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퇴근 후 저녁을 함께 먹으며 우리는 서로의 하루에 대해 복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 또한 중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대화의 가장 주요한 주제 중에 하나는 바로 학생들 간의 갈등이다. 모든 충돌이 그러하겠지만, 아이들의 갈등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띤다. 우발적인 사건일 수도 있지만 몇 년에 걸친 끈질긴 악연일 수도 있고, 사귀다 지저분하게 헤어졌지만 그럼에도 같은 반에서 하루 종일 대면해야 하는 난감한 경우도 있다. 때로 다툼은 학원을 매개로 여러 학교를 걸치기도 하고, 온라인에서 게릴라전의 양상을 띠기도 하며, 빈번하게는 부모들 간의 대립으로 확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새 학교는 송사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최근에 한 학생이 욕설과 음담패설로 다른 학생을 괴롭히고 있어서 문제다. 선생님이 없을 때를 틈타 큰 소리로 들볶는데, 아마 이러한 의도적인 폭력의 전시는 반 전체에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본인이 학급의 주도권을 끌고 가기 위함일 것이다. 분위기가 한번 망가지면 쉽게 복구되지 않고 학업 성취에도 타격이 크기 때문에, 선생님 입장에서는 고충이 크다. 피해 학생은 개인 면담 시간에 괴로움을 토로했다. 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어쩌면 자신에게 정말로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피해 학생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바라지만, 참아내기 그리고 이후에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괴롭힘에 저항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보복을 한다면, 쌍방 폭행으로 학교폭력 위원회에 나란히 회부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조언은 대략 다음과 같다. “OO이는 아무 잘못 없어. 그런데 만약 너도 언어적, 신체적으로 되갚아주려 한다면 그 친구와 똑같아지는 거야. 일단 가급적 그 친구를 피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해. 선생님도 그리고 부모님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도와줄게.”
그럼에도 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다. 학교에서는 학폭위를 통한 징계로 피해 학생을 보호하려 노력하나, 문제는 가해 학생들이 처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가해 학생도 여전히 교육의 대상이기에 교육 기회를 박탈할 처벌은 매우 신중하게 내려져야 하고, 따라서 최고형인 강제전학이나 퇴학이 선고되기 전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는 피해 학생과 상담하면서도 마음 한편의 불편함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피해 학생을 짓누르는 무력감을 해소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방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하고 학교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학생 스스로가 폭력에 맞서 대응할 권리를, 응징의 권리를 지닌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인류의 역사는 복수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문명 이전의 먼 과거에서부터 법률을 통한 공적 해결을 추구하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현대의 몇몇 문화권에서도 여전히 복수는 주요한 사회적 규칙으로 기능하고 있다. 나 혹은 나의 가까운 사람이 해를 당했는데 보복하지 않는다면 명예롭지 못한 자로 간주되었고, 관계없는 제삼자가 대신 응징하여 명예를 얻기도 하였으며, 복수를 권장하지 않는 사회일지라도 범죄의 이유가 복수라면 감형을 해주었다.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어린아이와 함께 놀이를 해보았다면, 어린아이의 복수심이 얼마나 강렬한지 느껴보았을 것이다. 내가 하나를 취하면 아이는 기필코 하나 이상을 뺏으려 하고, 서럽게 울다가도 앙갚음에 성공하면 곧바로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어린아이와 동물들의 복수심에 관련된 수많은 연구들을 보면, 마치 복수심이 인간 본성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복수의 서사는 강한 흡입력을 지니며 소설,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인터넷에서는 기본적인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는 ‘빌런’들에게 ‘참교육’을 했다는 다양한 이야기가 썰의 형태로 무수히 퍼져있다. 그 빌런들이 참교육을 통해 도대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이러한 대중적 유행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더 이상 복수에 의존하지 않는 까닭은, 복수가 그 자체로 자의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며, 가장 주요하게는 증오의 연쇄를 낳기 때문이다. 복수의 파괴적인 나선형적 고리를 끊지 못하면 그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고 갈등은 세대를 넘어가며, 때로는 민족이나 국가 단위에서 폭력이 발생한다. 연쇄적으로 얽힌 갈등 속에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없기에, 해결은 더욱더 요원해지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바로 이 폭력의 연쇄를 예방하기 위해 종교문화가 탄생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렇듯 복수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럼에도 복수가 최초의 폭력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폭력이자 악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최초의 폭력이 야기한 손해를 청구하는 폭력이며, 분명히 일정 방식으로 ‘교정적 정의’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를 모욕하고 폭행한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신체를 나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훼손한 것이다. 만약 이때 내가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면, 나는 스스로를 모욕받을 만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반대로 내 인격이 당신의 폭력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는 저항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 때로 어떤 메시지는 폭력적인 방식으로만 전달되기 때문이다. 나의 폭력은 최초의 폭력과 달리, 내가 입은 부당한 손해를 교정함으로써 일정 부분 정의를 실현한다.
이 지점에서 복수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출애굽기 21:23-25)라는 표어로 공적 질서 안에 포함될 수 있었으며, 이를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이라 한다. 상대방이 눈을 잃었으면 마찬가지로 내 눈도 뽑아버리겠다는 원시적인 법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터무니없으나, 그럼에도 나에게 ‘역지사지’의 태도를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폭행으로 누군가를 장님으로 만들기 전에, 나는 나 자신의 두 눈 또한 터트릴 각오를 해야만 한다. 장담컨대 그 누구도 섣불리 주먹을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이란은 오늘날까지도 키사스 율법에 따라 동해보복법을 집행한다. 타인의 눈을 실명시킨 가해자들에 대해 법원은 전신마취 후 눈을 도려내거나 염산 방울을 떨어트린다.)
같은 맥락에서 칸트와 헤겔이 복수를 법철학적 맥락에서 형법의 정당화 이론으로 확장했다는 사실을 짚고 싶다. ‘응보이론’이라 불리는 이러한 관점은 범죄자에게 범죄 행위에 상응하는 해악을 돌려주는 것이 형벌의 본질이라고 이해한다. 어찌하여 범죄자에게 해악을 돌려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헤겔의 논변은 매우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형벌은 범죄자에 대한 존중이자 인정이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자유의지에 입각한 행위를 통해 어떤 추상적인 법을 세운다. 예컨대 사람을 살해할 때, 그는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법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서 단지 주관적으로만 존재하는 이 법을 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실현하려 한다. 즉 범죄는 외적인 강제를 통한 개별의지의 자기 관철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범죄자가 인정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법칙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법칙이 범죄자 자신에게서 실제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완전한 실현은 무엇보다 자기실현이기 때문이다. 법원은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법칙을 범죄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그의 법칙이 합당하고 그가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최대한 존중한다. 다시 말해 형법이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네가 한대로 너도 당해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의 의지와 신념을 인정하며 그것이 너에게서도 실현되도록 돕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복수, 보복이 독일어로 Wiedervergeltung인 것은, 범죄자가 타인에게서 타당하게 만든(ver-geltung) 주관적인 법칙을 범죄자 자신에게로 다시금(wieder) 타당하게 만든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렇게 복수는 법의 공적인 매개를 통해 범죄자에 대한 존중으로 고양되며, 범죄자는 상응하는 형벌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법과 화해하고 동시에 용서받는다.
물론 복수를 삶의 적극적인 원리로 채택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산상수훈(마태복음 5:38-44)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인류의 문명이 복수가 아닌 용서와 사랑을 근간으로 삼기에, 우리는 파괴적인 증오의 연쇄를 끊고 구성적인 사회 질서를 이룩할 수 있었다. 용서가 복수보다 더 우월하고 강력함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가 고통을 넘어 상처와 새로이 관계 맺는 인간의 무한한 행위인 만큼 도달하기 어려운 단계이며, 따라서 피해자에게 섣불리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허울뿐인 용서는 문제의 외면에 다름 아니며 그저 악의 존속과 증식만을 돕기 때문이다.
그보다 어쩌면 우리는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방식을,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좀 더 배워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통받고 있는 친구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최초의 폭력에 저항하는 폭력은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 어떤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가해자들이 개의치 않을 징계를 위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무력감에 휩싸일 뿐이다. 또한 정당한 저항을 쌍방 귀책으로 동등하게 간주하는 한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 방관자로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가해 학생은 되돌려받은 폭력 속에서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받기를 바란다. 그가 타인의 인격과 신체를 훼손하는 한, 그 또한 필연적으로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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