물들](오월의봄)에 나오는 독특한 이미지론도 꽤 자세히 쓸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서 간략하게밖엔 못 쓰겠다. 우선 박물관 같은 곳에 전시되는 유물을 떠올려보시라. 유물은 어떻게 연구되고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막 생각해보자면 전문가들에 의해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고 어떤 양식과 용도의 유물인지가 연구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회의 사회문화를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연구한다. 대략 이런 정도일 것이다. 한데 스트래선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곧 유물이라는 이미지물의 행위자성이다. 이게 무슨 소린지 럭비공에 비유해서 얘기 해보겠다.

3.2

사람들은 럭비공을 가지고 럭비 경기를 한다. 양팀은 여러 작전을 구사하며 경기를 벌인다. 사람이 행위자고 럭비공은 수동적인 물건일 뿐이다. 한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 경기의 진행 과정은 럭비공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세게 튀느냐에 따라서도 크게 규정된다. 이런 점에서 럭비공은 매우 비중이 큰 행위자다. 한편, 럭비공과 사람들이 맺는 관계가 되풀이되는 끝에 럭비공과는 다른 공이 창출된다. 거북이 등모양에 발로차는 축구공과 훨씬 작고 가벼운데 딱딱한 채로 후려치는 탁구공 등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 유형의 공이 다른 유형의 공들을 낳고, 이 종목이 다른 종목들을 낳는다.

3.3

공은 분명히 무생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은 능동적 행위자가 아니고, 기껏 의미가 있다 해도 사람들의 행위나 제도나 관습 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물건이라고만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방금 전 말한 것처럼 다른 측면들 또한 실제로 작동한다. 그래서 공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문화나 관계, 자본주의의 역사 등을 설명하고 기술할 수도 있다. 공이라는 이미지물이 인간의 다른 구조와 제도들을 낳거나 강력한 작용을 한다.

3.4

인류학자의 중요한 주장을 직접은 한톨도 말하지 못하고 럭비 얘기만 해서 챙피하다. [부분적인 연결들]이라는 책이 비록 엄청 강력하지만 꽤나 어렵기 때문에 나로서는 불가피했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어려운 게 아니라, 너무나 리얼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랄까). 단아한 문체로 번역도 나와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구매해 반복 독서해보시기 바란다. 끈기있게 읽어나가 절반을 넘어가면 신체, 이미지, 인공물들이 때로는 앉은 자리에서, 또 때로는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며 세계를 만드는 광경을 직관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철학들이 드라이한 언어로 얘기하는 사물의 세계, 플랫한 존재론의 세계와도 심히 닮았다.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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