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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을 보는 또 하나의 방법 / 한보람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구다.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선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 이것이 한국 역사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에 붙어 있는 딱지이다.

오랜 기간 강화도 조약은 우리 근대의 시작점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한국 근대사의 상징적 현장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했다. 폐쇄적 동아시아의 논리에 머물던 조선이 개방적 근대 세계질서로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지만 강압적 타의에 의해 수동적으로 개방 당했다는 역사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렇게 강화도 조약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실패한 역사적 비극의 서막으로 자리 잡았다.

강화도 조약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 조약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 조약에서 비롯된 실패의 이미지는 개항기 근대 전체를 휘감았다. 끝내 조선은 강화도 조약 체결의 상대국 일본의 침략을 당했다. 이로써 오랜 시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일본은 빠른 근대화를 이룩한 승리자의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은 미숙하고 뒤떨어진 역사의 패배자 자리에 위치했다.    

     

     

우리가 관심 두지 않았던 조선의 이야기

그 후로 오랫동안 한국 근대사는 조선은 왜 일본처럼 빨리 근대화되지 못했을까 라는 자조 섞인 질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한편으로는 ‘조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는 조선측 대표의 말을 들어 그 무지함을 답답해하고, 한편으로는 서구식 근대화에 재빠르게 발맞춰간 일본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진행된 일본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멸망이 역사적 사실이었기에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 한국이 자타공인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21세기의 오늘날, 이제는 20세기 제국주의의 침략과 국망의 충격에서 벗어나 강화도 조약을 향한 너무나 익숙했던 시선을 되짚어볼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과연 조선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한없이 무지하고 미숙했던 약소국일 뿐이었나? 일본처럼 빠르게 서구화를 시도했다면 조선도 일본처럼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때 그 조선 사람들은 만족했을까? 우리는 조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가 관심두지 않았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는 없을까?

          

     

조약 체결의 현장까지, 19세기 조선이 걸어온 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 14년 전 조선 사회는 세도정권의 무능이 만들어낸 현실 문제들의 해결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힘으로 들썩였다. 1862년 농민항쟁, 흔히 ‘진주민란’으로 불리는 농민들의 폭발적 저항 앞에 지배층은 혼비백산했다. 민의 불만을 잠재울 능력이 없었던 세도정권은 이듬해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새 시대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대원군은 시대를 열어갈 희망의 상징 같았다. 하지만 희망찬 시간도 잠시뿐 조선 사회는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계속되는 외세의 위협 앞에 대원군은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강력한 척화 의지가 새겨진 ‘위정척사의 비’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외세의 위협을 강조한 대원군의 척사론은 조선 사회에서 즉각적이고 열렬한 여론의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민간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신미양요 때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그는 천주교인을 국가의 적으로 지목하고 대규모 처형을 자행했다. 희생자가 20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까지 존재할 만큼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 처형이었다. 민심은 동요했다. 가뭄이 들자 사람들은 천주교도들에게 행한 잔인한 짓이 하늘의 분노를 사서 비가 오지 않는다고 수군거렸다. 처형을 담당한 훈련대장 이경하는 염라대왕처럼 여겨졌다. 당시 민간에서는 남을 꾸짖을 때 ‘미끄러져서 낙동에 떨어지라’고 했다. 이경하가 낙동에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과 함께 대원군은 역사의 기대, 민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물러났다.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절두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절두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민생, 어렵지만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

조약 체결의 현장까지 조선 사회는 오랜 기간을 거쳐 어렵지만 꼭 달성해야 할 중요한 목표를 향해 걸어왔다. 민생의 안정. 어쩌면 흔한 정치적 수사, 허울뿐인 명분으로 치부되기 쉬운 가치이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은 바로 그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1862년 민들은 선을 넘은 세도정권의 학정에 분노했고, 정권은 퇴진 당했다. 또 다시 선을 넘은 대원군 역시 권좌에 오른 지 10년이 채 되기 전에 축출되었다. 그리고 민들의 열망 한편에는 박규수와 신헌을 비롯한 개혁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또한 중심추 역할을 했다. 박규수는 조약 체결 전부터 일본과 마찰을 빚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외교문서를 보내 이전과 전혀 다른 외교관계를 요구했다. 일본이 보낸 서계에는 ‘황(皇)’, ‘칙(勅)’과 같이 격식에 맞지 않게 일본을 높인 용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기존에 발급해준 ‘도서(圖書)’를 반납하고 새 인장을 사용한다는 내용 또한 들어 있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틀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일본의 태도를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박규수는 ‘저들이 서양과 한편임을 분명히 알면서 무엇 때문에 우호를 잃고 적국을 하나 더 만들려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일본 외교문서 접수를 반대하는 선봉에 대원군이 서 있었다. 이때 박규수는 집요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통의 서신을 보내 일본 외교문서를 접수해야 하는 이유를 강력히 피력하며 대원군을 설득했다.

“영남 지역 절반의 고혈을 긁어 저들에게 주고 도서 하나를 만들어 준 것으로 능사를 삼으니, 천하의 가소로운 일 중에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입장은 명확했다. 일본과 충돌로 인한 실질적 피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형식이 된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민의 고혈보다 중요한 일은 없음을 지적했다. 조선의 전통적 정치 운영원리를 고수했던 그에게 모든 국정의 기본은 민생에 있다는 기본 신념은 타협의 여지없이 확고한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 조선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과 충돌의 오랜 역사를 거친 신뢰할 수 없는 이웃이었다. 더구나 조약 체결직전 해에 강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였다. 1870년대 일본의 류쿠 병합 과정을 지켜본 조선은 일본의 위협을 실질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일본이 군대를 앞세워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러 왔을 때 조선의 최우선 목표는 무력 충돌 가능성의 효과적 제어였다. 이는 무관 신헌이 조약 체결의 대표로 현장에 나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신헌은 조선 후기 무반 명문가의 후예이자 병조판서, 훈련대장 등 수많은 군사 요직을 지낸 당대 최고의 무관이었다. 외교관이 아닌 장군 신헌이 조약의 전권대관으로 협상에 임했던 점은 강화도 조약을 대하는 조선의 자세를 보여준다.


<운요호의 모습>
<운요호의 모습>

조선측 대표를 접견한 일본측은 자신들의 병력이 4,000명이라고 군사적 위세를 크게 부풀려 과시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장차 수만 명의 군사가 상륙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조선은 양국 대신의 접견이 옛 우호를 지속시키려는 뜻인데 많은 군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조선측은 일본 군대가 상륙한다면 민들이 놀랄 것을 설득의 이유로 내세웠다. “양국 대신이 예로써 만나고자 한다면 피차가 병기를 치우고 또한 대포를 쏘지 말아서 민들이 놀라거나 괴이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선측의 태도는 한결같이 일본의 돌발행동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신헌은 일본이 보인 태도를 ‘공갈[恐嚇]’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일본의 협박에 그는 ‘옛 우호를 중수하는 자리에서 군사를 칭하는 말을 번번이 입에 올리고 있으니, 심히 타인과 교제를 잘하자는 뜻이 아니다’라고 답하며 질책했다. 그 자리에서 그가 고려한 것은 민들이 군대를 보면 놀라서 흩어질 우려였다. 민생을 위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은 일본과 군사적 충돌이었다. 민생 안정이 최우선 목표였던 박규수의 신념을 조약 체결 현장의 신헌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신헌이 이끌어 간 대일본 협상의 목표는 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결국 망했다. 일본은 결국 조선을 침략했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국망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침략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일 수 있어도 조선이 망한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식민지 전락을 역사의 결말로 두고 그 출발점 찾아 가기, 그 시도 속에서 강화도 조약은 실패한 근대의 서막으로 박제되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든다. 강화도 조약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조명해야 할까? 강화도 조약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 속에 들어있는 조선의 이야기를 더 들여다 볼 필요는 없는 것일까?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cato924@hanmail.net 
한보람(대전대학교 강사) cato9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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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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