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여러모로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다. 책이라는 게 본시 문자들이 조합된 종이 묶음이자 다양한 자연적, 역사적 사실과 상상 및 아이디어들이 ‘합성’된 세계인데, 그런 책이 특이하게도 ‘분해의 철학’을 설파한다. 그것도 매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이다. 이 글에서 나는 책의 논지에 의거해 그 책을 다시 분해하여, 그 매력에 가려진 허점(虛點)을 밝혀낼 심산이다.
책의 저자는 일본의 역사학자 후지하라 다쓰시 교수다. 역사학자가 ‘철학’이란 낱말을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게 무안했던지, 아니면 단순히 겸양의 제스처로 부담감을 덜어내려고 했던 것인지, <후기를 대신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학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운 사람이 ‘철학’ 같은 무서운 말을 책의 제목으로 내건다는 것이 솔직히 지금도 망설여진다. 단, 그 말이 걸려 있는 것은 오직 세이도샤의 무라카미 루리코 선생이 그 말을 내걸지 않기를 계속 거부했기 때문이다(360-61쪽).
철학이란 말은 원래부터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철학을 전공한 전문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역사학자도 쓸 수 있고 생물학자도 쓸 수 있다. 아니 학문과 무관한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낱말이다. 그 말(philo-sophy)의 본뜻이 ‘앎을 사랑하고 사랑을 아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앎을 사랑하고 사랑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이란 낱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은 결코 ‘무서운 말’일 수 없다. 출판사의 강요에 의해 책 제목이 정해졌다고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앞선 인용문이 그냥 가볍게 지나가는 말로 내뱉은 게 아니라면? 저자가 정말로 철학에 공포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공포는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우선 대충 짐작해 보면, 어느 지점에서 앎을 사랑하는 일 혹은 사랑 배우기를 중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전에 막막하고 한없이 이어진 철학의 길이 야기했던 공포였을 것이다. 이것이 본 서평의 기본 가정이자 비판의 준거점이다.
앎을 사랑하는 일에서만큼 후지하라는 단연코 철학자다. 그의 지적 촉수는 전방위적으로, 소위 오타쿠식 학문의 벽을 허물고 학제 연구 방식으로 다양한 데이터들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 블록을 쌓고 허무는 어린 아이, SF 소설 속의 로봇, 그릇의 깨진 곳을 옻칠로 접합하는 금수선 장인, 연어와 소똥구리 같은 동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분해와 연관된 지식을 그러모았다. 그것도 치밀하게 연관지점을 찾아 의미론적인 경첩을 달아 두었다. 그래서 ‘분해’에 관한 지식을 아름답게 ‘합성’했다(미묘한 역설). 마치 일전에 포스트모더니스트 혹은 해체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지식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저자가 자긍심을 가지면 가졌지 공포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철학의 또 다른 의미, 곧 사랑을 배우는 일에 있을 테다. 철학에서도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김수영)이다. 좁혀 말하자면, 문제는 분해 관련 지식을 집적한 그의 ‘열정의 정체’에 있다. 분해를 생산이나 소비에 앞선 것으로 두면서, 아니 (삶에 앞서는) 죽음을 지고의 것으로 설정하면서, 그는 사랑이 위태로워진 것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한 듯 보인다. 혹시 여기가 공포의 진원지는 아닐까?
후지하라는 분해 못지않게 나치에 관심 있는 학자다. 분해 철학과 나치는 생태학적 세계관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나치는 이전 어느 집단보다도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했다. 분해 개념의 본바탕은 생태학적인 것이기에, 그의 초미의 관심사는 분해 현상으로부터 나치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분해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나 과학기술문명을 비판하는 일은 (반자본주의와 생태주의를 천명했던) 나치즘을 비판하는 일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수월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내 눈에는 저자가 나치즘 비판을 하다 만 것처럼 보인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말, 즉 “잔혹하다고 눈을 가린 그 손을 한 번 더 뿌리치면서 장치가 초래하는 잔학함과 분해가 초래하는 철저함의 차이를 판별하는 것이 분해 세계의 담당자가 되는 첫걸음”(358쪽)이라는 말은 장치, 곧 자본주의나 과학기술 시스템을 겨냥한 것이지, 나치즘을 직접 겨냥한 게 아니다. 물론 분해의 연관어들에 찍힌 하켄크로이츠 낙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치즘과 협정을 맺지 않는 생태학적 앎이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 하지만 나는 생태학과 철학을 합일시키는 과제의 성패가 분해 현상을 어떻게 하나의 중앙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한 명의 지도자로 환원되지 않도록 그려내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한다(276쪽).
분해 현상을 하나의 중앙, 목적, 지도자로 환원시키지 않는 비환원주의, 이것이 저자가 꼭 쥐고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다. 그것이야말로 분해 철학이 나치라는 블랙홀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 듯하다. 그는 나치즘을 차단하기 위해 분해 현상을 생산/소비에 앞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삶보다도 선행하는 죽음으로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삶은 죽음에 속한다”(354쪽)고 주장한다. 환원을 막기 위해, 저자는 서둘러 죽음의 무(無)로 직행한다. 성급히 빈 중심을 만든 것이다.
죽음과 밀접해진 분해는 “선악의 저편”(349쪽)에서 자연과 인간사를 지배하는 최종 법칙이 된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처럼 말이다. 그런데 실상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선악은 물론이거니와 삶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갓 물리의 우연적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치즘의 오명을 뒤집어쓸까 봐 지레 겁먹은) 분해 철학의 최종 결론은 무엇일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어 죽이는’ 일의 연쇄라고 하는 유동적인 축제 속에서만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물어뜯고 깨물어 죽이는 능력에서 동물들에게 승산이 없는 인간 사회에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동물에게서 배워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358쪽).
동물에게 ‘물어 죽이는’ 일을 배우자는 말일까? 먹기(食)의 의미를 풍부하게 재해석하긴 했어도, 어떻게 이런 해괴한 결론이 유도될 수 있을까? 대표적인 분해자, 미생물에게서 고작 배울 게 그것뿐일까?
미생물은 지구상의 첫 생명체이자 마지막까지 생존할 가장 유력한 생명체이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미생물을 하나로 뭉쳐 놓으면(다세포 생명체처럼) 아마도 최강의 포식자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미생물은 사실상 먹이사슬의 시작과 끝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분해자 미생물은 지상의 모든 비생명체와 생명체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저자가 말하고픈 분해의 힘(작용)을 이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물어 죽이는 모습만을 보고 배운다면, 단언컨대 분해의 철학은 나치즘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나치즘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엉거주춤하기만 하다.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었지만, 후지하라의 주장은 일본 전통의 ‘죽음의 미학’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전승된 과거를 기억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던가. 대표적으로 구상도에 대한 그의 기술(記述)은 지극히 탐미적이고, 현대적(생태학적)이다. “흰 기모노를 입고 벚꽃이 흩날리는 들판에 방치된 여성의 사체는 검푸르게 변하고 부풀어 오른다. 살갗이 터진 곳에서 고름이 흐르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벌레가 끓는다. … 구상도는 어느 것이나 대개 이런 과정을 밟게 되는데,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죽음의 고요함이라기보다는 꽃, 풀, 나무, 개, 새, 구더기 등의 생물들이 제멋대로 떠들썩하게 벌이는 활동의 연쇄다(49쪽).”
애니미즘과 탐미적인 죽음 더 나아가 ‘죽임’을 미화하는 일본 문화, 특히 가미가제와 731부대 생체실험을 낳은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과연 분해의 철학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랫동안 나치를 연구한 저자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선 (최소 이 책에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이 물음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나치즘 비판이 철저하지도 진정성 있지도 못한 데에는 자신이 속한 전통을 통절하게 성찰하지 못하고(선별 과정을 통해 몇몇은 아예 외면하고) “분해라는 말에 홀리게 된”(359쪽) 그 ‘사랑’을 분해해 깊이 성찰하지 못함으로써, 생태주의와 뒤엉킨 나치즘으로부터 충분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생각처럼 삶은 죽음에 속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삶에 속한 것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미지의 사랑에 공속(共屬, zusammengehören)한다. 사실과 당위,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만나야만 한다면(평소엔 자율성을 유지한 채 떨어져 있는 게 좋지만), 우리가 자연에서 찾고 배울 점은 바로 ‘사랑에의 공속성’이다. 후지하라 교수는 에코시스템에서 자연의 사랑을 좀 더 배워야 했다. 명실상부한 분해의 ‘철학’이 될라치면, 사랑의 폭을 둘러싼 종중심주의(speciesism)나 인간중심주의 문제에서 쇼부(勝負)를 보아야 했다. 거기야말로 생태주의 집에 파고든 대마(大馬), 나치즘을 잡을 수 있는 착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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