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앵글에 따라 같은 사물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피사체를 카메라보다 높은 곳에 위치시키면 피사체는 실제보다 거대해 보인다. 이런 앵글을 앙각(仰角)이라고 한다. 반대로 아래에 위치시키면 작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산 아래에서 보는 풍경은 장엄하고 숭고한 반면, 산 정상에서는 모든 것을 장악한 권력감이 솟구친다. 보는 지점, 곧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더 나아가 관점이 없는 봄은 없고 신적으로 완벽한 관점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견해마저 하나의 관점이다. 절대주의를 상대화시키면서 동시에 상대주의마저 상대화시키는 해체주의적 입장이 진짜 관점주의다. 이런 관점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던 사람이 바로 니체다.
독일 베를린에서 1년간 체류한 적이 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곤 했다. 한번은 라이프치히에 간 적이 있다. 그 도시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집필했던 곳이자, 바그너가 태어난 곳이며 바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바흐 박물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여러 전시자료를 보다가 이내 피곤해져 CD로 바흐 음악을 듣는 곳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어느 중년의 신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독일어가 서툴렀던 나는 겨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아들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대충 여기서 CD로 음악을 들을 게 아니라 근처의 성당에서 공연이 예정 중이니 그곳에서 음악을 함께 듣자는 것이었다. 무료했던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바흐가 일했던 성 토마스 성당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 독일인은 내게 바흐의 음악에 대해 뭔가를 설명해주려고 했다. 음악을 다 듣고 난 뒤에는 포도주를 사겠다는 호의도 베풀었다. “내가 술 한 잔 쏠게”라는 말을 독일인으로부터 들어 본 것은 그 이전에도 그 후로도 없었다. 아쉽게도 예약해 둔 기차 시간 때문에 작별해야만 했을 때, 우리는 서로의 주소를 교환하며 ‘펜팔’하기로 약속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썼다. 정성들여 쓴 손편지가 오고갔다. 내가 철학을 전공했다고 하니까 그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어, 니체 등의 책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편지에 담았다. 그는 전직 변호사였다는데, 글에서 묻어나는 교양과 지식으로 추론해 보건데 평균적인 유럽의 중산층 지식인으로 보였다. 독일을 떠날 무렵 나는 그에게 이제는 한국 우표가 붙은 편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썼다. 그랬더니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자기랑 함께 유럽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여행 경비가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경비를 모두 대겠다고 답했다. 그때 나는 고민했고, 당시 친하게 지내던 독일 친구들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내게 동성애자냐고 물었다. 그 펜팔 상대자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굳이 따라가겠다면, 난처한 상황을 각오하라고 조언했다.
동성애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 호모포비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아무리 성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다 해도(정말일까?), 막상 자기의 일이 되니까 사회적 금기 위반의 공포심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결국 공포에 사로잡혀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그로부터 받은 수십통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는데, 놀랍게도 이전까지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암시적 내용들이 읽혔다. 말하자면 성적 암시로 가득한 연애편지로 읽히기 시작했다. 관점이 바뀌자 모든 것이 전혀 달라 보였던 것이다.
앞서 관점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던 사람이 니체라고 말했다. 그럼 니체는 관점주의에 충실했을까? 바그너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접근해 보자. 음악가가 꿈이었던 어린 니체에게 바그너는 신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 니체에게 바그너는 유럽 데카당스를 종식시키는 위대한 영웅이었다. 삼십대 초반의 니체에게 바그너는 위험한 키르케였고, 이후에는 악취를 풍기는 데카당스의 전형이었다. 바그너와의 결별 이후 니체가 쏟아낸 독설의 표적은 거의 대부분 결별 이전에는 극도로 찬미했던 것들이다. 사랑했던 이유가 증오하는 이유로 돌변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서 있던 자리가 바뀌고 관점이 변했기 때문이다.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를 꼽자면, 열광적으로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독립적인 철학자의 입장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관점을 고려했더라면,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울분과 증오, 비난과 독설은 좀더 말갛게 정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니체는 너무 젊었고, 그의 관점주의도 성장 중이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관점주의의 진수를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 과거 공포에 사로잡힘으로써 하나의 관점에 갇혔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현재도 일상에서 매번 자유로운 관점 이동을 어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 독일 펜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나의 공포로 인해 그에게 무례를 범했을 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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