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히 펼쳐지고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 최엄윤
- 한국연구원
- 2일 전
- 4분 분량
세상에 나오기 전, 양수 속 시간을 상상하면 외부 세계에 귀 기울인 태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탯줄을 통해 양분이 전해지고, 영글고 영글어 마침내 세상에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다정하게 말 걸어오는 소리에 귀 쫑긋하는 모습은 상상이거나 태곳적 기억일 것이다. 소리가 만드는 이미지가 얼마나 크고도 먼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경험하며 자랐다. 매일매일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명령어 하나만으로도 뚝딱 원하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요즈음, 작은 서점이나 취미 모임으로 낭독회와 낭독극 등의 소식을 종종 접한다. 낭독이 유행하는 건 아마도 고독한 사람들이 많아져서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나의 경우 출판사나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듣는 밤이면 세상과 연결된 기분을 느끼며 위로받을 때가 있다. 이웃과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의 무릎 위에서 잠드는 아이처럼, 보지도 않는 TV를 켜 놓고 잠드는 할머니처럼.
양손프로젝트 : 경이로운 신체와 아름다운 텍스트
올해 들어 양손프로젝트의 작품을 몇 편 보게 되었다. 양손프로젝트는 연출 박지혜, 배우 손상규, 양조아, 양종욱이 작품 선택과 창작의 과장을 함께하며 미니멀한 무대, 독창적인 방식으로 연극 문법을 탐색해 왔다. <한중일 단편선-한 개의 사람>, <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 <김동인 단편선-마음의 오류>, <현진건 단편선-새빨간 얼굴> 등 단편소설을 무대화해 온 양손프로젝트의 공연은 배우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텍스트에 집중하여 관객들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2025년 2월에는 국립극단 기획초청 “현존, 고전, 인간의 존재양식”이라는 테마로 모리스 마테를링크 『파랑새』와 알베르 카뮈 『전락』을 공연했다. 3월에는 전시 공간 피크닉의 기획 “사무엘 베케트 x 양손프로젝트”로 낭독극 <엔드게임>, <행복한 날들>, <독백한마디 &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를 공연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 알베르 카뮈, 사무엘 베케트는 작품의 독창성과 언어의 아름다움, 주제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이다. 시각 장치 없이 오롯이 배우의 신체로 펼쳐 보이는 양손프로젝트의 공연을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문학의 세계를 깊숙이 만나고 풍부하게 여행하다 온 기분을 느끼게 된다.

1906년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6막 12장의 희곡 『파랑새』를 완성했다.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뮤지컬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상징이 된 『파랑새』에는 주인공 틸틸과 미틸을 비롯해 동물과 물, 불, 빛, 잠, 어둠, 전쟁, 빵, 나무, 행복, 공포 등 오감으로 만나고 느끼는 모든 것이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한다.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가 연출하고 양종욱과 양조아가 구현한 공연 <파랑새>의 무대 위에는 가벼운 의자 두 개 뿐이다. 청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두 배우가 천천히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보이지 않는 희곡의 해설과 지문을 말해주고, 대사에 리듬을 입혀 주고받고, 작은 손짓과 간단한 몸짓, 표정으로 틸틸과 미틸이었다가 물, 불, 빛, 빵, 설탕, 개, 고양이, 나무, 할머니, 동생 등 쉼 없이 변화하며 모든 캐릭터로 살았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음률을 입힌 언어는 분절되어 낯설어지고, 강하고 약하게, 진하고 연하게 바림했다. 양종욱과 양조아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소리의 경이로움과 최소로 작아졌다 최대로 부풀어 오르는 몸으로 파랑새를 찾아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숲 속, 공동묘지, 행복의 정원, 미래의 나라까지 꿈의 여정을 떠났다가 부모님과 살고 있는 오두막집으로 되돌아온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진실이 존재하고, 다른 눈으로 사물과 존재를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가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음의 메시지를 담은 『파랑새』가 언어적 이미지를 구현한 양손프로젝트의 낭독을 만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무언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대화에서 독백으로, 재현에서 낭독으로
<파랑새>가 무한으로 확장되는 연극이었다면 베케트 작품 낭독극은 한 점으로 점멸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배경이 좁거나 폐쇄된 공간이기도 하지만 시작과 끝이 모호한 무한 반복의 굴레 속에서 소통의 단절과 부재, 고립은 존재의 무의미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으로 무력한 인간 존재들이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 그에게 연극은 몸짓, 무대, 조명, 소리의 비언어적 수단으로 ‘지금-여기’의 시공간에서 전개되다가 소멸하고 다시 반복되는 부조리 체험 그 자체로 언어는 의미를 잃고 재현을 위한 무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피크닉의 지하 공간, 유리창에 반사되는 조명과 창 너머 보이는 늦저녁까지 불을 켠 빌딩의 작은 상자 같은 사무실들, 그 풍경을 등지고 펼쳐지는 <엔드 게임>과 <독백 한 마디 &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의 무대 역시, 창백한 조명 아래 의자 혹은 작은 책상이 전부였다.

『엔드게임(1957)』은 시력을 잃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가혹한 게임을 끌고 가는 함(Hamm)과 그를 떠나고 싶지만 끝내 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멈춰 선 양아들 클로브(Clov), 각자의 쓰레기통에서 최소한의 음식과 추억으로 연명하는, 혹은 죽어가는 함의 부모, 내그(Nagg)와 넬(Nell)이 종말을 기다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희곡의 해설 부분인 무대 배경 설명과 함께 클로브(양종욱 배우)의 첫 대사가 시작된다. “끝났어, 끝났어, 거의 끝났어, 거의 끝난 게 틀림없어.” 의자에 앉은 손상규 배우가 관객들에게 희곡에 쓰인 함의 모습과 행동 지시문을 알려주고 말한다. “놀아볼까.” 쓰레기통에서 고개를 내밀고 서로 닿고자 해도 다가설 수 없는 채 대화를 나누는 내그와 넬은 양조아 배우가 의자에 앉아 뱅글뱅글 돌며 두 인물을 연기했다. 이 모든 인물의 대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능일 뿐 되풀이되는 말과 행동 속에서 소통은 불가능하고, 쪼그라들거나 마비되거나 멈춰 선 존재들이 결국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붙박여 추억을 뒤적이며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무기력한 삶의 끝을 보여준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남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독백 한마디(1979)』는 하얀 옷을 입은 양종욱 배우가 표정의 변화 없이, 음률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게 다가오는 음색과 발성으로 출생, 죽음, 시간의 흐름 등을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관객은 죽음 앞에 선 인간처럼 관념적이고 실존적인 질문들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보이고 들리는 이미지, 창백한 색채를 그저 넋 놓고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손상규 배우가 연기한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1958)』 역시, 녹음된 젊은 시절의 자신 목소리를 다시 듣는 늙은 작가 크랩의 독백 1인극이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예전의 자신이었던 타인의 목소리, 사랑, 야망, 후회 등 과거의 단편들은, 작은 테이블과 의자 하나만 놓인 방에 유폐된 채 바나나만 먹고 사는 현재 크랩의 고독을 부각한다. 같은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과거의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꺼버리는 크랩에게 과거의 기억을 반복하여 환기하는 자신의 녹음된 목소리는 무력한 시간과 광막한 공간을 그려낼 뿐, 새 테이프에 현재 상황을 녹음해 보아도 어둠, 침묵, 부동의 현실은 위로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베케트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구도 감히 실패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실패하는 것이라 했고, “베케트의 인물들은 가능한 것들을 실현하지 않고 가능한 것과 유희하며 무욕하고 빈틈없이 기꺼이 의미 없는 일들에 매달린다.”(질 들뢰즈, 이정하 옮김 『소진된 인간』, 문학과 지성사, 2013, p.26~28.)
조명도 무대와 객석도 갖춰지지 않은 텅 빈 공백 같은 공간에서 양손프로젝트는 끊임없이 탐구한 목소리와 골몰하는 움직임으로 이미지와 풍경 앞으로 관객을 데려가 차곡차곡 밀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했다.
『엔드 게임』에서 함은 공허한 세계의 대초원 한가운데 작은 모래알처럼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허나, 연약하고 쓸쓸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낸다. 모래알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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