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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사랑하려고 태어났어요 / 김동규

어찌 보면 생일날 기억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은 그날 태어났던 사람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고생한 어머니다. 그런데도 매년 자식의 생일날마다 어머니는 미역국 끓여 잔칫상 차리고 선물 마련하느라 생고생을 이어간다. 잔칫상에서 멀찌감치, 그리고 물끄러미 서 계신 어머니를 자주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은 먹먹하고 막막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랑은 영락없이 내리사랑이다. 내리사랑을 갚는 방법이 내리사랑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면, 성인인데도 어머니 역할을 맡지 않으려는 이들은 파렴치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뜻도 없이 아이는 태어났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어쩌면 우리는 그저 세상에 내던져졌다. 그 내던져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탄생을 축하하는 생일 의례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얼까?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 혹은 고해(苦海)라고 표현될 정도로 살기 힘든데, 왜 때가 되면 주기적으로 한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걸까? 사는 동안만큼은 어쨌거나 삶에 대한 긍정이 필요하기에 만들어진 장치일까? 아무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어느덧 생일 파티는 무심코 따르는 습관이 되었다.


전에는 친한 친구들끼리는 장난삼아 생일 축하곡을 개사해서 노래 부르기도 했는데, 가사가 아주 짓궂으면서도 철학적이다. “왜 태어났니 / 왜 태어났니 / 공부도 못하는 게 / 왜 태어났니.” 특별히 3번째 소절은 ‘인구도 많은데’, ‘얼굴도 못생긴 게’, ‘밥만 축내면서’, ‘어차피 죽을 걸’, ‘이 험한 세상에’ 등으로 변주되기도 했다. 듣는 이가 불쾌할 수 있기에, 막역한 친구들끼리만 불렀던 노래다. 생일날 왜 태어났냐고 묻는 친구들의 질문은 장난인 줄 알면서도, 까맣게 잊고 있던 실존적인 고민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도대체 난 왜 태어났을까?’ 요즘 젊은이들도 이 노래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졌다면 조금 섭섭할 것 같다. 생일날조차 생의 의미를 묻지 않고 지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탄생의 반대편에 있는 죽음 의례를 소재로 삼고 있다. 국가반역자인 피붙이의 매장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의견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크레온은 왕으로서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한다. 조카라고는 하지만 옆 나라 군대를 끌고 들어와 자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를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크레온은 조카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한다. 들짐승의 먹잇감으로 사체를 방치한다. 이렇게 왕의 명령(국법)으로 금지했음에도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매장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날카로운 설전이 오간다. 이 비극의 압권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논쟁 장면이다.

크레온: 그래도 착한 이에게 나쁜 자와 같은 몫이 주어져서는 안 되지.
안티고네: 하계에서는 그것이 신성한 규칙인지 누가 알아요?
크레온: 적은 죽어도 친구가 안 되는 법이지.
안티고네: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났어요.
크레온: 사랑해야겠다면 하계로 내려가 사자들을 사랑하려무나.

크레온은 국가의 주권자로서 정의를 대변한다. 그에게 정의란 선악(善惡) 혹은 친구와 적을 분별해서 친구에게 이롭게 하고 적에게 해롭게 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지상에서의 삶은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지탱된다. 반면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법이 유한하고 잠정적인 의미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유한한 인간이 만든 결함투성이 법이다. 그런 법보다 더 견고한 법을 ‘신성한 규칙’이라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이야말로 대표적인 신성한 규칙이다. 이처럼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를 신법에 의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신법,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은 한마디로, ‘사랑하라’라는 것이다. 지고한 이 법은 탄생의 의미까지 말해준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이의 사체를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장례를 치러주어야 한다. 이것이 삶의 의미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안티고네가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정당화하자, 크레온은 국가를 위해 폴뤼네이케스와 싸우다 죽은 쌍둥이 형제 에테오클레스는 어떻게 되는 거냐며 공박한다. 크레온은 자신이 죽은 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자신만이 죽은 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독단은 언제나 위험하다. 망자의 목소리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레온이 왕의 권한을 내세우며 자기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한 마디 쏘아붙인다.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사막에서 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권력의 정당성 역시 궁극적으로는 타자와의 사랑 관계에서 나온다. 사랑은 정의에 앞선다. 사랑의 광기는 합리적 정의에 우선한다. 사랑 없는 자기 정당화는 독선일 뿐이다. 사랑하려고 태어난 인간에게는 그렇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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