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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댓 드래곤, 캔서>, 타인의 고통에 연루된 게이머들 / 오영진

새로운 공감장치의 탄생

<댓 드래곤, 캔서>(2016)라는 매우 사적인 컴퓨터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게임개발자 라이언 그린이 암에 걸린 자신의 아들의 투병과정을 소재로 만든 게임이다. 통상의 미션수행과정이나 퍼즐, 목표가 이 게임에는 없다. 다만 게이머는 아픈 조엘을 달래주고, 부모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조엘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토닥일 수는 있다. 상호작용을 극대화한 컴퓨터 게임이라면 살려내는 일까지(혹은 그 반대의 일) 가능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이 디자인한 상호작용은 위로할 수 있는 자유다. 이렇게 자유가 제한된 이유는 실제 모델인 조엘이 게임제작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으로 구현된 거짓 희망보다는 그 이상의 경험을 게이머와 공유하고 싶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 상호작용 디자인은 창작자의 의도가 없는 디자인이 아니라 의도가 최소로 반영된 디자인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만질 수 있는 소설, 만질 수 있는 영화, 만질 수 있는 사진이 된다. 넘겨짚거나, 보는 자의 입장으로 과도하게 동일화 하는 공감이 아닌, 대상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되어 오는 공감을 이 게임은 지향하고 있다. 애끊는 아픔,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게임은 그저 토닥일 수밖에 없는 게이머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게이머는 결국 이 어찌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기도하게 된다. 7챕터 <Sorry Guys, It’s not..)>(죄송하지만, 더 이상은..)에서 라이언은 병원에서 조엘의 치료를 더 이상 하는 것이 무리라는 말을 듣고는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때 그는 마치 물속에 빠져 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게임은 이것을 의사와 부모가 모인 방 안에 물이 가득 차 들어가는 장면으로 표현했다.


이후 라이언 그린은 10챕터 <drowning>(가라앉은 자)에서 이 바다 속에 차라리 익사하는 것을 선택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아내, 에이미 그린이 제발 보트 안에 타라고 애원하지만 라이언은 거부한다. 바다 속에 잠긴 그를 게이머는 터치해 수면 밖으로 나가도록 도울 수 있다. 많은 게이머들이 마우스를 이용해 그를 밀어내 보지만 그는 조금 올라가 보다, 포기하고 다시 익사하길 원한다. 이 방식으로는 스테이지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스테이지를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그는 심해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예상과는 달리 환한 빛이 보인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적 주체의 가능성을 논하며 이 힘을 ‘검은 태양’이라고 불렀다. 조엘에게는 ‘환한 심해’가 있었다. 이 상징적 자살을 관통해야만 라이언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섣부른 동정이나 삶에 대한 독려보다는 대상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속으로 침찬해 들어가도록 놔두는 일이 이 스테이지의 윤리다. 결국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완벽히 알 수 없으며, 어쩌면 그의 고통을 그대로 응시하는 일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미션도 없고, 강제된 규칙도 없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게이머는 느낀다. 다시 말해 게이머는 마음대로 조종 할 수 있지만, 고통의 대상자인 조엘과 라이언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조엘이 떠나고 난 이후의 환상을 다룬 12챕터 <Peace, Be Still>(조용히, 마음을 진정시켜요)에서 게이머는 조엘이 평소에 놀던 장난감 상자를 만져볼 수 있고, 그의 작은 침대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게이머는 그가 남긴 공간을 위로로 만지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타자의 고통은 기록하거나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같이 만지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그의 빈자리를 그 자리에 앉아 느끼는 것만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의 방식인 것이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 사진이 공감장치로서 타인의 고통을 알게 해주었는지, 혹은 오히려 외면하게 만들었는지 논의했다. 사진은 그 생생한 이미지로 인해 과거의 어느 매체보다 공감장치로서 유효한 기능을 가진 듯 보이지만 그 자체가 공감을 도덕으로 귀결시키진 못했다. 수잔 손탁은 우리가 전쟁사진을 통해 결국 느끼는 것은 공감의 한계라고 말한다. 죽은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우리의 응시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 수잔 손탁은 오히려 우리의 공감이 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그들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죄 없고 무력함을 전제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비교해 라이언 그린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는, 그 무력함이 죄의식으로 바뀌는 기묘한 동력이 게임 속에 작동하고 있음을 논해야겠다. 제 아무리 생생한 이미지보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버튼을 누르는 편이 더 연루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버튼을 눌렀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맞이한 무기력은 변명이 아니라 실재일 수밖에 없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게이머의 신체

9챕터 <Joel The Baby Knight>(조엘, 아기기사 되다)에서 게이머는 그나마 전형적인 게임을 해보게 된다. 조엘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암’이라는 용과 싸우는 기사의 이야기로 설명해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게임 속 게임인 이 스테이지에서 조엘은 갑옷이 없어 괴물로부터 취약하다. 조엘이 그렇게 느끼자 하늘에서 갑옷이 내려온다. 이 스테이지에서 만큼은 조엘은 결코 죽지 않는다. to be continue 메뉴가 무한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점프가 불가한 높은 벽에서는 황금색 매가 조엘을 물고 날아가 준다. 이 스테이지의 매력은 조엘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는다는 것, 위험상황에서 기적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게이머인 조엘은 결코 죽지 않는 게이머의 신체를 부여받는다.

무한히 도전할 수 있는 게임체험이야말로 우리를 과거 어느 때보다 끈질긴 주체로 만들어 주지 않을까? 게임에는 실패가 없고, 오직 재도전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이미 내재되어 있다. 게임이라는 세계 속에서만은 조엘이 죽어도 죽지 않는 게이머의 신체를 통해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 라이언 그린이 최초 아이를 위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러한 게이머의 신체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이머는 <댓 드래곤, 캔서> 반복 플레이함으로써 조엘을 더 오래 살릴 수 있다. 이 스테이지는 최종 보스인 용과의 대결이 아닌 나머지 게임플레이에서는 무한 컨티뉴를 제공한다. 하지만 최종 보스인 용만이 마지막 반토막난 생명력으로 결코 죽지 않는 존재로 나온다. 조엘이 쓰러지고 아버지가 대타로 싸우지만 결국은 용을 잡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많은 게이머들이 실망하곤 하지만 필자는 게이머의 신체와 현실 간의 변증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게이머는 다시 반복해 그 스테이지를 플레이 할 수 있고, 실력에 따라 영원히 대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연루된 게이머

이 게임의 백미는 챕터 13에서 벌어지는 조엘의 죽음 씬일 것이다. 거의 10분여간이나 이어지는 조엘의 고통어린 울음소리 앞에서 게이머는 속수무책으로 서성이게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정작 이 타자의 고통 앞에서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급격한 무력감은 스피커 너머로 전해오는 조엘의 울음소리와 대비된다. 이 점에서 플레이하는 자의 키보드는 연루의 징표다. 버튼 입력을 통해 이 세계에 발 들였으나 그 연루된 관계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된다. 사진과 영화, 그에 앞서서는 문학이 이 세계의 타자의 고통을 우리에게 배달한다. 하지만 보다 생생한 이미지보다 더 강력하게 타자의 감각에 우리를 감응시키는 일은 상호작용을 통해 내가 개입해 꾸리는 게임체험이 아닐까. 게임이 공감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게임이 그 어느 매체보다도 당사자성을 직접 구성하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찰자가 대상으로 향하는 일방향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관찰자로 전해오는 침입과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인간의 윤리를 즉 상호신체적인 동일성을 야기한다. 이 점에서 게임 <댓 드래곤, 캔서>는 컴퓨터 게임이 새로운 공감장치로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아픈 아들에 대한 부모의 애끓는 마음과 기억이 우리에게 순식간에 덮쳐오는 이러한 체험은 한 개인의 기록이 공동의 기억으로, 역사의 기억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전망케 한다. 컴퓨터 게임은 이제 시뮬라크르를 구성하지만 이 가상의 세계야 말로 ‘파생된 실재’가 아닌, 실재를 생산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엘의 시공간은 프로그램의 형태로 영원히 누구나 접속할 수 있도록 남아있다.



컴퓨터 게임의 기본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컴퓨팅 능력에 있다. 게이머들은 굳이 배우지 않았어도 창작자의 일방향적인 서사보다는 독자이자 생산자인 게이머의 상호적인 서사를 강조해 두는 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술언어로서 컴퓨터 게임(상호작용 디자인)은 성립한다. 표현에 있어 발화자와 메시지, 수신자의 관계가 일방향적이며 일회적이지 않고, 쌍방향적이고 무한대로 변경된다. 결국 플레이란 특정한 규칙 하에 벌이는 경쟁뿐 아니라 그 텍스트를 여러 쓰임새 안에서 무한히 변경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게임 <댓 드래곤, 캔서>(2016)는 조엘의 기억을 특정한 시나리오의 흐름 속에서 읽길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조엘은 세상에 태어나 지금은 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히 하고 그가 살았던 시간과 공간, 그 이후의 내세의 세계까지를 구현해 놓았을 뿐이다. 게이머는 이 텍스트에 연루되면서 그의 곁을 맴돈다.


*이 글은 <81년생 마리오>(2017, 요다)에 수록한 필자의 평론을 웹진용으로 개고해 발행한 것입니다. 과거 원고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가독성을 위해 일부 문단을 생략했습니다.


오영진(문화평론가, <에란겔: 다크투어> 연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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