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이 자연본성상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고 혹은 자기를 전달하고자 한다고 짚으면서, 미적인 것이 오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만약 홀로 살아간 최초의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인간은 꽃을 집어 스스로를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일은 오직 타인들과 더불어 있을 때만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꽃을 장식한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하나의 문명이 시작된다(B163). 그러니까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어떤 미적인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하고, 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순전히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인데도, 인간은 그 감정과 느낌이 보편적이기를 바라고 또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에서 모든 것이 걸려있는 결정적인 물음은 항상 다음과 같다. 어떻게 개별적인 것이 동시에 보편적일 수 있는가.
이야기는 개별을 보편으로 만들려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이야기에 대한 열망도 인간의 자연본성에 기인할 것이다. 사람들은 온갖 장소에서 가족, 동료 혹은 불특정다수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를 덧붙인다. 우리는 단지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비밀을 속삭”(64)이는 존재다. 이렇게 속닥대고 수런거리는 이야기의 세계, “생각이 생각을 낳고 지혜가 지혜를 불러오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세상”(77)이 바로 정보라의 세계다. 여기는 바다괴물이 뭍으로 나와 죽음을 먹고 도서관에 물귀신이 나와 책을 적시는데 죽은 사장이 유령이 되어서도 설치다가 외계인 근로자에 의해 에너지로 변환되고 성단연방연합 기계 생명체들이 지구를 점령하는 근데 또 완전히 점령하는 것은 아닌 하여튼 그러한 공간이다.
이러한 세계를 환상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환상적인 것은 결코 귀신이나 괴물이나 외계인이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 문신을 받다 피부가 녹았는데, 문제의 염료를 제조한 업체와 판매한 업체가 각각 다르고 염료를 사다가 타투 기계 안에 넣은 업체와 그렇게 조립된 기계를 판매한 업체와 그 기계를 광고하는 업체가 또 다르며 겨우 찾은 판매자는 통신판매업 신고도 하지 않고 세관 신고도 하지 않아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데 수사하는 경찰이라고는 애꿎은 피해자들에게 그러게 “문신 같은 걸 왜 했습니까?”(302)라고 묻는 황당한 상황이, 공공도서관이 노키즈존이라는 사실이, 부당해고를 은폐하기 위해 근로자들에게 남발되는 소송전이, 몸을 기계로 바꿔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잔혹한 자본주의 사회가, 국가보안법을 발효하여 군인들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잡아가는 세계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터무니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환상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나 환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오히려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다. 정보라는 예민한 시선으로 현실의 환상적 속성을 이야기하고,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소설은 환상소설의 지위를 가진다.
정보라의 소설에서 윤리적인 맥락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각각의 단편마다 성소수자의 스펙트럼,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가입, 장애인 차별, 이주노동자 혐오, 여성에 대한 폭력, 사이비 종교의 범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탈인간화 등등이 명시적으로 다뤄진다. 이는 작가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 보다 정확히 말해 데모와 투쟁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가 항상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처럼 『작은 종말』도 윤리적인 메세지로 충만하다. 이를 통해 메세지의 수신자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참조자에게는 함께 참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출처 :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NDR 1 Niedersachsen
그러나 누군가는 정보라가 투쟁만을 얘기할 뿐 소설 속에서 어떠한 실현 가능한 미래도 묘사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다. 올바르다고 믿는 바를 그저 소리높여 요구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고, 보다 진지한 지성인이라면 현실의 다양한 조건들을 이해하고 갈등을 원만히 조율하여 좀 더 현실적인 미래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 입장에서는 여전히 큰 세력을 이루는 보수 기독교계와의 사회적 합의 없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어렵고, 노란봉투법은 사용자의 자유로운 경영 활동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 탈시설은 거액의 예산이 필요하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 보다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현실이 이렇게 다양한 믿음들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을 진데 정보라는 무책임한 윤리만을 말할 뿐 어떠한 구성적인 미래상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분명 옳다. 확실히 정보라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13). 그러나 그 비판이 놓치고 있는 것은 윤리란 애초에 어떠한 미래도 약속하지 않음에 그 본질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정치인 콩스탕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의무라는 윤리적 원칙은, 만약 사람들이 이를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낱낱이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회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비판을 칸트에게 제기한다. 살인자가 칼을 들고 친구의 위치를 묻는 순간에서조차 칸트는 우리가 진실하기를 요구하고, 이는 실로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판에 대한 칸트의 응답은 바로 그 터무니없음을 계속해서 고수하는 것이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의무라는 윤리적 원칙은 미래에 발생할 이익이나 손해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준수되어야 할 무조건적 명령이다. ‘자기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권리’에 있어서 칸트는 어떠한 현실적인 조건과 이해관심에도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설령 사회를 불가능하게 만들더라도, 모든 가능한 미래를 포기하고서라도 우리는 언제나 진리만을 요구해야 한다. 이 비상식적인 과도함이 윤리의 본질을 이루며, 그렇게 우리는 정보라와 함께 “지속성, 안정성, 확정된 의미를 약속하지 않는 미래”(22)에 당도하고 말 것이다.
칸트가 증명을 둘로 나눴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하나는 사실증명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 연역”이라고도 불리는) 권리증명이다. 사실증명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개념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다룬다. 반면 권리증명은 그 개념을 어떤 권리로 소유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타당한지의 문제를 다룬다. 칸트 철학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늘 후자의 연역이었고, 정보라 또한 유토피아에 대한 사실증명이 아니라 권리증명을 하고 있다. 누구나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다양한 현실적인 조건들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논하지만, 정보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게 정말로 유토피아가 합당한지 그러니까 인간이 진정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자격을 지니는지를 물으며, 결정적인 내기는 이 두 번째 물음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설령 유토피아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이 유토피아를 누리기에 충분한 존재인가? 유토피아가 인간에게 허락될 수 있는가? 그러할 것이다. 오직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해, 고통받는 타인을 위해, 보다 윤리적인 세계를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따라서 “자본주의 타파하고 지구를 지킵시다 투쟁”(속지)은 그 자체로 유토피아에 대한 권리증명이며, 『작은 종말』에서 우리는 유토피아에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수많은 인물들과 마주친다.
2.
정보라의 세계 내에서 타자는 둘로 나뉜다. 동지 아니면 적. 각각의 단편에서 서술자는 유무형의 폭력 아래에서 신음하되 그럼에도 맞서 싸우는 어떤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다른 또 하나의 타자는 (당연하게도) 그러한 유무형의 폭력을 가하는 주체다. 동지와 적. 이 두 타자는 소설 속에서 서로 섞이지 않고 분명하게 구분된다. 문제는 두 번째 타자가 그러니까 폭력적인 적이 여기서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말을 하기는 한다. 그들은 퀴어문화축제를 따라다니면서 동성애는 죄라고 외치는 사람들, 근로자들을 착취하고 부당하게 해고하며 여차하면 소송을 남발하는 공장주, 이익에 눈이 먼 사이비 교주,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 나아가 “회색 형체들과 일제히 동시에 소리를 맞춰 말하고 일제히 동시에 미소 짓는” “기괴한”(134) 기계 생명체들이다.
그러나 이 타자들이 진정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타자들은 그저 “잘못된 구닥다리 주장”(19)을 하는 “자신들이 잘 모르고 알고 싶지 않은 일은 전부 죄악이라 외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12)이고 “차별을 좋아하는”(210) “비겁한”(19) “인종차별”(83)자이며 “난폭하고 무례한”(197) “한심한 존재들”(213)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쓸 줄도 모르는 기계 덩어리를 몇 개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가 대단하다고 착각하며 무례와 폭력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존재 이유의 전부인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고 초라한 존재”(213)라고 서술자에 의해 규정될 뿐이다. 게다가 “침을 흘리며 넋이 나간”(140) 채 “움찔움찔”(136) 경련하며 오류를 일으키는 기계 생명체는 두렵다기보다는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정보라의 세계에서 적은 진정으로 섬뜩하지 않고 순전히 두렵거나 같잖을 뿐이며, 순전한 두려움만으로는 하이데거가 짚었듯이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보라의 글에서 타자가 이렇게 얇은 까닭은 그가 글에서 조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급함이 (원래는 장점이었을) 정보라의 문체와 만나 일종의 과잉을 만들어내는데, 누가 보더라도 초라하게 서술된 적에게 초라하다고, 비열하게 서술된 적에게는 비열하다고 논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얇은 묘사와 과도한 추임새는 서술자의 입장에 이미 동의하는 사람에게는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의 재확인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정보라의 조급함은 인물에도 반영되어 있어서 모든 인물들이 ‘이미’ 강직하다. 인물은 사건을 마주치기 전에 이미 완결되어 있기에 복잡함 안에서도 “집요하게 올곧음을 지향”(371, 이서영)할 수 있고 따라서 인물에게 주어지는 어려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시련이 되지 못한다. 덕분에 남은 일이란 사건을 잘 뚫어내는 것 그뿐이다. 이는 흥미진진할 뿐 진실로 위태롭고 매혹적이지는 않다. 모든 인물들이 고집스럽게 신념을 지키고 목적지에 빠르게 도달하는데, 그러한 성취는 그 자체로 기쁜 일이지만 정보라가 바라 마지않은 결론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의심스럽다. 예컨대 표제작 「작은 종말」에서 “자기 몸속에서 자기 세계에만 틀어박혀”(140) 있는 인간 실존이 외롭지만 그럼에도 “고유하고 존엄한 존재”(158)라는 결론은 참을성 있는 시선을 통해 그 자체로 입증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뚤어진 입술에 굳어진 비웃음을 매단 채 정지해 버린 가면 같은 표정”(141)으로 하나로 연결된 기계 생명체들이 얼마나 비루하고 몽매한지에 의존하여 입증된다. 다시 말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 의식이 대립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증될 뿐 직접적으로 밝혀지지 않으며, 후자를 위해서는 지난한 참을성이 필요한 것이다.
정보라와 달리 메리 셸리는 일반적인 공포 소설가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을 벌인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우리가 괴물의 시선에서 보고 느끼고 기뻐하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 괴물은 소설 속에서 순전히 타자로 남지 않고 주체화된다. 이를 통해 『프랑켄슈타인』은 여타의 평범한 크리처물과 달리 공포를 넘어선 공포를 달성하는데, 괴물과 우리 사이를 가르는 한계선은 사실 그것의 기이하게 불쾌한 외모뿐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괴물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 괴물인 것은 아닌가?’ 바로 이 실존적이면서 편집증적인 질문에 진정한 섬뜩함이 놓여있다.
따라서 「작은 종말」에서 두려운 것은 삐거덕거리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트랜스휴먼 기계체들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두려웠어야 할 것은 ‘어쩌면 기계체의 삶이 궁극적인 희망을 약속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 다시 말해 ‘기계가 인간의 진리인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다. 이는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스멀스멀 기어나와 ‘어쩌면 혹시?’의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 질문, 나의 전 존재를 건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반면 주인공 ‘상’은 이러한 섬뜩함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곧바로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상’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는 「작은 종말」이 진정한 공포로 넘어가지 않게끔 방어하는 안전핀으로 기능하고 이는 그 자체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 도약은 적법하지 않다.
정보라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저주토끼』에 수록된 단편 「머리」를 보자. 거기서 두려움은 변기에서 배설물로 이루어진 머리가 솟아나기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 ‘그녀’가 변기에 강제로 처넣어져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머리」가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작품인 까닭은 나와 똥이 실제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신의 산물에 책임지지 않는 나는 실상 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리하여 똥인 나는 똥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급한 도약 없는 엄격한 필연성이 「머리」에는 흐르고 있다. 나는 정보라에게서 유토피아가 돌이킬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필연성으로 연역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초조한 발걸음은 진실로 정보라의 윤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성은 끈질긴 인내심으로부터 나온다.
3.
다시 최초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개별적인 것이 동시에 보편적일 수 있는가.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모르는 외국인이 다가와서 모르는 언어로 모르는 말들을 쏟아내던 때가. 어떠한 의미도 전달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열심히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전달되고, 어쩌면 바로 그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사로잡혀 그의 말을 듣는다. 정보라의 이야기도 이와 같아서 거기서 한때 인간이었던 흡혈인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이 기계와 맞서 싸우고(『밤이 오면 우리는』) 저주토끼가 서류를 뜯어먹고 건물도 씹어먹다가 뼈도 긁어먹고 뇌도 갉아먹는다(「저주토끼」). 이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에서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안간힘을 다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려고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내가 느끼는 바와 너가 느끼는 바가 같은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어서 각자가 각자 속에 갇힌 채 외롭고 개별적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너에게 말을 건다는 것, 내가 너로 향하고자 한다는 것, 너와 무언가를 공유하고자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전달된다. 소통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개별은 광범위하게 확장됨으로써 보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개별은 저마다의 부정성을 근거로 하여 결속될 수 있고 그리하여 보편성의 차원을 획득한다. “다른 인간이 겪었고 겪고 있는 신체와 정신의 위협을 내가 완전히 똑같이 경험하지 않았다 해서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 완전히 같은 지향이나 완전히 같은 경험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15). 동일한 표어를 내걸지 않고서도, 하나의 구성적인 미래를 약속하지 않더라도, 무엇이 참을 수 없는지, 무엇이 부당한지, 무엇이 책임져야 하는지 각자가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타인과 함께 결집하고 연대한다. 그 타협 없는 연대 가운데 정보라가 있다. 유토피아에의 권리를 증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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