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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강요된 두려움 <노 베어스>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만난 이란 / 최엄윤

최종 수정일: 3월 26일

선전, 공모, 국가 안보 위협 혐의로 이란 정부로부터 2010년부터 출국금지와 영화 제작 금지 명령을 받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2022년 신작 <노 베어스>가 지난 1월 개봉했다. 개봉 직후 영화를 보고 바로 이란으로 20일간 여행을 떠난 나는 여러 친구의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와 낯선 나라로의 여행에 대한 선망을 동시에 받았다.

     

     

홍차의 쌉싸름한 맛을 녹이는 각설탕의 달콤함

     

이란은 손님에게 매우 친절하고 극진한 접대 문화가 있다. 오랜 인연을 맺는 지인의 초대로 떠나게 된 이란에서 그분의 친척, 친구들로부터 자주 초대를 받았고, 그들은 항상 나에게 선물을 안겨 주었다. 손님은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인지 카페에 들어가서도 ‘당신은 우리들의 손님입니다’라며 커피값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어적 관습이기도 해서 모든 호의를 다 받아들이지 않고 겸양으로 거절하는 센스도 갖추어야 했다.

     

이란의 가정은 홍차를 끓이는 사모바르의 온기가 집 안으로 퍼지며 하루를 시작한다. 꼭지가 달린 금속 주전자 위에 도자기로 된 티팟을 올리고 가스 불에서 주전자를 데우면 증기에 의해 티팟에는 아주 진한 홍차 진액이 스며들고, 그 진액과 주전자의 물을 섞어 농도를 맞춰 마시며 몸을 깨운다. 이란에서 홍차 마시는 법을 새롭게 배웠는데 먼저 딱딱하고 하얀 각설탕을 이 사이에 물고 차를 마시면 달콤한 맛과 함께 쌉싸름한 홍차가 천천히 입안으로 퍼진다.


<노 베어스>의 스틸컷

<노 베어스>는 튀르키예의 어느 골목에서 촬영 중인 영화의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장면이 노트북 모니터 화면으로 줄어들면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이란과 튀르키예 국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원격으로 촬영을 지휘하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더운 이란의 날씨에 어울리는 흙집, 누군가의 지붕이 누군가에게는 옥상인 구불구불 지형의 시골 마을에서 와이파이를 잡으려 애쓰는 감독과 테헤란에서 좋은 차를 타고 온 손님을 경계하면서도 친절을 베푸는 하숙집의 간바르와의 장면으로 카메라 밖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직접 출연하여 실제 감독의 상황과 맞닿아 허구임에도 그 형식과 내용은 다큐와 가깝다.

     

온몸을 가리는 차도르를 두르고 구덩이를 판 부엌에서 음식을 길어 올리듯 꺼내어 파나히 감독에게 정성껏 대접하는 간바르의 어머니와 감독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작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한다. 마지막까지 “당신은 내게 아들이나 다름없어요.”라고 말하며 몸에 좋은 차를 건네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관절 약과 봉투(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를 챙기는 감독의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터키와의 국경선에 섰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성급히 되돌아온 감독처럼 단호한 인상과 평가만으로 이란을 멀리할 수 없는 마음 때문이다.

     

     

프레임 밖의 드러나지 않은 진실

     

전통이라는 경계가 존재하는 곳, 그 경계는 억압적이거나 답답하거나 듣는 이에 따라서는 신비한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 경계 속 진실에 온전히 다다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인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머무는 이란의 시골 마을은 오랜 전통과 관습으로 굴러가는 곳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쇠락해 가는 시골 마을에 자파르 파나히 감독 같은 외부인이 들어와 수입 창출을 해야 한다는 마을 이장의 말이 암시하듯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에 세태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온전히 막아낼 수는 없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를 때 미래 남편의 이름을 마을 사람들이 정하는 악습이 존재하는 전통 이슬람 마을에서 감독은 금지된 사랑을 하는 연인, 고잘과 솔두즈의 사진을 찍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가 사진을 찍었는지 찍지 않았는지 관객은 끝내 알 수 없다. 메모리 카드를 빠르게 넘기는 장면이 지나가지만 찍은 사진을 삭제했는지, 혹은 진작 그런 사진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진으로 보여 주지 않아도 관객은 금지된 사랑을 하는 젊은 연인이 이란을 떠나 망명하려는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맹세를 강요받게 된 감독은 마을 원로 남성들과 고잘의 약혼자가 있는 맹세의 방에서 코란이 아닌 카메라에 진실을 맹세하고 그 녹화 본을 주민들에게 나눠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혐의에 놓인 사진 한 장으로 벌어지는 갈등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카메라, 즉 영화를 통해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현실과 싸우며 진실을 전하겠다는 파나히 감독의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영화 속 영화, 즉 튀르키예에서 원격으로 촬영되고 있는 영화는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고자 하는 연인 자라와 박티아르의 이야기로 감독이 머무는 시골 마을에서의 상황과 평행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자라는 영화라는 허구에서 이탈하여 “거짓은 없기로 했잖아요”라고 감독에게 항변하며 촬영을 중단하고 떠나버린다. 구금과 고문도 견뎠지만, 자신의 가짜 여권을 숨기고 자라를 먼저 망명길에 오르게 하려 했던 연인 박티아르의 거짓말에 무너져 버린 자라. 카메라 프레임이 빗겨 나간 곳에서 감독도 알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진실을 이야기 하고자하는 카메라도 닿을 수 없는 현실을 구원하지 못한다.

     

실제 이란 여행 중 만난 젊은이,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란을 떠나고 싶어 했다. 이란의 비자로는 갈 수 있는 국가가 극히 제한적이고, 일상에서의 금지와 제약, 엄격한 규범과 통제는 물론 예술 작품을 만들 때 검열과 심각한 경우 구속까지 될 수 있는 현실에서 그들은 갇힌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문명의 요람으로 유구한 유산을 세계사에 남겼음에도 서구 중심 패권주의에서 미국에 맞서며 철저히 고립된 국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해도 억압적인 정부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만난 대다수 이란인들의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하지 않는 삶은 지옥보다 끔찍하다며 홀로 망명길에 오르길 거부하는 자라의 모습이 타국으로의 이민을 준비하는 지인들의 얼굴과 겹쳐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곰은 없다

     

    영화의 제목 <노 베어스> 즉, ‘곰은 없다’는 의미는 파나히 감독이 맹세의 방으로 가는 길에 만난 마을 주민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저 길로 가면 곰이 있으니 자신과 함께 가자며 감독이 맹세의 방에 도착하기 전 평화를 위해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조언을 준 사람. 하지만 다시 길을 나섰을 때, 곰은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며 그는 다른 길로 가버린다.



선하고 친절하지만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규범과 전통을 강요하고, 의심과 경계를 숨기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요구로 결국 감독은 마을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쫓겨나다시피 테헤란으로 돌아가는 길, 망명을 시도했던 젊은 연인이 약혼식을 위해 발을 씻기는 강에 숨진 채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얼른 떠나라고 재촉하는 간바르의 말을 듣고 그 처참한 현장을 지나쳐 가지만 감독은 오래지 않아 멈추고 관객은 암전이 된 프레임 속 소음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음 행동을 추측할 뿐이다.

     

두려움을 만드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통제법인가? 자유를 억압하고 행동을 제약하며 눈먼 믿음을 만들어 내는 두려움. 여성의 머리칼이 남성을 성적으로 자극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처럼 사람들의 입과 귀, 눈을 막고 복종을 요구하기에 두려움은 손쉽게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몽둥이 같은 것이다.

     

출국금지, 가택연금 상태로 영화 제작, 연출을 비롯하여 시나리오를 쓰고 인터뷰하는 것조차 금지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이후 <노 베어스>를 포함해 총 6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신체와 정신이 억압받는 현실과 영화에 대한 열정이 만나 극과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왜 그토록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노 베어스>는 ‘곰은 없다’는 진실을 통해 <노 피어스(No fears)>, ‘두려움은 없다’로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영화는 메시지를 넘은 행동, 실천이 된다.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대나무에도 꽃을 피울 거야”

     

이란에서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세디흐 아주머니가 나에게 읊어 준 시구이다. 대나무에 꽃이 피려면 최소 60년, 길게는 120년을 기다려야 할 만큼 진귀하고, 그래서 대나무꽃은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많은 이란인들처럼 시를 사랑하는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지만 나에게 가장 많은 이란어를 가르쳐줬다. 그녀에게 가장 처음 배웠던 페르시아어가 “준”이었고 다음 단어가 “누쉬 준”이었다. 준은 영어의 ‘dear’와 같은 의미로 소중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고 “누쉬”는 “먹으라”는 말이다. 이란 여행이 끝난 후 다시 보게 된 <노 베어스>에서 감독과 간바르 어머니의 대화 속 이 단어가 내 귀에 친근하게 들려오며 이란에서의 추억 속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만약 구금과 억압 상태에 있지 않았더라면 감독은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노 베어스>의 초반 장면에서 파나히 감독의 카메라가 시골 마을 아이들과 이웃,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갔듯 이란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자유롭고 따듯하게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억압과 통제의 상황은 비단 이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부조리하고 절망적인, 출구 없어 보이는 막막한 상황에서도 예술은 행동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대나무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최엄윤 / 독립문화 기획자 예술가와 행정가, 연구자와 활동가를 넘나드는 경험을 쌓고 독립문화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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