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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그 한없는 것들 / 김동규

최종 수정일: 6월 18일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가 한 편 있다. 정현종 시인의 「좋아하는 것도 한이 없고」라는 시다. 사람들마다 애정하는 작품들 목록에는 애정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 얼추 그 감정선의 뼈대는 비슷하다. 처음 작품을 보았을 때, 대개 뭔가로 뒤통수를 세게 맞는 아픔을 느낀다. 때린 것이 무엇인지, 기묘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충격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기쁨’을 자아낸다는 게 특이하다. 안온한 일상의 알껍데기가 깨져 소란스럽고 낯선 큰 세상에 내던져진 느낌이랄까. 애(愛)와 중첩된 느낌이 아니었다면, 아마 쓰라린 고통 때문에 두 번 다시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쏙 빼는 매운 음식이 당기듯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게 무엇인지를 묻는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을 추체험한다.


정현종의 이 시를 어느 정도 좋아하느냐면, 말을 처음 배운 우리 집 아이들에게 외우게 만들기까지 했을 정도다(자세한 사연은 졸작 <철학자의 사랑법>(사월의책, 2022)이란 책에 적어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한다기보다 인생을 살면서 꼭 명심해 두고픈 글귀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컨대 인생의 쓴 맛을 잠시 잊게 해주는 달달한 사탕이라기보다 몸에 좋은 쓴 약 같다고나 할까. 그럼 짧은 시의 전문을 소개해 보겠다.

     

좋아하는 것도 한이 없고
싫어하는 것도 한이 없다.
미워하는 것도 한이 없고
사랑하는 것도 한이 없다.
그 한없는 것들이
나를 파괴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건 실로 도둑놈의 심보가 아니랴.

     

정현종, 『견딜 수 없네』, 문학과지성사, 2013. 62쪽.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살면서 그러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한정 없이 빠지다 보면, 그 깊이가 무한하다는 걸 알게 된다. 바닥없는, 끝 간 데 없는 깊이로 빠져들곤 한다. 살다 보면 이것도 흔한 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특정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가 선명하게 그어진 한계적 존재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힘과 지식의 한계, 밥을 먹고 배설하고 잠을 자야만 한다는 생물학적 한계,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를 인간은 떠안고 있다. 그런 인간이 무한과 접촉하면 파괴되고 만다. 당연한 이치다. 허나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무언가에 한없이 빠져들고서도 파괴되지 않기를 바란다. 시인은 그것을 “도둑놈의 심보”(우리 집 꼬맹이들이 이 시에서 유일하게 재미있어했던 부분)라고 표현했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강성용 교수의 불교 강의를 시청했다.1) 배울 게 많아서 그분의 동영상을 찾아 틈틈이 보았는데, 그때마다 해박한 지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인도 고전을 폭넓게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해서도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문제로 말미암아 학문의 초발심을 낸 고전 연구자의 모범처럼 보였다. 하여간 그분의 불교 강의를 들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 즉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가 인도 말로는 좋아하는 일, 싫어하는 일, 빠져드는 일을 뜻한다는 점이다. 한자로 번역되면서 소박한 뜻을 잃게(잊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정현종 시인의 「좋아하는 것도 한이 없고」를 떠올렸다. 누구나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한다.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좋아함과 싫어함,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을 이룬다. 혹은 사랑과 미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진자 운동으로 빗댈 수도 있겠다. 이 맥락에서 불교의 윤회(輪廻)란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맴도는 회전 운동을 뜻하며, 해탈이란 고락(苦樂)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일전에 정현종 시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줄곧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나는 꼭 집어서 이 시의 불교적 영향 관계를 묻지는 않았다. 작가의 무의식적 영향 관계도 있기에 불교를 의식하면서 이 시를 창작했는지의 사실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시인과 붓다 사이의 이념적 친밀성은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에 한없이 빠져드는 어리석음(癡)이 문제다. 그게 바로 뼈아픈 고통을 낳는 무명(無明)이고 오만(hybris)이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진저리치지 않으려면, 호오애증(好惡愛憎)에 밑도 끝도 없이 한없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내 깜냥 꼭 그만큼에 만족하면 그만이다. 행여 누군가,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무한을 욕심내도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앞서 말한 애증의 윤회 고리를 떠올리거나,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에 불가피하게 뒤따르는 사랑의 상실을 떠올리면 이런 사정을 얼마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예정된 고통이 기다려도 연인을 무한히 좋아하고 사랑하겠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먼저 ‘멋지십니다!’라며 상찬할 것이다. 무한한 사랑을 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적어도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나로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단 사랑이 몰고 올 고통을 각오하고, 사랑의 고통을 훈장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직이 말해줄 것이다(아마 그이도 잘 알고 있겠지만). 고통 없는 사랑, 장밋빛 사랑, 아늑하기만 한 사랑은 절대 기대하지 말자. 그건 시인의 말처럼 “도둑놈의 심보”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네이버프리미엄채널 <철학자의 사랑법>에 올린 거친 초고를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1.<강성용, 괴로움의 해결을 위해 붓다가 제시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붓다빅퀘스천 20]> 참조.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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