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반세기 간 유럽 계몽주의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첫째, 프랑스 및 독일을 넘어 유럽 각지로부터 다양한 양태의 계몽주의를 발굴하는 방향으로의 지리적인 확장이다. 둘째, 철학(자) 중심의 계몽주의 이해로부터 실천적인 논쟁을 포함한 여러 담론적 층위의 변화를 살펴보는 방향으로의 이행이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의 형성과 정치경제담론의 대두는 이와 같은 계몽주의 연구의 성장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계몽주의 연구사의 변화를 조망하는 이번 연재는 또 다른 두 가지 물음에 답변하고자 한다. 종교, 특히 기독교 전통과 계몽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18세기 유럽에서 문화적으로든 정치경제적으로든 가장 번영한 지역이었던 잉글랜드에는 계몽주의가 없었는가?
계몽주의 연구의 ‘종교적 전회’와 ‘초기 계몽주의’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계몽은 기독교·교회와의 투쟁을 통해 보수적인 비합리성을 극복하려는 합리적인 이성의 운동과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명한 상식처럼 박혀 있는 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구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종교개혁에서 유럽 전역을 휩쓴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는 16-17세기와 18세기의 관계를 그렇게 쉽게 칼로 잘라내듯이 구별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들여다본 적이 있다면, 역사에서 한 사회의 ‘정신’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깔끔하게 도약하는 일 따위는 없다는 냉정한 회의주의자의 시선을 체득하게 된다. 계몽주의 연구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확장되면서, 종교전쟁의 시대와 계몽의 시대 사이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종교와 계몽의 관계를 깊이 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종교와 계몽주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개혁과 내전을 거치며 유럽의 기독교는 단순히 보수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집단들이 공존하는 매우 복잡한 대상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수많은 (종종 합종연횡하는) 종파들로 구성된 기독교는 학술활동과 논쟁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제도·네트워크들의 집합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치·안정을 정당화하는 담론 못지않게 현재의 통치자를 규탄하고 그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는 담론적 무기의 원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내부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는 지식은 오늘날 우리가 계몽의 일부로 규정하는 많은 지식인·문인에게도 중요한 지적 자원이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휴 트레버-로퍼는 1967년 발표한 논문 「계몽주의의 종교적 기원」(The Religious Origins of the Enlightenment)에서 국제적 칼뱅주의 네트워크의 아르미니우스파·소치니파, 가톨릭 “에라스뮈스주의”(Erasmianism)와 같은 관용적인 기독교 지식인들로부터 종교전쟁 이후 계몽사상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18세기와 계몽주의를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는 세속화 과정으로 보는 고전적인 해석에 도전을 제기하는 흐름을 본격적으로 주도한 것은 1990년 전후의 영국사 연구였다. 1985년 J. C. D. 클라크는 20세기 후반 영국사 연구에서 가장 도발적인 저작 중 하나로 악명높은 『잉글랜드 사회, 1688-1832』(English Society 1688-1832)를 출간했다. 책은 장기 18세기 잉글랜드를 여전히 왕권과 잉글랜드국교회가 지배하는 ‘구체제’(ancien régime)로 규정하면서, 이 시기 교회와 종교가 쇠퇴했다는 19세기 이래의 통설을 신랄하게 논박했다. 트레버-로퍼의 뒤를 이어 신교 세계에서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무신론자·이신론자가 정통기독교에 대항하는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을 대체하여 상이한 종파 사이의 긴장과 협력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구도를 복원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17세기 후반 이래의 영국 사회는 그러한 구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초기 근대 종교·교회사 연구의 축적이 계몽주의 연구에 끼친 직접적인 결과물 중 하나는 ‘초기 계몽주의’(early Enlightenment) 범주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주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성경 비판 및 교회사 서술을 비롯하여 기독교 안팎에서 축적된 지식이 ‘계몽주의적 문제의식’에서 활용되고 변모하는 양상을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물론 종교적 관용, 국가·교회·시민사회의 관계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지적 실천들이 이전 시대부터 지속된 기독교 인문주의의 연장선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초기 계몽주의라는 범주 자체에 회의를 표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여전히 국가와 종파(들) 사이의 관계가 언제든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던 시대의 까다로운 종교-정치적 맥락의 연구를 풍성하게 하고, 무엇보다 계몽주의 연구의 외연을 크게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잉글랜드계몽주의’의 발견: 휘그파, 교회사, 학술사
철학에서 정치사상으로, 다시 또 종교적 언어로 계몽주의 연구가 확장되는 과정은 한 가지 예기치 못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잉글랜드계몽주의”를 하나의 학문적 범주로 성립하려는 일련의 시도였다. 기존 계몽주의 해석에서 잉글랜드는 베이컨이나 로크와 같은 몇몇 중요한 인물이나 이신론적 전통 외에는 별다르게 다뤄지지 않았다. 프랑코 벤투리 역시 스코틀랜드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달리 잉글랜드에는 딱히 계몽이랄 게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벤투리에 반론을 제기하여 잉글랜드에도 고유의 계몽주의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논의들이 뒤따랐다.
잉글랜드의 계몽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으며, 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별다른 정당화 없이 잉글랜드에 계몽이 존재한다고 당연하게 전제하는 많은 논자를 제외하면, 크게 네 가지 입장을 식별할 수 있다. 첫째,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는 로이 포터(Roy Porter)의 『근대 세계의 창조』(Enlightenment: Britain and the creation of the modern world, 2000)와 같이,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세속화로서의 계몽주의가 전개되었다는 주장이다. 둘째, 전자와 같이 세속화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거부하면서, 대신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성행했던 (비주류 혹은 일부 휘그파의) 급진적 “자유사상”(Freethought), 즉 국교회체제 및 사제계급 비판론으로부터 계몽의 기원을 찾아내려는 입장이다. 셋째, 국교회 성직자 및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평신도 지식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잉글랜드 계몽의 중핵은 다양한 종파의 공존을 인정하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개혁론에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앞서 언급한 J. C. D. 클라크처럼 애초에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세속화 과정으로서의 계몽은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의 스펙트럼 한쪽 끝에는 세속화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시각이, 다른 쪽 끝에는 세속화 자체를 부인하는 견해가 자리한다. 18세기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사회 중 하나이면서도, 정치·제도와 지식·담론 모두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지속하는 곳이기도 했다. 탈기독교와 근대적 발전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는 세속화 테제를 손쉽게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잉글랜드 계몽주의를 규정하는 하나의 지배적인 해석이 성립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이 문제를 놓고 연구자들이 인접 분야의 다양한 연구성과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관련 논의를 풍성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경향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명예혁명 이후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를 쥔 ‘휘그파’가 잉글랜드의 계몽을 주도했다는 연구다. 포콕의 지도학생이었던 로런스 클라인(Lawrence Klein)은 명예혁명기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를 배경으로 “우아한 교양”(politeness)의 덕성을 칭송하는 문화정치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가톨릭과 신교도의 대립은 물론, 국교회 안팎의 종파갈등을 포함해 17세기의 정치적-종교적 분열을 지켜보면서, 섀프츠베리와 애디슨을 포함한 일련의 휘그파 문인들은 “우아한 교양”의 온화하고 교양있는 태도를 예찬하고 투쟁과 갈등을 유발하는 거친 태도를 공격했다. 현대의 가장 중요한 로크 연구자 중 한 명인 마크 골디(Mark Goldie)는 명예혁명기를 전후하여 로크를 포함한 휘그파 저자들이 사제계급의 권위를 비판하는 저술을 계속해서 출간한다는 데 주목하고 이를 잉글랜드 계몽의 한 흐름이라 규정했다. 명시적으로 포콕의 테제를 받아들인 브라이언 영(Brian Young)은 로크에서 윌리엄 워버튼까지 이어지는 ‘휘그파’의 신학 논쟁에서 잉글랜드 계몽의 주요한 흐름을 찾아내고자 했다.
둘째, 1980년대를 기점으로 부흥한 18세기 잉글랜드국교회 연구다. 19세기 후반 이래 18세기 국교회는 신학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불모지로 간주되었으며,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진지한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1980년대, 18세기 교회와 성직자들의 역할을 들여다보는 연구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J. C. D. 클라크의 공격적인 연구가 천명하듯, 장기 18세기 잉글랜드는 기독교, 특히 국교회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국가와 교회는 영적·정치적 통치의 파트너로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 국교회 성직자들이 기존의 통념과 달리 평신도 사회의 영적 통치에 깊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었다. 골디와 존 스퍼(John Spurr)의 연구는 왕정복고기 및 명예혁명기에 신학적·종교적 교의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담론장에 끼친 영향에 주목했다. 2000년대 이후 계몽주의와 국교회의 국외 선교사업 등과 같은 주제와 접합하면서 18세기 국교회 연구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으며, 잉글랜드계몽주의를 넘어 ‘잉글랜드국교회 계몽주의’(Anglican Enlightenment)를 거론하는 저작도 나오게 된다.
셋째, 인문주의 학술사(history of scholarship) 연구의 성장이다. 학자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오랜 역사를 자랑했으나, 양차대전기 당대 서구 인문학 연구의 정점에 있던 독일 및 대륙의 문헌학·역사학 연구자들이 나치를 피해 대거 영미로 망명해오면서 영어권 인문학계에 현대적인 학술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다. 그 흐름에 본격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반유태인 법안을 피해 영국으로 와야만 했던 이탈리아의 역사가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gliano)다. 고전기 역사문헌 전문가였던 그는 역사학·역사서술의 역사를 탐색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18세기 학술사 및 역사서술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저자들의 역사서술은 철학, 박식함(erudition), 고전적 서사(narrative)와 같은 여러 글쓰기 장르의 결합물이었다(모밀리아노는 『로마제국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을 세 장르 모두를 완숙하게 사용하고 종합한 ‘계몽주의 역사가’로 규정했다). 근대 초에 살았던 역사가들, 특히 유물수집가(antiquarian)들은 과거 시대의 유물과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도출해내는 자료비판기법을 구축했고, 이러한 기법은 계몽주의 역사서술, 나아가 근대 역사학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과거의 역사서·학술문헌을 탐구하는 일에서 저자들이 사용하는 기법들과 서술방식 자체를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때, 18세기까지의 서구 인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문헌비판기법이었다. 15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한 인문주의자 안젤로 폴리치아노(Angelo Poliziano)는 여러 판본의 대조 및 검토를 통한 문헌비판 기법의 토대를 놓았다. 이는 유럽 각국의 인문주의자들, 특히 조제프 스칼리제르(Joseph Scaliger)와 같은 학자들을 통해 정교화되었다. 문헌비판론의 발전과 확산은 시와 같은 좁은 의미의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의학, 법학, 역사서와 같이 고전문헌에 기초한 다양한 학문분과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종교논쟁은 문헌비판기법이 가장 강력한 정치적 파급력을 끼친 분야 중 하나였다. 종교개혁 이래 점차 격렬한 종파갈등에 휘말려 들어간 서방세계에서, 서로 다른 종파에 속한 문인·학자들은 상대편이 기대는 논거의 역사적 정당성을 학문적으로, 즉 역사학적 문헌비판기법을 통해 검토하고 논박하는 학술투쟁의 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성경의 독해방식이나 전례의 해석은 물론, 교부문헌, 교부들이 참고했던 이교도들의 문헌을 포함해 많은 것들이 역사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종파갈등에서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는 근대 초기의 탐구가 축적되면서 특히 교회정치사의 맥락 속에서 특정한 학문적 실천이 갖는 정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는 작업이 등장했고, 이는 계몽주의 연구에도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J. G. A. 포콕의 “잉글랜드계몽주의” 테제
포콕의 『야만과 종교』(Barbarism and Religion, 전6권, 1999-2015) 연작, 특히 1권(1999)과 5권(2010)은 잉글랜드계몽주의를 규정하려는 가장 정교한 저작이자, 2000년대 이후 계몽주의 지성사 연구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연구서다. 여기서는 포콕의 방대한 연구 중에 우리 논의의 맥락에 필요한 것만 간략히 소개한다.
포콕은 잉글랜드 계몽주의를 왕정복고 이후 다시는 종교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국교회 성직자와 귀족 등의 지배층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계몽”(enlightenment from above)으로 규정한다. 그 핵심은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열광에도 동조하지 않고 이질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회의주의적인 면모에 있었다. 『야만과 종교』 1권은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논점을 제출한다. 첫째, 근대 초 유럽에는 국가와 종파에 따라 ‘복수의 계몽주의’(Enlightenments)가 존재했으며, 잉글랜드의 경우 잉글랜드국교회 안팎의 종파적 정체성과 결부된 잉글랜드 계몽주의가 독립적인 범주로 존재했다. 둘째, 에드워드 기번과 달랑베르의 학문론 논쟁을 검토해보면, 프랑스 계몽주의의 철학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태도와 구별되는 잉글랜드 계몽주의의 역사적이고 회의주의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종교와 교회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상대화하는 ‘부드러운 세속화’로서 잉글랜드 계몽주의를 설명하는 포콕의 입장은 『야만과 종교』 5권에서 한층 미묘해진다. 주지하다시피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 1권 15장, 16장의 서술로 말미암아 ‘불신앙자’(infidel)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는 이후의 기번 해석에서도 유지되어왔다. 학술사적 접근법을 활용하여 기독교 교회의 역사가 서술되어 온 과정을 검토하면서, 포콕은 통념과 달리 기번을 기독교와 계시 자체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기번은 초기 기독교사를 정통적인 교회사 혹은 성사(聖史, sacred history)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세속 세계의 역사를 다루듯이 서술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포콕이 보기에는 이처럼 열광론자도 무신론자도 아닌 온건한 회의주의자의 입장에서 종교와 교회를 세속적 시민사회의 일부분으로 규정하고 상대화하는 시선이 기번이 대표하는 잉글랜드 계몽주의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야만과 종교』 5권은 인문주의 학술사의 접근법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앞서 살펴보았듯 잉글랜드 계몽주의 해석의 양쪽 스펙트럼에는 각각 계몽을 기독교 세계의 세속화와 동일시하는 고전적 입장과 근대 초기의 ‘구체제적’ 성격을 강조하며 세속화 테제를 비판하는 태도가 자리한다. 포콕의 전략은 양자의 가운데로 침투, ‘기독교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종교를 상대화하는’ 입장을 발굴하고 이것이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와 구별되는 잉글랜드 계몽주의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문헌비판적 도구를 활용하여 교회와 종교를 역사화하는 기번의 『쇠망사』는 그러한 가운뎃길의 존재를 입증하는 과업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였다. 포콕은 기번의 역사비판적인 독해방식이 18세기 초 전후 제네바와 암스테르담, 런던에서 활동한 문인 장 르클레르크(Jean Le Clerc)의 작업에서부터 기원한다고 보았다. 르클레르크는 복음서를 ‘맥락주의적’으로 읽어내면서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과거인들의 사상사로 읽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지성사적’ 접근법은 18세기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교회사 서술로 이어졌고, 기번의 작업은 그러한 성과가 축적된 산물이었다. 종교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또한 역사적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뿐이다. 과거의 학문적 실천을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술사 연구에 힘입어 포콕은 자신의 잉글랜드 계몽주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갱신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교회사와 학술사의 풍부한 성과를 활용하여 지나치게 범박한 반/세속화 테제를 거부하고 한층 더 복잡하고 섬세한 해석적 서사를 도출하고자 하는 역사가들에게 포콕의 ‘회의주의적’ 잉글랜드계몽주의 테제는 하나의 준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아니었으니, 위대한 포콕을 기다리는 젊고 강력한 도전자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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