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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꽃놀이패: 항상 불행 중 다행 / 김동규

최종 수정일: 10월 4일


최근 <백낙청 TV>에서 ‘박근혜 정권은 오히려 사회에 필요한 고난’일 수 있고, 마찬가지로 현 정권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윤석열 정부의 변칙적 정치를 빨리 끝낼 우리 민족의 역량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신의 숨은 뜻을 가정하는 전형적인 유대 기독교적 논법이다. 대표적인 좌파 원로 지식인 백낙청 선생의 말씀이어서 잠깐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단순한 반어적 표현은 아니었다. 냉소적 비판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혐오하는 세력이라도 ‘그나마 최악은 아니고 그것에 뭔가 존재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오히려 지혜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어떤 안 좋은 일을 겪을 때, 종종 “불행 중 다행이야!”라는 말을 한다. 예를 들어 호젓하게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인도로 자동차가 밀고 들어와 내 다리를 부러트렸다고 해 보자. 왜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다가, 왜 하필 졸고 있던 운전자의 습격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그냥 우연, 불운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과연 이게 불운이기만 한 걸까? 그 우연적 사건이 더 안 좋은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은 없었을까? 가능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 있었다. 나는 그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이건 특정한 사건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다 더’ 나쁜 상황을 모든 사안마다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쁜 상황이 언제나 가능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최악’이라고 부르는 건 실제 최악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라면, 불운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불행 중 다행이었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게 진실에 가깝다. 이것은 그저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다. 진짜 최악의 상태에서는 불행조차 감지할 수도 없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나빴으면 어쩔 뻔했어!’라며 다행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불운을 공평하게 대하는 태도다.


유명한 미국의 철학상담가 엘리엇 D 코헨은 걱정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들을 ‘의무적으로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회사에서 해고당하면 어떡하지? 이번 자동차 사고 때문에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을 대폭 인상해버리면 어떡하지? 애가 자꾸 빗나가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거야? 이혼하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엘리엇 D 코헨, <지금 나는 고민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전행선 옮김, 애플북스, 2012. 128쪽.

     

그런데 이런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이들은 더 나빠질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지혜를 잃어버렸기에,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게 된다. 코헨은 그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넓게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글쎄, 회사에서 잘리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 파산자 명부에 오르거나 다시는 일을 못 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그리고 보험료쯤이야 올라가도 상관없어. 사고에서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차라리 다행이지. 그리고 애가 좀 빗나가려 해서 힘들긴 해도 그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얼마나 많아? 애가 암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내 결혼 생활이 뭐 썩 잘 굴러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도 괜찮아. 나랑 이혼하는 대신에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드는 변태 살인마하고 결혼했다면 어쩔 뻔했어.

같은 책, 129쪽.

     

운(運)이란 행운과 불운 절반씩 공평하게 구성되어 있다. 불운 뒤에는 행운이 숨어있고, 행운 뒤에는 불운이 숨어있다. 행운이 찾아왔다고 기뻐 날뛸 일은 못 되며, 불운이 찾아왔다고 울며불며 비탄에 잠길 일도 못 된다. 아니 어쩌면 행운이랄 것도 없고 불운이랄 것도 없는지 모른다. 둘을 가르는 기준이 사실인즉 묘연하기 때문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 고사가 그것을 잘 말해주지 않는가. 세상사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영원한 선악은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짧은 범위 내에서 선악을 가르고, 그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낄 뿐이다.


바둑 용어 가운데 ‘꽃놀이패’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한쪽은 져도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으나, 다른 한쪽은 반드시 이겨야만 큰 손실을 모면할 수 있는 패를 말한다. 즉, 한 편은 패를 이기거나 지거나 별 상관이 없지만 상대편이 패의 성패에 따라 막대한 손실을 입는 경우다(출처: 위키백과).’ 영원한 선악이 없을진대 당연히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오로지 임시적으로 국부적으로만 승패를 가늠할 수 있다. 인생을 바둑판에 빗대자면, 꽃놀이패를 원한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꽃놀이패로 내몰린 사람은 괴로울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선악이나 승패라는 게 없다면, 정말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꽃놀이패를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에 달려있다. 지더라도 별다른 손실이 없는 꽃놀이패로 사안을 인지하느냐, 반드시 이겨야만 최악의 상황을 겨우 모면한다고 인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전자의 태도를 취한 사람은 지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반면 후자는 이기더라도 불행한 사람이다. 여전히 궁지에 몰려있다고 판세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진정 바둑 ‘놀이’로 이해하는 자는 꽃놀이패를 원한다. 매번 꽃놀이패를 쥐었다는 태도로 삶을 대한다. 반면 놀이인 줄 모르는 사람은 절망적인 (잠재적) 꽃놀이패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무작정 죽기 살기로 이기려 드는 사람은 변전하는 승패에 따라 일희일비하다 결국 망자(亡者)가 되고 만다. 바둑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 바둑판의 한 점 돌이 되어 버린다. 구경거리로만 남는다.


만사(萬事)가 불행 중 다행이다. 행복은 생을 꽃놀이패로 삼는 데 깃든다. 탄탄대로 꽃길은 없다. 다만 가시밭길에서 꽃놀이를 즐길 수 있을 뿐이다.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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