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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식하는 일: 정보라 『작은 종말』 리뷰 / 이지용

202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수상 이유에 대해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평을 전했다. 이를 통해 이 시대의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질문과 대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정보라의 『작은 종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소설집에 있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겪어왔고, 겪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르포르타주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외계인과 미래 사회, 기계 몸 등이 등장하는 SF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기에 이것이 소설이라는 인식은 명확하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거리감을 확인하면 작가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해 이야기하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출간 인터뷰에서 다른 작품들을 엮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수록된 작품들을 왜 쓰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작가의 말에서 설명해 놓은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 어떠한 계기로 인해, 어떠한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소설을 썼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의 이야기들을 마주하면서 작가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작품에서 인용된 개념을 따라가면 지향은 ‘방향을 가진다는 것이며 공간을 점유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길을 걸어가면서 지나온 길과 현재의 위치 그리고 걸어갈 길을 인지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소설집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소설집을 읽어가면서 작가가 제시한 지향점들을 제법 명확하게 확인하게 된다. 우선은 지나온 길로서의 역사이고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증언」은 이것에 대한 뚜렷하고 강력한 선언 같은 글이다. 5‧18 민주화 항쟁에서 입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 ‘완’은 치료를 위해 인공지능 시뮬레이션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것들은 한국사에서 있었던 또 다른 상처 입은 자들의 기억이다. 6‧25 전쟁 중 있었던 노근리의 학살이나, 제주 4‧3이나 보도연맹의 학살 사건, 일제 강점기 때 있었던 위안부에 대한 기억들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아픔의 기억이 덧씌워지는 것이 힘들 수도 있지만 작가는 그 기억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면서 연대를 이룬 기억들은 그러한 아픔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더 나은 모색들로 이어질 거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아픔의 연대는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 유족들이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에게,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이 다시 이태원 참사의 유족들에게 연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재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선연하게 현재에 자리하고 있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은폐해 왔던 것들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지향」에서의 시위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용어들의 언급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정보들은 이러한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은폐하고 외면했던 것들에 대한 재선언이고 재의미화이다. 「개벽」이나 「은둔자의 영혼」, 「통역」이나 「도서관 물귀신」 등을 통해서 보여주는 현실의 공간이나 제도에 대한 정보들은 모두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던 것들에 대한 재확인이다.


소설집 전반에 걸쳐서 보여주는 현실의 문제들은 환상적인 것들로 분장하고 있지만 현실의 그것을 그대로 담아놓았다. 외계인이 등장하고 귀신이 나오며, 차원을 넘어 다니는 이들이 있어 지구의 환경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세상에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지구의 인간들은 지금도 발생시키고 있는 문제들을 똑같이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지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문제는 그 어떤 기술력이나 마법과 같은 것들로도 해결할 수 없다.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한 외계인들이 등장해도 해결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우리의 세계를 더 나아지게 할 수도 없다는 진리를 마주하게 된다. 대신 소설은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마주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니 이러한 지향점을 공유하지 않겠느냐고 계속해서 묻는다.


게다가 소설은 그러한 현실의 각박함에도 미래로 향해야 함을 잊지 않는다. 표제작인 「작은 종말」에서 절절하게 외치고 있는 “우리는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을 거야.”라는 선언과 약속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향하는 일종의 정언명령이다. 기계의 몸으로 전환한 이들이 늘어나고, 그러한 세상에서 인간의 몸과 한계들은 더 이상 효용이 없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고용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한 일들을 알아주지 않아도, “살아있으니까, 그냥 사는 거야.”라고 외치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선언과 몸부림이 소설에서 향하는 미래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들을 통해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인식들 역시 인상적이다.


작가의 지난 소설들에서도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이미지들이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의미들을 소설적으로 구현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겪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치들 역시 부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냥 신격화하거나 신성시하지도 않고, 폄훼하거나 터부시하지도 않는 그런 치열한 인식의 결과들이 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특히 「작은 종말」에서 치열한 투쟁을 통해 동생의 아이를 거두기로 결심하고 주인공 상의 삶이 변화하게 되는 지점에서 삶이 ‘넓어지고 밝아지고 바빠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하는 이러한 선언들을 작가가 소설로 남기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르무란」에서 주인공 검은깃털은 임신한 몸으로 미래로 전해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상태로 벽화로 전해지지 못했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세계의 비밀들을 벽화로 남기려고 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남길 수 없어서 변장한 모습으로 벽에 새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로 작가의 경우에는 소설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잊어버리게 되어서, 혹은 덮어두고 외면해 버려서, 혹은 왜곡되고 호도되어서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지금 이곳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누군가는 전해야 하고 그것이 이 시대에 소설이 아직도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믿으면서 과감하고 치열하게 쓰는 것이다.


*정보라, 「지향」, 『작은 종말』󰡕 󰡕, 퍼플레인, 2024, p.32 참조.


이지용(단국대학교 인문사회융합인재양성 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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