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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과학책으로 수다 떨기: [[분해의 철학]] 다르게 읽기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3년 6월 2일


1. [[분해의 철학]]은 작년 12월 출간되었다. 그동안 읽은 사람들도 있고 작년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해서 간간이 리뷰가 올라오기도 했다. 역자로서 아무래도 관심을 갖고 읽어보게 되는데, 지금쯤 내가 글 한 편 써도 좋지 않겠나, 싶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잘 이야기되지 않는 지점, 아나키즘에 대해 말하려 한다. 우선 간단히 말하며 시작하자. 이 책은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을,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책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나의 이 말에 대해 좀 과한 해석 아니냐며, 다음과 같이 항변성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만일 당신 말이 맞는다면, 왜 그런 내용을 저자가 책에 명시하지 않았냐고? 맞다. 저자는 책에서 이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직접 말하지 않은 대신 책 전체에 걸쳐 분명하게 표현해 놓았으니까.

2. 나는 이 책이 어떤 면에서는, 끝내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말았던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역사를 넘어서려 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얘기가 되겠다. 그들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한계였다고, 이제 21세기 지구 전체의 위기를 맞아 우리는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은 양자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이 문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오랜 과제기도 하다. 그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통해 초기부터 이 과제를 내세웠고, 한참 뒤에 낸 [[트랜스크리틱]] 같은 책에서도 중심 주제로 다루기도 했다. 물론 두 사람의 차이도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는 독실한 맑스주의자로서의 성격이 강한 반면, 후지하라 다쓰시는 어느 한쪽에 더 비중을 두진 않는다. 그리고 맑스주의나 아나키즘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열려 있는 편이다.


3. 이제 [[분해의 철학]]을 가지고 이 얘길 해보자. 책의 처음에 청소 아저씨가 등장한다. 그는 우리를 훈훈하게 맞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책의 중후반부에 들어가면 독자들은 알게 된다. 청소 아저씨는 넝마주이(4장의 주제)나 6장 ‘수리의 미학’ 등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을. 4장에서 저자는 노골적으로 맑스의 계급론과는 대립되는 이야기를 한다. 맑스가 그토록 혐오했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양가적인,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우호적인, 심지어는 대안적인 계층으로서의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소위 ‘양아치’가 맑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 해당하는 위치를 갖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보며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마지막 대목을 떠올렸다. 푸코는 맑스에게 ‘프롤레타이라트’에 해당하는 존재를 ‘부랑 소년’에서 부여하였다. 마치 [[분해의 철학]]의 대안 존재가 넝마주이, 즉 양아치인 것처럼.

4. 그래서 나는 「옮긴이의 말」에 이렇게 썼다. “4장에서는 부당할 정도로 역사 속에서 폄하당해 온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복권 및 재평가가 이루어지는데, 참으로 통쾌하다. 이런 점에서 본서는 ‘양아치’를 자연계의 분해자들에 비겨도 결코 뒤지지 않을 인류 최고의 분해자로 격상시킨 명예회복서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래, 어떤 면에서는 부르주아보다 더 큰 혐오 대상이었던 양아치들, 하지만 2018년 영화 <김군>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무리들로 재발견되었던 그 넝마주이들의 명예 말이다.”([[분해의 철학]], p.394) 「옮긴이의 말」을 쓸 때는 이 책과 아나키즘의 관계를 너무 분명히 규정하면 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또 그 점에 대해 주목하는 독자들도 일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역자로서 너무 월권을 행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자제했던 것이 못내 미련으로 남았는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앉아 있는 것이다.

5. 그러니까 이 책에서 농민들이 극히 중요한 존재인 것 역시 중요하다. 흔히 맑스레닌주의자들에게는, 비록 룸펜 프롤레타리아보단 못해도,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계급으로 농민과 지식인이 있다. 둘 다 맑스주의 계급론에서는 프티 부르주아에 속하며,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세력으로 상정된다. 특히 농민은 그러한데, 왜냐하면 그 가난하고 무지렁이들인 존재들이 맑스의 계급 분석 틀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이유로, 비록 ‘프티’라는 접두사가 붙긴 하지만 엄연히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것이다. ‘프티’는 ‘작은’이라는 뜻이라서 ‘프티 부르주아’는 흔히 ‘소부르주아’ 혹은 ‘소시민’으로 번역되곤 한다. 동요하는 계급이라는 함의가 있다. 이 계급을 [[분해의 철학]]에서는 어떻게 그리는가!

6. 농민들은 맑스가 통찰한 대로 소유욕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프루동이라면 ‘점유욕’이라 불렀을지도 모를 그 욕망 때문에, 그들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자기 것을 온전히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로봇]]의 작가 카렐 차페크에겐 중요했고 찬양의 대상이었다.

“만일 자신의 곡물, 암소와 송아지, 닭과 거위, 감자를 전부 나눠줘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주 후에는 마을에 기근이 들고, 농촌은 전부 흡수되고, 착취당하고, 비축도 없고, 결국 자기 자신도 기근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쾌활한 농민들 덕분에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다. 이에 대한 설명은 사후적으로 다양하다. 우리 농촌의 기적적인 본능에 의해서, 또는 우리 농촌의 충실하고 순수하며 깊이 땅에 뿌리박은 전통에 의해서, 최종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견, 즉 영세한 농촌 경제에는 공업 분야에서처럼 카르부라토르의 대량 사용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까닭에 농촌에서는 ‘절대’가 맹위를 떨치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같은 설명이 있었다. 어떻게든 설명은 가능하겠지만, 결국 중요한 사실은 경제적, 교역적 구조와 모든 시장의 전면적 붕괴에 즈음하여 농민들은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았다는 점이다.”(카렐 차페크, [[압솔루트노 공장]], [[분해의 철학]] p.172에서 재인용).

후지하라는 차페크의 이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며 인용한 다음, 이렇게 이어 말한다. “시장을 폐지하고 증여 및 분매만으로 성립하는 ‘절대’ 지배하의 ‘공산주의적 실험’ 속에서 농민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농민이 완고하기 때문은 아니다. 토지나 물건에 대한 농민의 집착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쟁기질을 하고 비료를 뿌리고 이래저래 보살피는 농토라는 것은 이미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 과정과 분리되기 어렵게 결부되어 있다. 그토록 소중한 농토가 국가의 소유물로 바뀌어버리는 데 대한 위화감이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농민의 증오를 불러 일으켰다.”([[분해의 철학]], p.172-173).

7. 맑스주의하고는 도저히 양립불가능한 평가다. 단,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맑스주의라는 말도 대단히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방금 전 언급된 내용들이 반드시 아나키즘만의 견해라고는 하기 힘들다. 내가 오래 전에 읽었던 몇몇 글들에서도 이미, 기존에 신조처럼 반복되어 온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성’이 일정하게 해체되어 왔기 때문이다. 가령 고병권은 「우리 시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물음」(부커진 <맑스를 읽자> 2010년 3호)에서 이 문제를 천착했다. 데이비드 하비는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창비, 2011)에서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을 (거의) 폐기하고 여러 계급 및 계층 간에 대등한 연대를 주장했다. 아마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8. 이외에도 [[분해의 철학]]에서 아나키즘의 문제의식,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종래의 오소독스한 맑스주의에 갇히지 않는 문제의식은 책 전체에 걸쳐 가득하다. 부정적인 방식으로는 당장 1장부터가 그렇다. 저자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논하면서 맑스주의의 ‘생산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긍정적인 방식은 훨씬 더 많다. 1장 마지막에서 세타가야 장터에서 폐물이나 중고품들이 팔리는 광경을 르포로 쓴 사람은 저 유명한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다. 책의 중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파브르 곤충기]]를 무지 오래전에 프랑스어 원서를 가지고 번역하려 시도했던 사람 또한 일본의 노동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스기 사카에다.

9.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말하겠다. 첫째, [[분해의 철학]]을 다 읽고 나서 뭔가 불만족스럽게 느끼는 독자들이 꽤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어떻게 하자는 거냐, 이 책은 너무 정치성이 약하지 않느냐 같은 불만. 그런 독자들께는 그의 또다른 번역서 [[전쟁과 농업]]을 권하고 싶다. [[분해의 철학]]보다 훨씬 더 명료하며 넓은 주제를 다룬다. 역시 좋은 책이다. 추천!

둘째, 한 가지 꼭 짚어드리고 싶은 게 있다. 이 책은 그냥 생태주의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보겠다. 생태주의가 가장 위험할 때는 생태의 논리 자체를 전면적으로 실현하려 할 때다, 라는 게 이 책의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나치즘’이라 알고 있는 것의 정체다. 이 책이 역사와 문학과 철학 등을 동원해 복잡하게 에두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지 않고 물리학 중심으로 정의된 생태주의를 곧장 이 세계에 실현하려는 운동, 이 운동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모두 생태주의에 불철저한 태도라면서 배격하게 배제하는 강직한 입장. 그것이 나치즘의 탄생의 비밀이다. 이 문제는 당연하게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5장에서 ‘생태계’ 개념을 논할 때 어느 정도 언급은 하지만 충분히, 명확히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독자들은 지금 저자가 뭘 얘기하려고 이러는 건가, 감이 잘 안 잡혔을 수도 있다. 사실 후지하라는 [[분해의 철학]] 이전에 출간한 또 다른 주저 [[나치의 주방]]에서 이미 이 문제의 주요한 측면을 주제로 철저하게 논한 바 있다. 그런 전력이 있기 때문에 [[분해의 철학]]에서는 간략히 다루었다고 보아주시면 되겠다. 그러니 더 관심 있는 분들은 [[나치의 주방]]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야길 듣자 하니 아직 구체적인 출간 일정까진 안 잡힌 거 같지만, 조만간 우리말 번역서가 출간될 예정이라 하니 기대하시라!


박성관(독립연구자, <분해의 철학>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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