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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누가 대학의 총장이 되는가? / 김동규

모교 총장으로 경제학과 교수가 선임되었다. 요즘은 경제, 경영 쪽을 전공한 교수가 대체로 총장직을 맡는다. 왜일까?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대학 총장의 주된 임무는 기부금을 따오는 것이다’라는 말에 해답이 있을 것 같다. 최첨단 기자재가 있어야 연구 가능한 이공계 사정을 고려한다면 총장의 핵심 과제를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문과대 교수들보다 실리에 밝은 경제, 경영 교수들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분야 출신 총장이 기부금을 압도적으로 더 많이 받아냈다는 소문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내가 만일 부자라면, 해당 대학의 사회적 기여도를 살피면서 총장의 인격에 감화된다면 모를까, 그의 경영 수완을 믿고 기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대학은 최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투자처가 아니며, 기본적으로 기부는 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총장이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리의 상아탑 수장까지 지낸 사람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학계에서 신망받던 학자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단 말인가. 무한정한 권력욕 때문이라고 단순화시켜 이해하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남는다.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통상의 ‘고전적인’ 대학 총장상은 근대 대학 이념을 만드는데 일조한 슐라이어마허가 꿈꾼 모델이라고 한다. 『폐허의 대학 – 새로운 대학의 탄생은 가능한가』에서 빌 레딩스는 이런 의문들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말을 빌리면, 총장의 진정한 상은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대학을 은유적으로 대표하며 나머지 교수들과는 환유적으로 연결되어있는 한 개인이다. ‘동급자 가운데 일인자(primus inter pares)’로서 총장은 대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정신으로서 문화의 이중적 기능, 즉 점진적 교양과 사회적 의미의 통일의 구현, 환유와 은유 양자를 형상화한다.” (빌 레딩스, 위의 책, 94쪽)



전통적으로 총장은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의 수호자이자, 스승들의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가진 최고 지성인이었다. 로버트 메이나드 허친스(1899-1977)는 전통적인 총장의 표상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듀이와 함께 미국이 낳은 교육사상가로 통한다. 서른 살의 나이에 제5대 시카고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어 22년간 총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제를 개편하고, ‘위대한 저서(Great Books)’ 시리즈를 출간하여 그 책으로 토론 수업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필자가 모 대학에서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는 수업, <Great Books & Debate>의 원조가 바로 허친스가 실험했던 교양 교육 수업이다. 대학 간 축구경기가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고 대학 내 교육을 저해한다고 판단한 그는 심지어 시카고대 미식축구팀을 해체하기도 했다.


‘대학은 거울인가 등대인가?’라는 허친스의 유명한 비유가 있다.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단지 사회를 반영하는 곳인지, 아니면 어둠 속에 은폐된 사회 문제를 환히 비추고 비판하는 곳인지, 이런 대학의 사회적 역할을 거울과 등대 두 가지로 빗댔다. 어느 집단이든 사회의 거울 역할은 할 수 있으며, 실제 어느 정도 하고 있다. 반면 등대 역할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허친스는 당연히 대학을 사회비판의 등대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대학이란 첫째, 지적 공동체로서의 대학, 둘째, 독립적인 사고와 비판의 센터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보루인 대학이 아니라면, 어떤 단체가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거리와 시점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허친스의 교육관에도 문제점은 있다. 그 역시 서양 지식인들의 고질병인 서양 중심주의에 빠져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들어보면, 그가 그 고질병 환자라는 점에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교양 교육은 서양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양 교육은 서양문명의 핵심인 대화의 계속을 목적으로 한다. 서양문명은 대화의 문명이다. 로고스(Logos)의 문명이다. 교양 교육은 역사의 여명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위대한 대화’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비서양 문명들은 다른 점들에서는 위대해도 이 점에선 서양문명만큼 위대하지는 못했다.”(빌 레딩스, 위의 책, 81-82쪽)

미래에는 AI 로봇이 지배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들 한다.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오줌싸개 꼬맹이들도 코딩을 배운다. 알고리듬을 만드는 초보 교육에서 깨알같이 적힌 지침 그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이 이미 로봇이 되었기에 로봇 지배 사회가 펼쳐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학자였던 총장이 나중에 CEO나 고위관료로 변신한 게 아니다. 오히려 (잠재적) CEO나 고위관료만이 총장이 될 수 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대학이 기업체나 관료조직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조직의 수장 요건을 갖춘 사람만이 총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대학은 폐허가 된 지 오래고, 그 위에 대학 간판을 내건 기업이 세워졌다. 실상은 기업이면서도, 상아탑 이미지로 위장한 것이다. 그런 허울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대학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환상에 기초한 그들의 개탄이 헛된 이유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환-멸(幻-滅)’이 필요하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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