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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쓰고 다시 쓰고 또 쓰기_안정민의 이야기라는 세계 / 최엄윤

어느 날 안정민 연출가가 내게 물었다.

“만약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능력을 원해요?”

“공간 이동 능력, 만약 내게 초능력이 있다면 지금은 오슬로 식물정원에 앉아 있고 싶어.”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매우 특별하다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마치 신의 특별한 지령을 받아 세상에 온 것처럼, 아무에게도 없는 나만의 비밀이 있는 것처럼. 세상은 그래서 신비함으로 가득 찬 상자와 같았고 오감 속에 호기심이 깃들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오랜만에 내게 던져진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한참 답을 궁리해야 했다.


욕조 안의 아이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안정민 연출은 울산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안정민은 아이 시절 안데르센 동화 「인어 공주」를 읽고 물을 채운 욕조 속에서 포크로 머리를 빗으며 오랫동안 인어 공주에 이입했었다고 한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비밀 세계를 상상하며 자신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었다. 회색 공장 도시의 평준화된 환경에서 자라 성공하고, 중산층의 삶으로부터 보상받는 정해진 루트가 자기 것이 되었을 때 불행하리라 예측한 사람, 그에게는 동화 속 빵을 굽기 위해 여정을 떠난 아이나 황금의 아이처럼 그런 이야기의 세계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안정민의 꿈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안데르센처럼, 셰익스피어처럼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작품을 읽으며 성장했다. 이후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며 독일 교환학생의 기회가 생겼고 샤우뷔네(Schaubühne),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 도이체스 테아터(Deutsches Theater: DT) 등을 접하면서 다양한 연극 세계에 매료되어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드라마는 권력적이다”라는 주장 아래 포스트드라마 연극들이 나오던 시기였고 수많은 퍼포먼스 중심의 공연은 독일어를 거의 못 하는 외국인에게도 볼거리가 충분했다. 이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몇 년 사이 영국은 포스트-포스트드라마 연극이 부상하며 퍼포먼스 자체가 오히려 더 권위적인 기구로 남아있고 새로운 드라마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거기서 안정민은 뉴다큐멘터리 연극을 전공하게 되었고 당사자를 무대에 올리고 당사자의 말을 사용해서 작품을 올리는 연극에 잠깐 심취했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퍼포먼스 경향이 짙은 세월호 이후의 공연 <이토록 사사로운>(2016), 난민 문제를 다룬 뉴다큐멘터리 공연 <이방인의 만찬-난민연습>(2018) 등을 만들며 자기 옷은 아닌 것 같지만 현대 예술가가 도전해 봐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뉴다큐멘터리 연극 강의에서 한 학생의 “제가 제 이야기하는 게 힘들어요, 제가 제 이야기 꼭 해야 해요?”라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 “아니, 안 해도 돼, 이건 연극의 일부일 뿐이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드라마가 세상에 있는 거 아닐까?”라고 준비하지 않았던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오히려 자신에게 새로운 질문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언제나 부족했던 사람이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드라마타이즈 해야 하는 사람, 이야기가 필요했던 사람인데 현대 연극의 동향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진짜 드라마 세계에서 원하고 꿈꿨던 것들, 신화, 이야기, 동화, 이런 감각을 잃고 너무 멀리 왔던 건 아닐까?” 그때부터 다시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찾기 위해 어린 시절의 일기장으로부터 이야기의 단서를 얻었다. 그 속엔 엄마와 딸의 관계, 할머니와 딸의 관계, 여성의 역사성과 같은 것들이 유치한 언어로, 그렇지만 순수하게 담겨 있었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드러내는 방식


2019년 연극 <뜻 밖 해>를 기점으로 <달걀의 일>(2019), <바리이야기>(2020), <당곰이야기>(2020), <구슬정원>(2021), <유디트의 팔뚝>(2022) 등 지난 몇 년간 안정민 연출은 여성주의 서사를 바탕으로 신화와 전설을 새롭게 쓴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판소리와 탈춤, 국악 등 전통의 형식을 빌려 웃음, 풍자, 해학을 담아 인물과 상황이 처한 비극과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다소 엉뚱하고 발랄한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며 주제를 단순화해 드러내는 작품 색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한국의 젊은 예술가로서 어떤 전략을 사용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일단 여성으로서 내가 할 말이 많고 스스로 무시했던 수많은 내가 있었다. 폭력 당해왔던 역사를 잊어버리고, 그런 것들이 제대로 얘기되지 않는 것 같다. 여성 신화를 다시 쓰거나, 여성 서사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시 한번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에 이입하지 않고 건강하게 이야기될 방법을 계속 찾아내야 할 것이다. 여성 서사를 하면서 한국 전통 미학 골계미, 즉 비판하면서 웃기, 단순화하고 웃기, 자학하고 웃기, 사람들을 어쩔 줄 몰라 하게 만들어 버리기, 아주 뻔뻔스럽게 얘기해 버리기 등의 전략을 추구한다. 그렇게 아픔을 이겨 내고 웃음으로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웃는다는 게 가장 멋진 공격이 아닐까? 울 때는 치아가 드러나지 않지만 웃을 때는 치아가 드러나잖나? 치아는 뼈니까 웃음이 제일 단단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만들다 보니 판소리랑 굿 텍스트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속 필사해서 내 안에 체화되게 한 다음 판소리 형태로 썼다. 판소리에서 집중했던 미학은 그 음악성이 아니라 젠더를 넘나들고 골계미를 드러내고 슬픈 장면을 줌아웃해서 멀리서 보는 시점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판소리하시는 분들이 봤을 때 이건 판소리가 아닌데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판소리의 전통을 하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 판소리나 아마추어 굿을 표방하는 이유는 어떤 퀄리티를 포기하더라도 그것이 계속 재생산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셰익스피어가 언제나 좋은 방식으로 재생되지 않더라도 계속 재생되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미학이 더 학습되고 시도되고 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터뷰어 최엄윤, 인터뷰이 안정민. 22.12.26-27


지난 2016년 이후 안정민은 부지런히 글을 써 왔다. 매년 한두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지만 아직 무대화되지 않은 글들이 있고, 지금도 창작과 퇴고를 거듭하는 원고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2019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고독한 목욕>, 6개월간 독거노인들을 아침저녁으로 만나며 써 내려간 작품 <어린 노인> 등 미공연작을 포함하면 매해 최소 두 편 이상의 희곡을 써왔다. 예술가로서 안정민이 추구하는 가치를 꼽으라면 그것은 다원성이다. 이런 방식과 저런 방식, 이런 존재와 저런 존재가 다 같이 존재하는 것,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결국 안정민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안정민의 대표작들>


존재를 확장해서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


2017년 창단한 창작집단 푸른수염은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에서 이름을 따왔다. 원작의 <푸른 수염>은 여러 전설과 실존 인물에 기초한 잔혹 동화로 마을의 여자들을 데려가 죽이는 살인마 귀족과 그의 호기심 많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작집단 푸른수염은 원작을 비틀어, 마을 여자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푸른 수염의 저택에 들어가 훔친 열쇠로 100개가 넘는 방을 하나하나 따보는, 그 목숨 건 호기심을 그리자는 의미로 극단명을 지었다. 안정민 연출은 원전이 주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충돌, 해석과 해석 사이의 충돌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점에서 연극이라는 예술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에게 다시 쓰기란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서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결국 인생의 끝에서 찾아야 하는 독립성이 있다. 나는 자기 삶의 서사화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신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배신하는 자체가 우리의 능력이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원형이 돼야 한다. 신화를 따르는 능력도 있고 신화를 창작하는 능력도 있는 것 같은데, 후자의 능력은 자신이 특별하다 느낄 수 있었던 아이들처럼 사실 누구에게나 있었고,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외롭고 고독한 작업일지라도 다시 써야 한다.”

인터뷰어 최엄윤, 인터뷰이 안정민. 22.12.26-27


초능력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힘, 인간의 힘으로는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은 능력이지만 초능력을 갖길 원하는 마음 한편에는 현실의 삶과 주어진 일상을 초월하고 싶은 마음이 거울처럼 비치진 않을까? 이야기는 초월적 힘을 가지고 있을까? 작가로서 안정민에게 이야기는 무엇이고 희곡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야기를 물과 같다고 대답했다. 마셨다가 쌌다가 강으로 흘러가고 다시 입으로 들어오는 물처럼 최종적으로 깨끗한 물도, 최종적으로 더러운 물도 없이 연결되어 있듯 최종적으로 악한 이야기도, 흠결 없는 이야기도 없다. 최악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항하려는 힘이라도 준다는 것이다. 한편 안정민 작가는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고 그것을 대화체로 썼을 때 오직 독해하는 사람이 그 상황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희곡을 쓰는 작가는 범인, 희곡을 읽어내는 연출가와 관객은 탐정에 비유한다. 어떤 사건의 끝을 표시해 두면 그 아래를 찾아 내려가는 방식은 연출과 관객의 몫인데 엄청나게 단순화된 대화만으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곡을 쓰는 것이 재미있다고 한다. 소화기관을 닮은 순환하는 물처럼 이야기를 하는 자도, 그 이야기를 마시고 다시 흘려보내는 자도 삶의 서사를 완성하는 능력과 다른 삶을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시 쓰고 새로 쓰는 것처럼 현재의 삶이 힘들 때 이야기는 도피처가 아닌 존재, 자기 삶의 유래를 좀 더 크게 보는 도구이자 방법일지 모른다.


내게 초능력에 대해 질문하던 날, 안정민은 슬픈 얼굴로 “연극은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했었다.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고, 안정민이라는 이름이 작가이자 연출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아직도 쓰고 싶고 써야 할 이야기가 마음속에 가득 찬 한 예술가에게 삶은 멋진 이야기처럼 유쾌하고 건강한 미래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 쓰고 다시 쓰고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은 몸을 자르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 되어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행여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인어처럼 자기 삶의 서사를 완성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 글은 지난 2022년 12월 26일과 27일, 창작집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최엄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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