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내 초등학교 땐가 중학교 때 교과서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도데의 「별」을 교과서에서 읽었다. 거기 나오는 지체 높은 가문의(?) 소녀가 양치기 소년한테 “어머나, 별들도 결혼을 하니?”라고 묻는 그 전설의 단편 소설 있잖은가? 지금은 두 작품 다 책에서 빠진 건지, 아이들에게 소설 이름 대고 물어보면 청명한 눈망울에 첨 듣는 듯한 표정뿐이다. 「마지막 수업」의 한 부분을 보자.
선생님은 정장을 하고 계셨으며, 오젤 노인 등 마을 사람들이 같이 와 앉아 있었다. 모두가 슬퍼 보였다. 엄숙한 음성으로 “여러분,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와 로렌의 초등학교는 독일어만을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왔습니다. (···) 오늘은 여러분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입니다. 열심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의 부제는 ‘한 알자스 어린이의 이야기’고 작품 발표는 1871년이다. 왜 알자스고 왜 1871년인가?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1870년-1871년 전쟁에서 붙었다가 참패해 알자스 대부분과 로렌의 동반부를 독일에 병합당했다. 이 지역은 농산물도 풍부하고 양질의 철광석과 석탄이 매장되어 예로부터 두 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쟁탈장이 되었다. 1870년대는 서유럽이 피에 물든 마수를 뻗쳐 세계를 약탈하는 제국주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후발 제국주의인 독일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전격적인 승리를 거둔 뒤 알자스-로렌 지방을 중심으로 제철 공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철광석에서 철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높은 온도의 열을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가해야 하는지를 정밀하게 알아내야 했다.
2.
가열된 물체의 온도와 그 물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빛깔의 관계. 19세기말 백열전구 개발 경쟁에서도 이 문제로 불꽃이 튀었다. 그냥 전구가 아니라 백열전구다. 백열(白熱)은 새하얗게 타오른다는 말이다. 책에 따라서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다고 써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전구는 한참 전에 이미 발명되어 있었고, 다만 실용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관건은 필라멘트가 타버리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새하얗게 타오를 수 있느냐였고 이 레이스에서 확연한 승리를 거둔 게 에디슨이었다. 백열전구의 짧은 역사를 포함해서 특허 도둑놈이었던 에디슨이 명실상부한 발명가로 변신해 가는 과정은 일렉트릭 유니버스라는 책에 잘 적혀 있다.
3.
청동기 시대부터, 아니면 늦어도 철기시대 이래로 인류는 쇠를 달구면 쇠에서 빛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온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몇도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농기구나 칼을 강하면서도 쉬이 부러지지 않게 만드는 담금질 같은 짓을 어떻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연금술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겠지. 그런데 18세기말 발발한 산업혁명을 계기로 철 경쟁이 시작되었고 유럽 각국은 역대급의 철 과학을 필요로 했다. 특히 1870, 80년대는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침략을 위해 곳곳에 철도를 까는 데 광분한 시기였다. 철도 관련 주식 투기 때문에 대박과 쪽박의 희비가 교차되었고 오죽하면 유럽에서는 <회사령>이 공포되어 회사 설립을 제한하기까지 했겠는가!
4.
이제 과학자들 이야기를 하자. 먼저 독일의 물리학자 키르히호프(1824-1887). 잠시 이 사람의 생몰연대를 보면서 그의 전성기를 가늠해보자. 일본이 미국에게 개방당한 1854년과, 그런 일본에게 조선이 개방당한 1876년이 얼추 포개어질 것이다. 대략 감이 온다. 그런 키르히호프가 1860년 ‘흑체’ 개념을 창안했다. 양자역학의 핵심 계기가 되는 ‘흑체 복사’의 그 흑체다. 흑체? 가발이나 머리에 뿌리는 약 같은 거 떠올리면 안 된다. 그건 흑채고 여기는 흑체, 즉 Black Body다. 그리고 여기서 복사는 copy가 아니고 radiation이고. 복사는 전도 및 대류와 함께 열이 전달되는 메커니즘의 하나다. 참고로 복사(輻射)에서 ‘복’은 바퀴살 복자다. 자전거 바퀴나 그 옛날 수레바퀴를 보면 바퀴살들이 바퀴 중심으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마구 뻗어나간다. 결국 흑체 복사란 흑체에서 열이 방사형으로, 마구, 전방위로 방출되는 걸 뜻한다.
아, 하나 더 추가하자. 전도는 한 물체의 열이 그와 접촉한 물체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고, 대류는 기체나 액체처럼 유동성 있는 유체 내에서, 온도차에 의해 생겨난 유체의 흐름에 의해 열이 전달되는 것이다. 주전자에 물을 끓일 때 먼저 뜨거워진 주전자 바닥쪽 물이 위로 올라오고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의 위쪽 물이 아래로 내려오는 그 현상 말이다. 그렇다면 복사란 무엇인가? 주변의 물체나 유체 등을 매개로 이용하지 않고, 그냥 물체의 열이 사방팔방으로 방출되어 나가는 것이다.
5.
자. 그럼 오늘의 핵심, 흑체란 무엇인가?
쇠가 달구어지면 온도에 따라 다채로운 빛깔을 방사하는데, 과연 몇 도일 때 무슨 빛깔이 뿜어져 나올까? 그 옛날 연금술사들이나 노련한 대장장이들은 목욕재계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나름 정밀하게 때려 맞혔다. 그렇지만 1880년대에 요구된 건 겨우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파장과 주파수 개념 등이 잡혀 있었고 패러데이-맥스웰에 의해 전자기학이 확립된 상태였다. 물론 그 옛날의 도자기공들도 “같은 온도의 뜨거운 물체들은 똑같은 색깔의 빛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키르히호프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그가 이 대목에서 발상의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의 종류나 형태에 관계없이 같은 온도의 물체에서는 같은 빛깔이 방출된다면, 객관적이고 확실한 기준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 가열했을 때 모든 열을 완벽히 모조리 죄다 흡수하는 물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얘는 열을 모두 흡수하니까, 그래서 어떤 열도 반사하지 않으니까 블랙홀처럼 까말 거야. 그러니까 블랙홀이라고 하....면 좋겠지만, 블랙홀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1915, 1916년) 이후에나 등장하는 개념이니까 아직은 나올 차례가 아니다. 그냥 Black Body, 즉 흑체라 했다.
그러니까 흑체는 모든 열을 다 흡수한다고 가정된 이상적인 물체다. 그럼 현실에는 아예 없는 건가? 그렇지만은 않다. 숯이나 그을음, 백금흑(白金黑) 등 흑체에 거의 가까운 물체들은 많다. 특히 과학자들이 제작하려던 흑체는 절연체(즉, 부도체)로 만든 통이었다. 통 안은 비어 있고 구석 어딘가에 극도로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절연체는 전기나 열에 대한 저항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전기나 열이 거의 빠져나가지 않는다. 절연체로 만든 이 통의 극미한 구멍 속으로 열을 뿜어대면 그 열이 100% 흡수되고, 흡수된 빛은 그 통 안에서 끊임없이 이 벽 저 벽에 반사될 것이다. 이 통 안의 광경은 어떤 것일까? 온통 빛뿐인 세상, 빛과 빛이 부딪칠 뿐인 광명한 세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 흑체가 심하게 달궈지면 흑체로부터 해당 온도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들이 모두 방출될 것이다. 온도가 달라지면 방출되는 빛들의 파장도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도별로 어떤 파장들이 방출되는지를 객관적이고 필연적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다. 파장의 크기란 곧 빛깔을 가리키니 드디어 인류는 물체의 온도와 빛깔의 정확한 관계를 틀어쥐기 직전에 온 것이다.
오늘은 흑체복사까지밖에 얘기 못했는데 벌써 황급히 끝내야 한다. 다음 달에는 흑체복사와 막스 플랑크다. 양자역학의 서곡이 울려퍼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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