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퀴어란 낯설고 이질적이며 드문 존재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어디에나 있어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분명한 주체이기도 하다. “이성애 제국”인 한국 사회에서 퀴어는 소외되거나 감춰졌으나, 때로는 필요에 의해 공적인 자리로 불려나오기도 했다. “퀴어는 없다”라는 정체불명의 거짓 신화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에서 퀴어는 오랫동안 숨죽인 채로 겨우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퀴어는 곤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역동적으로 부각하 정치와 문화의 현장을 종횡무진하는 주역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간에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때 ‘과거’는 매우 중요한 기제임이 분명하다. 퀴어로서의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존재 조건이나 변화의 모습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추동된 총체적인 운동 양상을 통해서만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퀴어 개인의 실제 삶과 동떨어진 거대한 사회의 구조나 제도만을 말하는 데 목청을 돋우는 일은 한국의 퀴어 문화를 이해하는 데 온전한 시각을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사회의 변동과 제도의 압력은 제쳐두고 퀴어 개인의 삶만을 지엽적으로 관찰하는 것 역시 한국의 퀴어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러니 한국 사회라는 ‘복잡계’와 한국 근현대사라는 ‘혼란기’를 가로지르며 살았던 퀴어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치밀한 관점을 갖춘 연구자의 폭넓은 발품이 필요한 셈이다.
토드 A. 헨리가 편저한 퀴어 코리아는 한국 근현대사를 퀴어적 관점으로 재구성해보려는 여러 연구자들 공동의 노력이 담겨 있는 책이다. 부제이기도 한 ‘주변화된 성적주체들의 한국 근현대사’처럼 다양한 관찰과 정교한 분석을 통해 숨겨진 비규범적 젠더주체들의 존재와 활동을 새로 발견하고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상의 소설 「날개」를 퀴어 서사로 다시 읽는다든, 식민지 시기 말 총력전 체제 하에 발표된 문학 작품 속에서 이중삼중으로 억압된 젠더 질서의 부당함을 폭로하기도 한다. 또한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는 물론 산업화와 민주화 이행 단계에서 다양한 이유와 사정으로 감춰졌던 퀴어의 흔적들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 책은 온갖 훼방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퀴어들이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을 드러내고 분연히 나타나, 한국 사회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젠더 문화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연구자의 언어 조건에 따라 영어로 쓰인 글들도 많다. 그런데도 마치 원래 한국어로 쓴 것처럼 매끄럽게 읽히는 점은 매우 놀랍다. 특별하게 공들인 섬세한 번역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용례에 맞게 정교하게 구분돼 사용되는 젠더 용어와 바로 오늘 이태원이나 종로 등지를 찾아가도 거리에서 들을 수 있을법한 첨단의 퀴어 용어들이 학술적 품격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공통적이고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책의 공저자들이 보여준 학문적 성취와 문화적 탁월함이 독자들에게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번역 작업을 맡은 ‘성소수자 대학원생’과 ‘신진연구자 네트워크’의 공로 덕분이다.
억압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싹튼 퀴어 문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소위 LGBTI라 칭해지는 비규범적 젠더주체들의 등장과 출현이 그저 돌연하고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일상성의 범주에서 이미 존재해왔던 상례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퀴어는 역사성과 지속성을 갖춘 우리 안의 일부이자 바로 곁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어와 퀴어 문화는 정상성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공동체 내에서 승인받지도 환영받지도 못했다.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양성규범의 젠더 질서 하에서 퀴어는 비가시적인 존재가 될 것을 강요받았다.
‘식민지’와 ‘전쟁’과 같은 민족 공동체 전체가 처한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퀴어는 가장 먼저 단죄되거나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호명됐다. 분열을 극복하고 정상성을 회복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희생 제의의 일부로서 퀴어는 끊임없이 소환돼 사회적 살처분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급진적인 사회변동 과정에서 소진당할 운명에 처하지 않기 위해 퀴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부인하거나 공식적으로 성적 지향을 드러내길 저어하게 됐다. 이렇듯 퀴어 문화의 주변화와 고립화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퀴어는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혼란과 분열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희생양으로 불려나오는 모순적인 상황이 반복 지속됐다. 퀴어의 존재성이 비자율적으로나마 드러날 수 있는 맥락은 사회적 위기 상황과 깊게 연동돼 있었다. 자유로운 정체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존중받지 못하면서도, 사회의 보편적 규범과 일상 문화와 긴장된 예속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퀴어의 아이러니한 운명은 이렇듯 비루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데올로기 대립 심화와 정상성 강박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확보했다고 여겨지는 예술과 학술의 장 안에서도 퀴어는 소외되고 박해받았다. 문학과 영화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한국 문화 시장의 오랜 성적 보편 지향 전통은 퀴어 문화를 생략하거나 소거하는 관습을 탈피하지 못하게 했다. 한국 문화장에서 표출 가능한 리버럴리즘 혹은 도전과 저항은 ‘반체제 운동’, ‘노동 해방’, ‘민주화 투쟁’의 서사로만 변주될 수 있었다. 퀴어 문화는 진보적인 정치 지향을 가진 이들에게도 일종의 ‘허들’ 혹은 ‘임계’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성 젠더 규범의 합목적성을 지속하기 위한 의도에 예속된 상황에서 퀴어는 문학, 영화를 비롯해 온갖 미디어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그 존재성에 대해 비정규적인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퀴어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고충과 난관을 이겨내고 기어이 살아남은 퀴어 문화는 사회 곳곳에 움을 틔우고 자리를 잡았다.
퀴어 코리아는 바로 이 지점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자 한국의 퀴어 문화에 대한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젠더감각의 성숙 및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퀴어 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태도를 통해서만 보충될 수 있다. 편저자 토드 A. 헨리가 밝힌 이 책을 쓴 목적처럼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평화와 행복을위해서 그리고 속히 도래할 해방을 위해서”라도 한국의 퀴어 문화에 대한 독자들의 지속적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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