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간첩이 된 천재 이방인 - 정수일 교수 별세에 부쳐 / 강부원
- 한국연구원
- 4월 4일
- 7분 분량
<처용가>의 ‘처용’은 아랍 사람?
서라벌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가>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 때(879년) 처용(處容)이 지은 팔구체 향가이다. 처용이 자신의 아내가 역신(疫神)과 동침하는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이 사죄하며 물러갔다고 한다. 국문학 연구자들은 ‘처용가’를 흔히 관용정신을 통해 축신(逐神)을 이뤄낸 주술적 무가로 해석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주해(註解)가 있다. ‘처용무’를 출 때 쓰는 처용의 가면이 서역(西域) 사람과 닮아 있는 점과 당시 신라가 아라비아 문화권 나라들과 무역 및 교류를 활발히 진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처용이 아랍 사람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항공기를 타고 가도 하루 종일 걸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인 한국과 아랍 국가 사람들이 1,000년도 더 전에 서로 만나왔다니 놀랄 일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가까운 울산 반구동에서 당시 아랍 문화와 해상 교류한 흔적이 발견되는 등 이 같은 학설에 힘을 싣는 증거들이 실제로 발견되고 있다. 때문에 처용으로 묘사된 인물이 아랍 사람이라는 주장은 현재에도 ‘처용가’를 해석하는 주류 학설로 인정받고 있으며,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가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문학적 근거로 차용되고 있다.
신라시대 표기법인 향찰로 기록된 향가를 현대의 우리말로 처음 완역한 학자가 ‘양주동’과 ‘김완진’이었다면, ‘처용가’ 해석에 동서 문화 교류의 역사를 덧입혀 해석한 연구자는 ‘무함마드 깐수’가 최초이다. 깐수 교수의 연구 덕분에 신라는 일찌감치 아랍과도 교류를 맺을 정도로 개방적이며, 수도 경주와 국제무역항 울산은 일찍이 트랜스내셔널 문화가 꽃핀 글로벌 도시였음이 드러났다. 이는 고대 동서양 사이의 문화 가교 역할을 담당했던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 신라의 경주일수도 있다는 역사적 가능성과 문화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함마드 깐수’
이제 보편적 문학 상식으로 굳어진 처용가의 이 같은 해석을 처음 시도한 학자는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를 사랑해, 한국 대학에 들어가 이슬람 문화를 연구했던 사람이다. 깐수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연구 성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걸어온 길이 곧 한국 이슬람 문화 연구의 역사이다.
그는 학술적 성과 못지않게 이슬람 관련 지식들을 대중 교양으로 전달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주요 일간지에는 쉽게 읽히고 깊은 깨달음을 주는 그의 글들이 줄곧 실렸고, 인기가 많아 텔레비전 방송 출연도 잦은 편이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타문화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고, 외국인을 대하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더욱이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전체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깐수 덕분에 척박하기만 했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었다. 또한 무조건 외국인이라면 ‘미국사람’만 있는 줄 알았던 당시 한국인들이 깐수를 통해 제3세계의 존재를 이해하고 아랍 문화를 친근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깐수는 결국 1990년 단국대에서 이슬람 문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다. 그 사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가정도 꾸렸다. 이후 그는 이슬람 문화와 관련한 수준 높은 연구 논문을 주기적으로 발표하고, 단행본 교양서적도 꾸준히 출간하는 등 학술연구와 집필활동 모두에 의욕적이었다. 그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7개 국어를 사용할 줄 알았고, 동서 문명 교류의 밀알이 되기를 자처했다.

‘정수일’이 ‘무함마드 깐수’가 되기까지
1996년 7월 3일, 세상사람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보도가 하나 나왔다. 무함마드 깐수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뉴스를 믿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됐거나, 오해가 생겨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제까지 텔레비전에 나오던 친근한 외국인 교수가 간첩이라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문민정부에서도 멀쩡한 학자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는 것이냐며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군사독재정권에서 조작된 간첩 사건들이 숱하게 많아 국민들은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철석같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깐수는 진짜 간첩이었다. 수사 결과 더욱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깐수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파견한 고정간첩이었으며, 더구나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본명이 ‘무함마드 깐수’가 아니라 ‘정수일’이라는 것도 이때 드러났다. 그리고 실제 나이도 1946년생이 아니라 1934년 생으로 알려진 것보다 12살이나 더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그와 결혼해 오랫동안 함께 살던 아내조차도 그의 정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일제의 지배를 받던 만주국 간도의 용정에서 태어난 조선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한 이후 만주가 중국으로 다시 귀속되면서 중국 국적이 됐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던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두각을 드러냈다. 1952년에는 중국 베이징대학 아랍어학과에 수석 입학했으며, 1955년 12월에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중국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유학했다. 중국 최고의 이슬람 문화 전문가로 일찍부터 실력을 키웠다.
유학을 마친 후 빼어난 아랍어 구사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중국 외교부 및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 등지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중국 한족 주류 세력에게 끊임없이 차별받았다. 중국에서 멸시와 모독을 견디지 못한 그는 1963년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조선인 뿌리를 되찾기 위해 그가 선택한 조국은 남한이 아닌 북한이었다. 이때 중국의 지도자 주은래 총리가 직접 그를 만나 국적 변경을 만류하기도 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인재였다.
북한에서 그는 줄곧 평양국제관계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러던 그의 삶이 크게 바뀐 건 1974년 대남 특수공작원으로 선발되면서 부터이다. 그가 선택한 조국 북한은 어이없게도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싶을 정도로 우수한 학자를 콕 집어 간첩으로 만들었다. 냉전시대 분단국가의 체제 경쟁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중요하고 우선적인 과제로 취급됐다.
그는 혹독한 훈련과 사상 교육을 받은 뒤, 남한으로 잠입하기 위해 신분을 세탁하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튀니지대학의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에 들어갔다. 이후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직도 맡았다.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며 북한 출신 흔적을 지워나갔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서야 ‘정수일’은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함마드 깐수’가 됐다.
냉전시대 타고난 천재의 이도 저도 아닌 간첩 생활
깐수의 남파 경로는 이렇듯 지난하고 복잡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으로 입국한 뒤 실제로 고정간첩으로 10년 넘게 활동하며 올린 실적이란 것은 별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가 북으로 송신한 남한 관련 첩보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소식을 갈무리 한 것에 불과했다. 어느 때는 그저 자신이 연구하던 학술 정보를 정리해 보내기도 했다. 그는 실상 간첩보다 학자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7개 국어를 한다고 자신을 소개하곤 했는데 실제로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까지 12개국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12개국 언어를 할 줄 아는 것이 들통 나면 자신의 복잡한 이력이 탄로날까봐 염려돼, 그간 7개 국어정도만 할 줄 아는 것으로 줄여(?) 소개했다는 웃지 못 할 일화가 남아 있다.
그의 언어 능력이나 학문적 업적을 따져보면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타고난 천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냉전시대 남북의 체제 경쟁과 정치적 대립도 그의 학구열을 소진시키지 못했다. 자신을 환대해주는 것은 물론 점차 익숙해져 애착이 생기는 남한에서 생활하며 남몰래 이적 행위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랜 번민과 고뇌가 이어졌으나, 그렇다고 자신을 믿고 간첩으로 파견한 조국 북한을 배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한에 정착한 뒤 학자로서 명성도 얻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북한에 있는 본처와 자식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신분을 위장한 채, 한국에서 이도 저도 아닌 간첩이자 학자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타고 난 이국적 외모와 정성스럽게 기른 콧수염이 그를 영락없는 아랍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정체가 들통 날 염려는 별로 없었다. 그는 아랍어 사용과 행동거지가 완벽했기 때문에, 심지어 이슬람사원에서 만난 아랍 사람들조차도 그가 아랍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 그를 간첩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정간첩의 비애와 매너리즘
무함마드 깐수는 한국에서 새로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려 생활했으며, 이슬람 문화 연구자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도 해야 했기 때문에 더없이 분주하고 고단했다. 논문도 발표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신문 칼럼도 써야 했다. 그러니 간첩 본연의 첩보 활동에 자신의 에너지 전부를 사용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정례적인 첩보 활동의 일환으로 그저 누구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신문 쪼가리에 나오는 기사를 오려 보내거나, 자신의 학문 연구 내용을 정리해 보낸 경우도 많았다. 간첩 생활의 비애와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서글픈 대목이다.
무함마드 깐수 간첩 사건은 냉전시대 분단조국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간첩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간첩은 스파이나 첩보원의 활약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멋지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간첩은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생활의 핍진함을 견뎌내며, 밑도 끝도 없는 ‘밀고’와 ‘접선’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야하는 고달픈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고 자신의 신세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긴장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더구나 간첩임이 발각되는 순간 자살을 하도록 훈련받아, 독극물을 상비한 채 지낼 정도로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다. 간첩은 냉전시대 체제 경쟁에 내몰린 국가에 의해 가장 모욕적으로 다뤄진 ‘비(非)인간화된 인간의 전형’이었다. 또한 이들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수행하는 정보 수집 업무가 그다지 영양가 없으며, 체제 경쟁 과정에서 자신들의 첩보가 어떤 변수로 작용할 만큼 변변치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버려진 간첩, 유령 같은 존재들
1996년에 깐수가 간첩으로 적발된 사정도 그 내막을 살펴보면 복잡한 구석이 있다. 1994년 여름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북한 정권 내부에서도 부자간의 권력 세습을 두고 엄청난 암투와 갈등이 벌어졌다. 외부적인 체제 경쟁보다 내부 단속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남파한 간첩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우선 공작금이 끊기는 등 지원이 중단됐다. 당장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했던 북한 정권이 남한 첩보 임무를 중요하게 취급할 리 없었다.
조국 북한의 지원과 보호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니, 남한에 파견된 간첩들도 각자도생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북한은 공식적으로 남한으로 파견한 간첩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간첩에 대해서는 우리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쉽게 말해 간첩 깐수는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냉정하게 버려진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이 냉전시대 간첩들에게 예정된 운명이었고,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간첩은 남한과 북한 양측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나, 현실에서는 또 엄연히 존재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다. 냉전시대 간첩은 언제 어디에서나 비가시적인 형태로 머물기를 강요당하는 흐릿한 그림자였다. 더구나 고정간첩이라는 직책은 현지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가며 막을 수 없는 세월의 더께를 받아들여야 했고, 생활의 무상함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이기도 했다.
고단한 이방인 간첩의 뒤늦은 전향
‘무함마드 깐수’ 아니 ‘정수일’은 간첩 혐의로 인해 최종적으로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을 선고 받았다. 이슬람 문화권 인사들과 동료 학자들의 끊임없는 탄원 덕분에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다. 하지만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모교인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소당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는 감옥에서 남한으로 전향을 결정하고, 형 집행 6년 만에 가석방된다. 이후 그는 다시 온전한 학자로 돌아와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재직하며, 현재까지도 노익장을 과시한 채 한국 최고의 이슬람 문화 연구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나이도 이제 아흔이 다 됐다. 희한하게도 그의 얼굴은 이제 영락없는 한국인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난 2025년 2월 24일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소천했다. 향년 91세였다. 정수일은 20세기 초 만주에서 태어난 조선인으로서, 중국과 북한, 남한을 넘나들고 중동과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관통해낸 ‘식민’과 ‘분단’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냉전시대 북한에 의해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활용된 엘리트 간첩인 동시에, 남한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이방인이기도 했다. 역사에 만약을 가정하는 일이 덧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간첩이 되지 않고 이슬람 문화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형편이었더라면 한반도와 아랍 국가들 사이를 잇는 제2의 실크로드가 한 번 더 멋지게 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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