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다 보면, 요즘 유난히 ‘낮술 환영’이라는 푯말을 자주 마주친다. 사라진 지 오래된 낮술 문화가 다시 부흥한 모양이다. 코로나로 저녁 영업시간과 모임 인원이 제한되었기에 생겨난 신풍속도로 추정된다. 나는 코로나로 인한 다양한 변화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기에, 시인에 기대어 낮술의 좋은 점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고 싶다. 20대 때에는 자주 낮술을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낭만적인 회상의 성격도 있을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초기 작품, 「낮술」은 느리고 긴 호흡으로 읽힌다. 여기서 낮술은 우선 여유 있는 시간을 상징한다. 시를 포함하여 예술은 술과 친화력이 있다. 술처럼 예술은 감상자를 이완하고 도취시켜 다른 세계로 이전시키는 매체이다. 잠시 「낮술」을 음미해보자.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럭거린다 해도/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신성한 시간이여/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오오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낮술로 붉어진/아,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낮술」 부분 )
시가 조금 어렵고, 잘 안 읽히는가? 아마도 삶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감상은 도취이고, 감동은 도취된 울렁거림이다. 작품 감상이 어렵다는 것은 결국 도취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 깊숙이 시가 들어올 수 있으려면, 독자의 마음에 넉넉히 빈 공간이 필요하다. 시가 웬지 읽히지 않는다면, ‘바쁜 게으름(바삐 돌아가는 일에 빠져, 혹은 그것을 알리바이로 삼아, 정작 소중한 일에는 태만한 행태)’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해독(解毒)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난해한 시를 붙들고 게으른 시간을 가지는 방법(이열치열)을 추천한다.
시는 “하루여”라는 말로 시작한다. 일상의 하루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굴러가는 일상의 하루다. 나날의 하루는 볼품없다. 잡동사니 같은 일들로 빼곡히 차 있다. 하루라는 작은 그릇에는 이리저리 치이는 일들과 하고픈 일, 해야만 하는 일들로 덜그럭거린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아마도 죽기 전까지, 그런 날들이 계속될 것이다. 시간은 그 잡다한 일상사를 먹어 치운다. 이렇게 삶을 집어삼키는 시간은 가혹하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 일상의 하루를 “신성한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인은 하루의 신성한 시간을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이라 말한다. 아이를 간질이면 아이는 발작적으로 웃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린다. 시간은 일상의 삶을 간지럽게 한다. 장난치듯 삶을 간질인다. 어떤 때는 웃게도 하고 다른 때는 울게도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을 어린아이라고 말했다. 천진한 아이의 이유 없는 장난 같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육중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직조된 시간의 그물망에서 과거와 미래는 무한히 펼쳐진 데에다, 그만큼 현재의 깊이도 무한하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이 방문객을 환대해야 한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방문객」) 시간은 아이의 장난처럼 가볍기도, 무한을 적재한 수레처럼 육중하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시간의 손바닥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시적 화자가 낮술을 마신 것이다. 낮술을 마신 이유는 분명치 않다. 어떤 이유에서든 낮술을 통해 ‘신성한’ 일상의 규칙을 깼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마 술을 거나하게 마셨나 보다. 얼굴빛은 붉어지고 취기가 온몸을 흐른다. 그때 시적 화자는 (공교롭게도)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에 비친 술 취한 자기 모습을 본다. 동시에 자기 얼굴에 투영된 시간의 모습까지 보게 된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을 본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허둥지둥 살아온 시간을 결국 직시한 것이다. 술기운이 아니었으면, 한낮의 일탈이 아니었다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지나쳤을 것이다. 외면했을 것이다.
시인은 낮술을 마시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비춰본다. 그 속에서 시간을 직시한다. 일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렇게 외친다.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취하지 않은 시간은 정체된 시간이다. 이미 보았듯이, 취하지 않은 시간은 바쁜 일상의 시간이다. 하지만 일상의 수레바퀴 안에서는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다. 여울목의 맴돌이처럼, 바삐 돌아도 언제나 그 자리다. 자기를 둘러싼 상황도 자기 자신도 요지부동이다. 뭔가(특히 자기가) 바뀌지 않으면, 시간은 멈춘다. 술기운이라도 빌려 자신을 바꿔야만, 시간은 흐른다.
물이 그렇듯, 시간도 흘러야 썩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내 삶의 발목을 잡는 과거다.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다. 증오가 힘든 까닭은 그 대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증오의 대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이 멈출 때 생은 부패한다. 생이 건강하려면, 분주하기만 한 일상을 잠시나마 떠나야 한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라고 노래한다. 꿈과 술은 일상의 엑소더스다. 그것들을 통해 여유로운 시간이 펼쳐진다. 술과 꿈으로 시간이 물들면, 일상의 시간은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로 변용된다. 이것이야말로 ‘신성한’ 시간의 얼굴이다. “낮술 마신 그 이쁜” 얼굴이다.
낮술 먹는 시간을 통해서 일상의 바깥에서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잠시 시간의 얼굴, 즉 바쁜 게으름으로 일그러진 자기의 초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자기 응시를 통해서 자기를 변신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자기가 변할 때, 비로소 시간은 다시 꿈틀대며 흘러간다. 생동(生動)하는 이 시간은 시와 예술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현종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술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취하는 일에 관한 얘기를 예술 창조의 공간에서 말하자면, 모든 창조적 정열은 취하는 데서 나온다. … 시(예술)의 자리에서 말하자면 시인은 각성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날아라 버스야』) 여기에서 도취란 인사불성 상태가 아니라, ‘각성에의 도취’다. 이 도취는 평소에는 상상과 기억이 불가능했던 것들에 접근을 허락하면서 미감을 일깨운다. 미감에 홀리면, 존재의 풍요로움에 예민하게 감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무딘 일상에서 이런 감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예술가란 도취로써 바쁜 게으름에서 벗어나, 생동하는 시간 리듬에 반응하는 사람을 뜻한다. 낮술 즐기는 사람들에게서 가끔 예술가적 풍모를 느끼는 것도 가당찮은 일만은 아닌 듯하다.
*** 이글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2017. 03. 02. vol.219)에 실었던 「중세의 멜랑콜리와 예술」의 일부를 대폭 수정한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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