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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너구리: 그 많던 너구리와 뱀들은 어디로 갔을까?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9일

반갑다 너구리

한국에서 소위 ‘너구리’라고 불리던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의 원작은 시그마사가 82년도 제작한 ‘Ponpoko’이다. 표제 “뽄뽀코”는 일본어로 배를 불룩하게 만들어 두드리는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인데, 게임 속에서 매우 귀여운 너구리가 특유의 삐용 소리와 함께 점프를 해 압정을 피하고 과일과 채소를 먹어 스테이지를 통과해 나간다. ‘너구리’는 유독 한국에서 히트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류작, 수정·이식작이 한국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원본은 Ponpoko로 시작했지만 한국인들만의 독자적인 Neoguri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에는 5번째 스테이지에 가기도 버거웠던 이 게임을 요즘 능숙한 플레이어들은 12분대로 클리어 해 녹화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한다.

소설가 박민규가 이 게임을 소재로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2004)라는 작품을 썼다. 어느 날 인턴사원인 주인공이 손팀장에게 에뮬레이터로 ‘너구리’를 깔아주게 된다. 이후 손팀장은 하루종일 ‘너구리’만 플레이하게 된다. 급기야 배가 부르고 눈주위가 검게 변하더니 진짜 너구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정리해고 된다. 다소 황당한 설정이지만 현대인의 우화처럼 가볍게 읽히기에 꽤나 즐겁고 몰입감 있다. 너구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주인공의 친구는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대답을 한다.

“예를 들어 농경사회를 생각해봐. 모두가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는데 돌연 한 마리의 너구리가 나타난 거야. 앗 너구리다. 누군가 소리치면서 일손이 중단되게 마련이지. 귀엽다. 이리 온. 해피쫑쫑. (중략) 그런 느낌이란 거지, 원래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한 두어 시간은 온통 너구리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거야. 그럼 그 텃밭 1팀의 팀장은 어땠겠어? 너구릴 죽이고 싶었겠지.”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이며 그래서 노동을 방해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손팀장은 즐거움을 알아버렸고 급기야 너구리가 되어버렸다. 과장이 해고되었다는 점에서 너구리는 경쟁사회 낙오의 표식처럼 보인다. 성실했던 사람이 게임중독으로 패가망신한 것일까?

사실 손팀장은 23번째 스테이지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곳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에서 점프를 하면, 착지점이 없어 압정에 찔려 죽는 일이 일어나 도저히 깰 수 없는 판이다. 원래 ‘너구리’는 20번째 스테이지가 마지막이며 죽지 않는 한 그 판이 무한반복된다. 그러니까 게임 속의 23번째 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3번째 스테이지는 절대로 클리어 할 수 없는 ‘현실’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그러니까 손팀장의 해고와 실종은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 손팀장은 가장 먼저 직접 너구리가 되어 마지막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자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컴퓨터게임은 인생의 고단한 레이스에서 지친 자들이 가장 먼저 도피처로 삼는 공간이다.


윤춘택의 소설 「아버지의 표창」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는 오랜만에 헤어진 친어머니를 만났으나 고작 용돈 2만원을 받고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그 돈으로 고작 <제비우스의 모든 것>이란 게임 공략집을 산다. 한심해 보이겠지만 그에게 제비우스의 점수는 소중하다. 그저 재밌거나 쉽기 때문에 게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임 속 세계에서 주인공은 실력에 비례해 점수를 기록하게 되고, 그것만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공략집 첫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는다. “기술은 자본투자에 비례한다” 자존감을 형성하는 실력=점수라는 것도 돈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플레이 해줘

게임 ‘너구리’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뱀들과 사투를 벌인다. 마땅히 대항할 수단도 없이 그들에게 쫓겨다니기만 한다. ‘너구리’가 전세계적으로 히트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수세적인 플레이가 야기하는 지루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응원하게 되는 캐릭터로서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았는지도 모른다. 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구리가 나온 82년, 그 해 미국에서는 뱀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 ‘니블러’가 제작된다. Nibbler는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게임은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재밌지도 않다. 2-3판 해보면 더 이상 플레이할 욕구를 느끼지 못했기에 게임은 인기가 없었다. 다만 비슷한 시기 다른 게임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점수기록이 9자리까지 표시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당시 니블러는 게임 플레이 마라톤의 한 종목으로 간주되었다. 게임 제작사 ‘록 올라’가 ‘니블러’ 게임기를 상품으로 건 대회를 열자 몇몇 미친 게이머들은 10억점을 목표로 매진해 나갔다. 1984년 1월 팀 맥베이라는 소년은 48시간 연속으로 플레이 해 10억점 달성에 성공한다.



다큐 <인간 대 뱀: 니블러를 향한 여정>은 지금은 공업사에서 일하고 있는 마흔살 팀 맥베이의 ‘니블러’ 10억점 재도전기를 다루고 있다. 그 사이 팀 맥베이는 거대한 덩치가 되어 있었고 주변의 그 누구도 그가 ‘니블러’ 세계 신기록 보유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실패한 인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 볼 일 있는 인생도 아니었다.


팀은 엔리코 자네티라는 무명의 게이머가 자신도 10억점을 돌파했다고 주장하자 자신의 기록에 재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 또 다른 게이머 드웨인 리차드까지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올드 게이머들의 자존심 대결로 발전한다. 이런 상황을 그들은 마치 “니블러‘의 뱀이 나를 플레이해줘라고 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옥션을 뒤져 중고기판을 사서 집안에 아케이드 게임기를 들여놓으며 연습하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스틱을 만져보지만 잡는 순간 그들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48시간동안 쉬지도 않고 게임할 수는 없으니 보너스로 목숨을 99개까지 확보하고 뱀이 제멋대로 죽는 동안 잠시 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경쟁하고 있지 않다.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록보다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제목인 인간 대 뱀의 대결구도도 따져보면 맞지 않는 말이다. 그들은 뱀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뱀이 되어 니블러의 회로와 싸우고 있다. 그러나 집중력과 체력에서 중년의 게이머는 게임 마라톤을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팀은 40시간 이상을 버텼으나 목숨 20개를 쌓아두고 포기하고 만다. 드웨인의 ‘니블러’는 기판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24시간이 넘자 멈춰버린다.


팀은 괴성을 지르며 절망한다. 게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은 팀의 심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공개적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게이머의 본능이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도전하고자 자신의 집 안에 게임기를 놓고 인터넷 중계를 시도한다. 2011년 늙은 팀은 어린 팀을 4000만점 차로 이겨버린다. 이 승리가 값진 이유는 늙은 팀이 대결한 것이 단지 ‘니블러’뿐 아니라 그 자신 삶의 무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뱀은 우리에게 너구리와 같은 존재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플레이 해달라고 요청해 게이머의 영혼을 자극한다. 난공불락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거나 기록적인 점수를 세움으로써, 게이머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흔적을 게임 속에 새기려고 노력한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노력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들 자신에게만큼은 큰 의미의 도전이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후 팀 맥베이는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게 되고, 드웨인 리차드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으며, 엔리코 자네티는 자신의 기록을 공식 인정받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소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말미, 주인공은 8대 1의 경쟁을 뚫고 드디어 정규직이 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상사의 변태적인 성적요구에 저항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울분을 삼킨다. 그 때 너구리가 말없이 등을 밀어주며 위로한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등만 밀어줬을 뿐인데도 주인공은 창공을 나는 듯한 기쁨을 느낀다.


너구리는 결국 인생도 더 어려운 게임의 스테이지일뿐이라는 점,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도 없고 정 싫다면 플레이 자체를 그만두고 다른 게임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인공에게 알려주고 갔다. 주인공은 이렇게 답변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너구리가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흔든다. 이 땅의 올드게이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의 너구리와 뱀들은 잘들 있습니까?

“하늘을 들어 미래를 보다 지친 우리 보조개 썩은 나의 미소 / 나를 만드는 초라한 조각가 끊어진 사람들 / 성냥을 그어 나 이 도시 속에 숨어있는 너구리가 되어 볼까나 / 찬 우리 속에 갇혀 이 밤을 세워 춤을 추는 사람들 그 여림 속에서도 가만히 별빛을 보는 시인들 ”

-게임 ‘너구리‘를 소재로 만든 크라잉 넛의 노래 <너구리>의 가사 中-


*본 원고는 2017년 카카오스토리펀딩의 연재분 일부를(이후 책 <81년생 마리오>(요다, 2017) 수록) 웹진용으로 개고한 것입니다.


오영진(문화평론가, 교과목 <기계비평>주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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