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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Practice의 “프랙티스”: 직업을 넘어선 실천 / 김보슬

언젠가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어느 일본인 디제이는 도쿄에서 10년 넘게 Light Mellow Summit라는 디제잉 이벤트를 열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행사장이 아닌 곳에서 긴 대화를 갖기는 처음. 그동안 궁금했던 그의 본업을 물어보았다. 음악계 종사자는 아니었다.

이날 우리가 앉아 있던 곳은 최근 ‘힙하다는’ 디제이들이 다녀가며 DJ Set (자신만의 레코드 모음으로 파티나 모임의 음악을 연출하는 시간)를 여는 레코드바였다. “라얀ラーヤン 씨도 다음에는 여기서 음악을 틀면 어울리겠네요.”라고 했더니 자기는 아마추어라서 이런 명소를 넘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가? 주인도 아닌 내가 그에게 기회를 허락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추어에 대한 나의 의견을 꺼내놓았다.

“예술 작업이든, 취미 활동이든 직업과 별개로 뭔가 창의적인 걸 꾸준히 하시는 분들을 저는 더 존경합니다. 라얀 씨처럼요. 직업이 아닌데도 어떤 일을 계속 한다면,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열망하는 세계를 주도적으로 실천한다는 거니까요. 제가 느껴 온 바로는 전공자로서 예술 교육만 집중적으로 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수동적으로 예술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아요. 전업 예술가가 반드시 탁월성 때문에 부여되는 지위는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직업인들은 생계가 유지된다는 안정감 위에서 계속 도전할 수 있으니 주도력이 생기잖아요.”

[서울 방문 중 DJ Set를 진행하는 라얀]

우리는 암암리에 프로가 아마추어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 활동을 직업으로 삼으며, 경제적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경험 면에서 그 둘 사이에 추월이 일어나기도 한다. 결코 이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프로-아마추어 간 통념적 위계를 전복시키려다 보니, 나는 어쩌면 프로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마추어의 자유, 그것이 보장하는 꾸준함, 그 꾸준함이 만드는 깊이에 라얀도 공감을 표했다.

위에 옮긴 대화에 ‘실천’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나는 이즈음 예술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는 예술을 실천하는 비전업 예술인들이 많다. 소방관이면서 미술 비평을 하거나, 장례지도사인 동시에 무용 퍼포머이고, 게임 회사 프로그래머이면서 안무를 하고, 약사이면서 디제이로 활동한다. 이들의 정체성은 이들의 직업으로만 대변되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대중음악계에서도 증권맨이면서 음반을 내어 잘 알려진 가수 김광진 같은 사람도 있다. 이런 이들은 제법 많다. 전문 예술인으로서 생계형 예술에서 탈피하고자 차후에 다른 직업을 찾아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애초에 예술과 비교적 거리가 먼 분야에 안착한 뒤 예술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을 놓지 않고 예술계의 울타리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양편 모두 주어진 처지를 수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저런 이유들을 ‘무릅쓰고’ 예술을 펼쳐 나간다는 점에서 이들의 움직임은 명백히 용기 있는 실천이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내가 미국에서 전공한 분야는 Public Practice였다. 이것은 한국어에서는 흔히 ‘공공예술’로 일컬어지는데, 공공예술은 공공장소나 도시처럼 사회적/정치적 맥락이 담긴 공간을 캔버스로 활용하는 예술 장르다. 이 장르의 내용이나 역사를 차치하고 지금은 그 명칭을 문득 환기한다. 학과명을 'Public Practice'로 정한 곳은 전 세계에서 단 한 곳뿐이다. 그러면 다른 학교에서는 유사한 분과를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에서는 'Art Practice', 포틀랜드주립대학교에서는 ‘Art and Social Practice’,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는 ‘Public Art Studies’, 홍콩중문대학교에서는 'Socially-Engaged Art',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는 'Public Art and New Artistic Strategies'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의외로 'Public Art'라는 기본형은 찾기 어려운데, 광장이나 거리의 조형물 생산 중심이었던 제1세대 공공예술의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전주대학교가 기존 미술학부의 일부를 '도시환경미술학과'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시도가 있었으나 해당 과는 2009년도에 폐과되었다.)


 [공공예술 관련 학과가 개설된 국가별 대학 및 학과명]

이처럼 제각기 다른 이름이 등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상품 브랜딩이나 학술 개념에서 그렇듯 고유한 이름짓기를 통해 차별화된 지향점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미국 서부 대학들에 위치한 Public Practice, Art Practice, Art and Social Practice 학과는 모두 ‘Practice’, 즉 ‘실천’이라는 말을 포함한다. 실천이라면 실용성과 연관짓기 쉬울 텐데, 산업 분야에 적용되는 응용예술을 뜻하는 ‘Applied Art’와는 확연히 다르다. 응용예술은 실생활에서의 기능성과 심미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공공예술은 공공공간을 전제로 접근성과 상호작용을 더 중시한다. 갤러리의 좌대나 전시장 쇼케이스에 갇혀있던 예술을 광장으로 끌어내고, 광장에서 골목 안으로 다시 끌고들어가는 것이다. 언급한 학과들이 내세운 프랙티스는 이런 맥락에서의 실천이다.

그동안 나는 나의 전공명을 이력서 같은 데 한국어로 적을 때마다 편의상 '공공예술'로 적었다. Public Practice의 알맞은 한국어 번역은 무엇일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읽는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면 '커뮤니티아트', '마을만들기', '도시재생', '어바니즘' 등 연관 분야를 거론하면서 그 유사성에 기대어 설명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든다. 'Public Art'를 벗어나 'Public Practice'라는 말로 조명할 수 있는 특징을 외면해 오지 않았나. 학내에서는 Public Practice를 Public과 Practice,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Private ↔︎ Public의 대립 구도, 또는 Theory ↔︎ Practice의 대립 구도를 두고 수많은 토론이 오갔지만 졸업 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나는 나의 일상 속에서 이 프랙티스의 의미를 되새김질 한다. 이제 내게 이것은 직업과 무관하게 뭔가를 감행할 수 있는 용기와 진득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예술가들이나 문화기획자들 사이에서 “예술로 먹고 살기”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그러나 나는 예술이 먹고 사는 수단이기보다는 단순하고도 충실한 실천의 영역이길 바라고 있다. 비전업 예술가들은 이질적인 두 세계 (직업과 취미) 사이를 왕복함으로써 사회와 폭넓게 상호작용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예술의 접근성을 조정하며, 이를 통해 예술의 공동체적 기능을 확대할 수 있다. 생활문화라는 이름으로 일상에서의 창조성을 장려하는 현재 우리나라 문화 정책은 아마추어리즘을 지속시키기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취미와 여가와 ‘덕질’로서의 예술이 부디 그런 지원사업에만 의존하지도, 그 안에만 머물지도 않으며 마구 튀어나가면 더욱 좋겠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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